00008 1. 모든 것을 잃은 소년 =========================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들고 온 종이를 펴며 말했다.
“자! 짐작하고 있겠죠? 여러분의 졸업 시험 결과가 나왔어요.”
웅성웅성.
“어제 얘기했던 대로, 성적은 공개하지 않고, 개별 면담을 통해서 이야기하겠어요. 동시에 졸업 후 진로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거고. 다들 알고 있죠?”
“네-.”
저 대답에 별 기운이 없는 것은 진로가 이미 대충 정해진 뒤라서 그렇다. 말했듯이 북부의 가용자원은 거의 모두 북부에 재투자된다. 마법사라고 다를 리 없다. 다른 아카데미들과는 달리 북부의 마법 아카데미는 북부 대공작이 후원하며 군사 시설로 취급받는다. 군에 필요한 마법사들을 아카데미 졸업생으로 충당하기 위해서이다. 성적이 우수하면 승진에 용이한 보직, 현장 근무가 많지 않은 보직을 택할 수 있고, 성적이 나쁘면 종군 마법사가 아닌 대장간 같은 곳에서 처음부터 일해야 하는 차이가 있는 정도이니까.
“그래요. 순서대로, 내 연구실에서 상담을 하고, 상담이 끝나면 집에 돌아가도 좋아요. 그리고, 내일은 졸업식인 거, 다들 알고 있죠? 내일 아침 10시까지 학교로 오면 돼요. 내일 졸업식이 끝난 후 좀 더 길게 얘기할 시간이 있을 거에요.”
그렇게 말한 요안나 선생님은, 종이를 보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면담 순서는 오늘 아침에 내가 추첨해서 나온 거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러면, 제일 먼저 기리인 모스.”
“네?”
설마 맨 처음일까 하고 방심하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요안나 선생님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니가 첫 번째야. 따라와. 나머지는 교실에서 기다리세요. 사고치면, 등수가 바뀔 지도 몰라요~”
그렇게 말하며 선생님은 경쾌한 걸음걸이로 뒤로 돌아 교실 밖으로 향했다. 나는 얼른 아직 열지도 않은 가방을 챙겨들고, 얼른 선생님의 뒤를 따라나섰다. 내 등 뒤에서 다시금 내 쪽을 바라보는 다른 학생들의 수군거림이 커지는 것 같아, 나는 발걸음을 재촉해 얼른 요안나의 뒤를 따랐다.
내 앞에서 경쾌한 걸음걸이로 걸어가는 선생님의 뒤를 따라가자니, 로브로도 완전히 감출 수 없는 그 탄력있는 엉덩이 쪽으로 자꾸만 눈이 갔다. 나는 왠지 모르게 죄송스러운 기분이 들어 얼른 눈을 돌렸다. 그런데도 어느새 눈이 그 곳으로, 요안나 선생님의 잘록한 허리와 도톰한 엉덩이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 복도를 따라서, 두꺼운 문을 지나자, 어느새 우리는 선생님의 연구실에 도착했다. 책상 앞의 자신의 의자에 앉은 선생님은 책상 옆에 있던 의자를 내 쪽으로 밀어주신 후, 옆에 쌓여 있던 끈으로 묶인 서류철들 맨 위에 놓여 있던 묶음을 집어들었다.
그걸 보고 내가 불쑥 말했다.
“아까 추첨하셨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군요.”
내 뜬금없는 말에 선생님은 응? 이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건 맞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니? 선생님 말을 못 믿은 거니?”
“설마요. 그냥, 표지에 제 이름이 적혀 있길래요.”
“그런데? 그게 아침의 추첨하고 무슨 관계일까?”
요안나 선생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1학년 때 우연한 계기에 친분이 생긴 이래, 우리 둘이 종종 하는 게임이었다. 추리하기. 상황을 던져주고 답을 찾기. 가끔은 지금처럼 내가 스스로 문제를 찾아나서기도 했다. 이번 거야... 별 거 아니지 뭐.
“선생님이라면 추첨 결과대로 기록들을 정리해놓으셨을 것 같아서요. 제 기록을 찾는 게 아니라 맨 위에서 집으셨잖아요.”
선생님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래, 맞아. 역시. 우리 기리인의 관찰력과 추리력은 대단해.”
그러면서 선생님은 귀엽다는 듯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셨다. 그 손길이 소름돋을 정도로 기분 좋으면서도, 나는 약간 부끄러움과 씁쓸함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왜 내가 이 ‘추리’를 지금 입밖으로 꺼냈는지 잘 알고 있다. 선생님 앞에서 지적인 남자로 보이고 싶은 허영이라는 걸 말이다. 그 부끄러움과 씁쓸함이 자기 혐오로 연결되기 전에 얼른 머릿속에서 그 생각을 치워버린 나는, 마침 생각이 나, 선생님의 눈을 바라보며 속으로 말했다.
