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9 1. 모든 것을 잃은 소년 =========================
헐... 약간 벙쪄있는 나를 본 자크 할아버지는 씩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 배짱이 없으면 귀족가에서 일하기는 힘들다네. 어쨌든, 리미 아가씨의 성격 때문에 가장 많이 피해를 본 사람이 기리인 자네지. 물론 리미 아가씨가 기리인 자네를 직접 괴롭힐 만큼 담이 크지는 않았다네. 혹시 그거 아는가? 리미 아가씨가 자네에게 혹시라도 미움을 살까봐 전전긍긍했다는 거 말일세. 그게 아가씨가 자네를 직접 해꼬지하지 못했던 이유라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 대책은 성공하지는 못했다라고 말해 주고 싶군요.”
“으흠. 어쨌든 말일세.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가씨는 아직 18살밖에 되지 않았다네. 지금 내가 나와있는 것을 보고 짐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자네가 제도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후 몸져 누우셨어. 잠이 드신 걸 확인하고 잠시 물품들을 사러 나왔던 참이라네.”
“아...”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쌤통이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는 거다. 아까 리미가 우는 걸 봐서 그런가. 그녀의 행동이 역겹다고 여전히 생각하는데도, 나는 내가 느끼는 기분을 말로 설명하지 못해 좀 황당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안해 할 필요는 없네. 아가씨의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하니까. 나도, 백작님도. 단지, 귀족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여식이, 보고 배운 방식대로 행동했던 거라고 생각해주게. 자네가 4년간 힘들었던 것을 모르는 바도 아니고, 보상해 주기는 더더욱 힘들겠지만, 그래도 자네가 제도로 떠나기 전에 한 번은 얘기하고 싶었네. 그동안 미안했네. 아가씨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주게.”
쉽게 말해 할아버지는 ‘나를 봐서라도 악감정을 갖지 말라’라고 하시는 거구나. 나는 그 말의 내용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말씀하시는 태도에 반쯤 감화되어 대답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거짓말은 못 할 것 같으니, 당장 아무런 감정 없이 지낼 수는 없겠지만, 노력해보겠습니다.”
자크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래, 그 정도면 돼. 고맙네.”
‘띠링!’
응? 이건 어젯밤에...
<퀘스트 – 아가씨와 장미>
<리미에게 결코 좋은 감정이 있을리 없는 당신. 그러나 자크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리미에게, 그리고 자크에게 호감을 사 놓는 것이 앞으로도 유리할 것이라는 점은 말하지 않아도 뻔한 사실입니다. 충격으로 쓰러진 리미에게 꽃을 보내보세요.>
<마법으로 꽃을 만들어 자크에게 전해주세요.>
<보상 : 자크와 리미의 당신에 대한 호의와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나는 자크 할아버지 앞에서 당황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매우 신경써야 했다. 뭐, 뭐야 이거. 어제 그 난리를 칠때는 아무런 퀘스트도 뜨지 않더니. 이 ‘퀘스트’를 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오지랖 한번 넓다 참... 내 감정 같은건 신경쓰지 않는 건가...
띠링!
<우선순위를 어느 것에 두는 가는 당신의 자유입니다. 다만, 감정을 잠시 뒤로 하면 더 큰 보상이 올 수 있습니다. 당신이 그간 겪은 경험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 저 말이 틀린 건 아니지.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자크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는 왼손을 앞으로 뻗으며, 몸 안의 마법회로를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서클이 하나, 둘, 셋, 네 개까지 돌기 시작한다. 익숙하게, 주변의 마나를 끌어들여, 회로를 통해 돌리며 주문을 읊었다.
- 고급(Advanced), 물체 창조(create object), 꽃(flower).
작은 섬광이 번쩍 했다. 회로를 타고 돌던 마법이 내 왼손 끄트머리로 빠져나가며, 내 왼손 안에 꽃을 한 송이 쥐어주었다. 내가 만들어낸 것은 장미였다. 겨울에, 이곳 북부 대요새에서는 보기 힘든.
“이건...”
휘둥그레진 눈으로 할아버지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그걸 자크 할아버지에게 건네며 말했다.
“마법으로만 만들 수 있는, 무지개 장미입니다.”
활짝 열려있는 꽃은, 꽃잎 꽃잎마다 색깔이 모두 달랐다. 심지어 한 꽃잎 안에서도 한 색깔에서 다른 색깔로 변화하고 있었다. 색깔은 물결치듯 천천히 돌며, 밖에서 안으로 모여들어오고 있었다. 좋아. 깔끔하게 성공했군.