‘정보 확인.’
이름 : 요안나 이스카
나이 : 26
HP : 1600
힘 : 55
민첩 : 80
지력 : 95
마나친화력 : 90
매력 : 93
지구력 : 78
특수 : 자애 92
스킬 : 교육 B, 정통마법 A-, ??? A0>
자애가 90점이 넘는다라. 요안나 선생님 답네. 그런데 ???은 뭘까. 하지만 그걸 물어보자면 내가 저런 정보를 볼 수 있다는 걸 밝혀야 하는데, 그걸 얘기하려면 입이 꽉 막히니까, 지금은 물어볼 수 없다. 언젠가 나중에 선생님한테 숨겨진 것이 있는가 물어보자. 나는 잠자코, 서류를 펼치고 내용을 살펴보는 선생님의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93이면 선생님도 매력이 꽤 높은 편이구나... 나 정도는 아니지만.
“축하해.”
선생님은 서류철 맨 위에 있는 두툼한 종이를 기리인 쪽으로 내밀었다. ‘장학증서’라고 써 있었다.
“어제 제도 아카데미의 파견 시험관님이 등수 나오는 걸 기다려서 주고 가셨어. 애초에 써 온 거에다가 어제 도장까지 찍고 가셨지.”
‘정보 확인.’
<물품 정보>
<장학증서>
<제도 아카데미의 직인이 찍힌 장학 증서. 수혜자는 기리인 모스. 여기에 이름이 적힌 인물에게 졸업시까지 제도 아카데미의 학비 및 부대비용을 면제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직인에는 마나가 불어넣어져 있어 각도에 따라 색깔이 다르게 보인다.>
“그리고... 이거.”
‘정보 확인.’
<물품 정보>
<장학증서>
<북부 대영주의 직인이 찍힌 장학 증서. 수혜자는 기리인 모스. 여기에 이름이 적힌 인물에게 제도 아카데미 재직 기간동안 매달 5드로그의 학비를 지원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트리클 신전의 인증이 함께 되어 있다.>
“이건...”
“대공작님이 어제 집사장님을 통해 전해주신 거야. 학비는 면제되고 밥은 나오지만, 용돈이나 책값 같은 건 부모님 손을 벌릴 수는 없는 상황이잖아?”
아... 감사한 일이다. 부모님과 떨어져서 부모님께 손을 벌리려도 벌릴 수 없는 상황인데.
“네... 원래는 아르바이트 같은 거라도 할 생각이었는데...”
“그만큼, 대공작님부터 모든 사람들까지 너에 대한 기대가 커.”
“선생님은요?”
나는 어쩌자고 그 말을 뱉은 내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대체 이 말이 왜 나왔을까.
“응? 나? 나도 기대하지! 기리인 너는 이 선생님의 애제자 아니니~”
다시 손을 뻗어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는 선생님. 나는 입가를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 애써야 했다. 마음 한 구석은 나를 제자로밖에 보지 않는다는 사실에 씁쓸해했지만, 당장은, 선생님의 손길이 너무 기분 좋았다. 슥슥 쓰다듬던 선생님은 손길을 거두고 말했다.
“잘 하면 제도에서 만날 수도 있겠구나.”
“네?”
내가 놀라 되묻자 선생님은 웃으며 말했다.
“내년이 내가 여기에서 근무한지 7년째야. 그래서 1년 안식년을 얻었거든.”
화끈. 얼굴에 피가 몰리는 느낌이다.
“아... 어디로 가세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아직. 제도에 가기는 해야 해. 그랜드 아카데미에서 찾아볼 게 있거든. 그런데 어디에서 연구할지는 잘 모르겠어.”
“아...”
나는, 이번에도 자신의 입을 통제하지 못했다.
“같이 가실래요?”
“응? 아...”
내가 적잖이 당혹해있는 사이에, 선생님은 여전히 다정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기리인, 너는 네 위치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어. 대공님이 네가 혼자 가게 내버려두지 않을걸? 정말 오랜만에 북부에서 나오는 전 대륙급 인재인데, 가다가 무슨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제도 아카데미에서도 사람이 나올 거고, 네가 제도에서 잘 정착할 수 있게끔 대공가의 사람들이 도와줄 거라고 했어.”
대공가에서 사람들이 나온다고?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멍하니 할 말을 잃었다. 요안나 선생님은 여전히 미소띤 채 말했다.