“리미에게 전해주십시오. 건강하라고도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략 여섯 시간은 유지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 고맙네, 기리인군.”
자크 할아버지는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나는 마주 고개를 숙이고, 인사한 후 다시 길을 걸었다. 4년 내내 곤란함과 짜증과 역겨움의 대상이었던 여자에게 장미를 보낸 자신이, 다소 의아하게 느껴졌다. 왜였을까. 그냥 알겠다고만 했어도 자크는 만족했을 텐데. 단지 퀘스트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인정하기 싫지만, 아마도... 아직도 난 요안나 선생님 때문에 들떴나보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 한숨을 폭 내쉬었다. 별 일 없겠지. 곧 제도로 떠나면 그만이니까.
‘띠링!’
<퀘스트 성공>
<들뜬 기분 때문이든, 손익을 계산한 행동이든 당신은 리미에게 꽃을 건넸습니다. 자크와 리미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다음에 그들이 당신에게 호의를 베풀 가능성이 올라갑니다.>
그래... 이런 점도 있으니까. 이득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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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걸어 집에 들어오자 광장의 시계탑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일곱 번. 7시. 딱 점심 먹을 때다. 나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어머니는 오시기에는 이르다. 어머니가 이럴 때를 대비해 삶아두시는 감자 한 알과 찬장에서 꺼낸 곧 딱딱해질 빵을 꺼내고, 찻잔을 꺼낸 후 차통에서 차 가루를 꺼내 담고 마법으로 뜨거운 물을 만들어 거기에 부었다. 그렇게, 간단하게 점심을 때운 나는 그릇을 정리한 후 내 방으로 가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내일 졸업식하고 사람들 만나 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미리미리 내 물품을 정리해둬야 한다. 몇 년은 이 방을 떠나 있을 거니까. 책은 가장 기본적인 것만 꾸리고. 제도에 가서 필요한 걸 알아보고 새로 사야지. 거기서도 로브 입고 다닐 거고, 로브는 주니까... 기본 옷이랑 속옷 같은 걸 꾸려야 하는데 그건 어머니께 말씀드려야 한다.
그럼 지금 당장 할 일은... 아차. 나는 방 한 구석에 있던 자그마한 가방을 가져와,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곱게 두 번 접혀 놓인, 하얀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잊지 않고 이 가방을 열었을텐데. 오늘 확실히 나는 들떠있나보다. 생각과는 관계없이 나는 익숙하게 몸 안의 서클을 돌리기 시작했다. 두 개, 두 개. 네 개의 서클이 돌아가고, 나는 손으로 손수건을 가리키며 말했다.
“고급, 청결(Cleanse). 고급, 보존(Preserve).”
손수건이 엷게 빛나며, 안 그래도 새하얀 손수건이 다시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빛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손수건을 조심스럽게 집어들고, 펼쳤다. 그러면서 옛날, 이 손수건을 처음 받던 날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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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안 깔어?”
‘얼른 끝내주라...’
“니가 그랬대매? 어차피 3년만 지나면 제도 아카데미로 갈 거니까, 여기에선 배울 것도 없다고?”
“제가 언... 윽!”
‘헛소리하는 주제에 이런 건 또 꼼꼼하네...’
나는 한 대 얻어맞은 배를 붙잡고, 앞으로 숙여지는 몸을 억지로 균형을 잡으며, 쓰러지지 않으려 발버둥치며 생각했다. 얼굴에 멍자국이 보이면 이야기가 나올 테고, 잘 보이지 않는 곳을 잘 보이지 않게 때려야겠지. 비틀대다가 한 쪽 무릎을 꿇었지만, 간신히 넘어지지는 않았다. 넘어지면 짓밟힐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자존심 문제다. 저런 놈들한테 무릎을 꿇어줄 수는 없다.
“니가 머리가 좋으면 얼마나 좋냐? 아카데미가 우습고 선배가 우스워? 누가 너따위 새끼를 제도에서 받아는 준대? 좆같은 새끼야. 전에도 얘기했지? 똑바로 하라고.”
지랄하네. 이렇게 으슥한데서 몇 명씩 오지 않으면 아무 말도 못 하는 주제에.
“눈 깔으라고 했지?”
빨리 끝내라. 귀찮다.
“이 새끼가 어디서 눈을 그따위로 떠?!”
짝!