“선생님은 제도에서도 몇 년 안 있었고, 그나마도 가본데만 가 봐서 큰 도움이 안 될 거야. 가끔 제도 아카데미 근처에 가면 부를게. 선생님이 그래도 몇 군데 맛있는 거 파는 집은 알고 있거든? 내가 친히 친애하는 제자에게 맛난 걸 먹여주지. 기대해도 좋아!”
나는 그 뒤로 면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내일 졸업식 후에 누구를 만나면 된다고 했는데. 내일 오면 되겠지.
내 속에 있는 ‘가장 냉정한 부분’은, 내가 선생님을 생각하며 설레어할 때마다 콕콕 찔러오고는 했다. 짝사랑이자 첫사랑이다. 이루어지기 힘들다고.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반쯤은, 제도로 가면 선생님을 다시 보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기에 남을 테고, 나는 그랜드 아카데미에서 몇 년을 보내게 되겠지. 그 후에 다시 요안나 선생님을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제도에서,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
둘이서 데이트 비슷한 걸 할 거다.
그 사실이 내게는 장학증서 두 개를 받은 것보다 더 행복했다.
불현듯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학교를 나와 중앙대로를 한참 걸어가고 있던 중이었다. 어떻게 짐을 싸서 학교를 나온 걸까. 붕 떠버린 것 같은 마음으로, 나는 영주님이 계시는 내성의 벽을 따라 걷고 있었다. 언제 여기까지 왔는지, 이미 나는 내성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의 거주구역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내성의 남쪽 문이 열려 있었고, 성에서 일하는 하녀나 집사, 하인들이 여럿 오가고 있었다. 이렇게 한낮에 학교를 나서 집으로 가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내 얼굴을 알아보는 것 같았다. 내 얼굴을 알아보고 놀란 눈으로 보는 성문의 경비병, 옆의 하녀와 속삭이며 그를 흘깃거리는 성의 하녀들. 간혹 친구들의 부모님이나 가족, 혹은 한 주에 한 번씩 트리클 신전에 나갔을 때 봤던 얼굴들도 있었다. 그 사람들도 모두 나를 보고 ‘오- 쟤가 걔구나’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행히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없어, 느린 발걸음이나마 나는 중앙대로를 향해 계속 걸어가고 있었다. 그 때였다.
“이보게, 기리인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나서 뒤를 돌아보니, 익숙한 얼굴이 눈 앞에 서 있었다. 아침에 리미의 옆에 서 있었던, 늙은 집사 자크였다. 손에는 짐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아, 자크님. 안녕하세요.”
“아침에는 실례가 많았네.”
“아닙니다. 늘 감사했습니다.”
나는 다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리미는 싫고 역겹지만, 자크 할아버지는 언제나 나에게 친절하고 정중하게 대해주었다. 아까도 그렇고. 그 감사한 마음을 이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다. 고개를 들자 자크 할아버지는 나를 온화한 눈길로 바라보고 계셨다. 그러다, 말씀하셨다.
“잠시 시간 괜찮은가?”
“네, 어... 무슨 일이신지 여쭤봐도 될지...”
“한 가지 부탁을 좀 할까 해서 말이야.”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부탁이시라면 꼭 들어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나는 정중하게, 하지만 비굴하지 않게 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대로 했다. 자크에게 미움을 사게 되면, 리미를 막아줄 수 있는 유일한 제어장치가 없어지는 셈이니까. 물론, 그런 계산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할아버지에게 은혜를 갚고 싶은 생각도 있기도 했다. 자크 할아버지는 잠시 머뭇대더니 주저하며 말했다.
“리미 아가씨 말일세...”
“네.”
물론 리미 아가씨의 일이겠지. 자크 할아버지는 조금 더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너무 미워하지 말아주게.”
어... 약간은 기대하지 않았던 말인데... 내가 약간 놀라 할아버지를 바라보자 자크 할아버지는 약간은 겸연쩍다는 듯 손가락으로 뺨을 긁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빈 말로라도 아가씨가 착하다거나, 지금까지 한 행동을 후회하고 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네. 거짓말이 될 테니까. 틀림없이 아가씨는 귀족다운 분이시지. 오만하고, 독단적이시며, 주변이 자신의 뜻에 맞추기를 원하시는 분이야.”
나는 아까보다 조금 더 놀라 물었다.
“실례지만... 그런 말씀을 가문 외부의 사람에게 해도 괜찮으신 건지요?”
“당연히 괜찮지 않지. 하지만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리미 아가씨는 내가 없으면 당장 생활이 힘드니까, 설령 요뢰브 백작님에게 내 얘기가 들어가도 아무 문제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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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마음에 안 들어하실 만한 부분일지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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