한 쪽 뺨이 불에 탄 듯 화끈한 통증이 확 오며 내 몸이 크게 기울어졌다. 아파하거나 말거나 ‘가장 냉정한 부분’은 저 이름도 잘 모르는 선배가 갑자기 뺨을 후려갈겼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제법 덩치가 있는 그 놈이 온 힘을 기울여 때리자, 빈말로도 체격이 좋다고 하기는 힘든 나는 날아가다시피 옆으로 쓰러졌다.
사람들 눈에 보일까봐 얼굴 안 때리는 건 줄 알았더니, 그냥 병신새끼들이구만...
“이 개새끼야, 눈 똑바로 뜨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훨씬 더 상황을 빨리 끝낼 수 있었다. 그냥 몇 대 맞아주고, 죄송합니다 잘 하겠습니다 했으면 됐겠지. 그런데도 한심하고 병신같이 보는 표정을 결국 숨기지 못한 것은, 아직 열다섯살밖에 안 된, 내 치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표정에 민감하게 반응한 건 선배들 스스로도 지금 하는 짓이 열등감의 발로인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 밟아봐라, 걷어차봐라. 내가 니네들한테 숙일 것 같냐. 이런 눈길로 그 놈들을 한껏 경멸해주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 놈들이 발을 들어올렸을 때.
“그만!”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골목이 꺾어진 곳에서 로브를 입은 한 여자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어. 담임선생님이다. 작년부터 아카데미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는, 올해 처음으로 1학년 담임을 맡은, 젊고 예쁘고 쭉쭉빵빵하기까지 한데 착하기까지 해서 인기가 정말 많은 요안나라는 선생님이었다.
“시바, 좆됐다...”
“아 그러게 학교에서 좀 떨어져서 하자니까.”
“새끼야, 사람 없는 데가 지금 시간에 어디 있다고 그래.”
선배들이 들어올린 다리를 어색하게 내려놓으며 서로 속삭이고 있는데, 그 소리를 멀리서도 어떻게 들었는지 다가온 요안나 선생님이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그래. 설사 사람 없는 데, 예를 들면 수로 같은 데 갔어도 소용 없었을 거야. 학교에서부터 너희들을 발견하고 따라가고 있었거든.”
그렇게 얘기한 요안나 선생님은, 입 속에서 흘러나온 피를 닦고 있던 내 쪽으로 다가왔다.
“괜찮니?”
입 안을 혀로 굴려보았다. 아. 쓰라리다. 나는 피 섞인 침을 옆에 뱉어낸 후 선생님에게 말했다.
“이빨은 안 부러진 것 같아요. 피는 입 안이 찢어져서 나온 거구요.”
내 생각보다 말이 다소 퉁명스럽게 나갔다. 보고 있었으면 진작 구해줄 것이지. 선생님은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볍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래... 잠시만.”
입 속으로 뭐라뭐라 주문을 읊던 선생님이 은은한 백색으로 빛나는 손을 내 부어오른 뺨에 갖다대며 말했다.
“치유(heal).”
우와. 나는 입 안을 혀로 훑었다. 아까 찢어진 상처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뺨의 화끈거리던 통증도 한 번에 사라졌다. 3서클의 치유마법을 준 무영창으로, 상처 하나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펼쳐보이다니. 선생님이 그럼 지금 최소 6~7서클은 된다는 이야기인데. 마법을 마치고 손을 거두어들이며 일어선 선생님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이 뭐라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그 놈들이 말했다.
“저기요, 선생님, 갈 길 가시죠?”
“현행범이 적반하장으로 나오신다? 너희 아버지 뭐라도 되니?”
요안나 선생님은 ‘내 알 바 아님’이라는 예의없는 말투로 말을 던졌다. 지금 막 말을 꺼낸 놈이 부들거리며 말문이 막혀하는 동안, 옆에 있던 놈이 “경비대장님 둘째 아드님입니다. 말 조심하시죠?”라고 말했다. 그 놈들은 몰라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요안나 선생님이 저 말을 듣고,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우스워하고 있다는 걸.
“어이구, 그러세요? 경비대장님 아드님이시라고? 그래? 잘 됐네. 내일 경비대장님 아카데미로 오시라고 해.”
“...네?”
“대장님께 이걸 보여드리려고.”
요안나 선생님은 빵빵한 로브의 가슴 옷깃 속으로 손을 넣어, 아기 주먹만한 파란 구슬을 꺼냈다. 그게 뭔지 알아본 그 놈들의 얼굴이 파란 구슬 색깔처럼 새파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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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지루한가요.
읽는 사람도 적고, 반응도 없고 조금 지치네요.
좀 더 힘내서 써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주고 가시면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