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2 1. 모든 것을 잃은 소년 =========================
요안나 선생님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덤덤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씩 흘러갈수록 사이에 쌓인 침묵의 무게가 나를 점점 더 강하게 짓눌러오고 있었다.
“말씀 안 드리려고 했어요. 끝까지 저 혼자 간직하고, 나중에 선생님 웃으면서 보고 싶었는데...”
아. 이건 뭘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눈에 고여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일까. 슬프지 않은데. 왜 눈물이 나는 걸까. 가슴이 답답하다. 아까부터 숨이 갑갑하다. 숨을 한껏 들이쉬려 하지만 가슴 안에는 이미 뭔가 가득 차 있다. 공기는 아닌 것 같은데,
안 말하려 했는데. 왜 나와버린 걸까.
그때 눈물로 축축해진 내 볼에 뭔가 와 닿았다. 따뜻했다. 선생님의, 손이었다. 그리고 손을 뒤따라, 아까 나에게 닿아왔던, 향기가 따라왔다.
“기리인...”
선생님은 조용하게, 내 눈매를 매만지며, 말했다.
“고마워. 나를 그렇게 좋아하고, 동경해 줘서.”
그렇게 말한 선생님은, 손을 거뒀다. 나는 선생님의 손을 다시 잡고 싶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조용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갑갑했던 가슴에, 후끈거리고 두근거리던 가슴 한 가운데에, 차가운 냉기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 냉기가 점차 영역을 넓히며, 내 가슴을 싸늘하게 얼려갔다.
선생님의 한 걸음 물러섬, 그것이 모든 대답이 되었다.
선생님은 아까 나에게 잡혔던 손목을 다른 손으로 감싸쥐고, 가슴 앞에 모았다. 아팠나. 아프게 잡지는 않았는데. 선생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안해, 기리인. 선생님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지적이고 다정한 사람이 아냐. 나는, 기리인 같은 훌륭한 사람의 애정을 받기에는 너무 못나고, 못된 사람이야. 아니, 그보다 더 할지도 몰라. 나를 정말 알게 되면, 기리인은 선생님을 원망하고, 매도할 지도 몰라. 아니, 그럴 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선생님은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이미 얼어버린 내 가슴 한 가운데로, 밟힌 얼음에 금이 가듯, 쩡, 하고 금이 쭉 하나 갔다.
“나같은 사람에게는 가까워지지 않는 게 좋아. 기리인. 지나고 나면, 제도로 가서 새로운 환경에 접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어릴 때의 풋사랑 같은 건 잊을 수 있을 거야. 나중에, 지금을, 지금까지의 선생님을 좋게 추억해주렴. 알겠지?”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한 걸음 다가가려 하자, 선생님은 두어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선생님의 얼굴 뒤로, 온통 붉어진, 약간 어두워진 석양이 걸려 있었다.
선생님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선생님의 티 하나 없는 새하얀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선생님을 안아주고 싶었다. 아까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선생님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아니라고, 선생님은 좋은 사람이라고, 선생님을 좋아해서 다행이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손을 뻗을수록, 선생님은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내가 다가갈수록, 우리 사이의 거리는 더더욱 벌어졌다.
“미안해, 기리인. 하지만 이게 최선이야. 기리인 너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미안해. 기리인의 마음을 아프게 한 벌은 언젠가 내가 받을게.”
그렇게 말하고, 선생님은 뒤로 돌아, 달려갔다. 마치 선생님이 어두워지는 석양 속으로 달려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선생님 쪽으로 한 걸음 뻗은 채로, 선생님 쪽으로 선을 뻗은 채로 그대로 굳어 있었다.
쩡.
아까 금이 갔던 내 가슴이 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각조각나 떨어진 내 가슴이, 아까는 답답할 정도로 뭔가 가득 찬 것 같던 가슴이, 지금은 완전히 휑한 느낌이 들었다. 찬 바람이 가슴 속으로 그대로 들어왔다 나갔다. 예전에 선생님이 향기와 함께 주었던, 가슴 속 한 구석의 따뜻함이, 어느새 그 찬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차였다.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외투도 입지 않고 저녁 때를 한참 넘겨 집에 들어온 내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내 몸 상태가 어떤 줄 아는 부모님들은 기겁을 하셨다. 그 꼴을 하고 대체 어디 갔었냐는 물음에 정확하게 답변하지 못하는 내 태도를 보고 아버지는 화를 내셨고, 어머니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셨지만 내 처신이 마뜩찮다는 투를 보이셨다.
두 분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그 자리에서 치유 마법을 시전해 내 몸 상태가 괜찮아졌음을 보여드린 후, 나는 저녁도 먹는둥 마는둥 하고 방으로 가서 침대에 누웠다. 아까 찬 바람이 들어와 휑한 냉기로 가득 찬 내 가슴은 여전히 불씨가 없이 차가웠다. 이것만큼은, 치유 마법으로도 고칠 수 없다.
하아...
나는 불도 켜지 않은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슬픈가? 아니, 슬프지는 않았다. 그저, 아까 그 자리에 나는 내 깨어진 가슴의 일부분을 두고 온 느낌이었다. ‘냉철한 부분’이 있는 덕에 사람을 대하는 거나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아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
선생님은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 ‘미안하다’는 말은 나도 많이 했던 말이다. 내가 의아한 건, 왜 선생님은 자신을 그렇게 깎아내리셨을까. 왜 자신을 사악하고, 못된 존재라고 묘사하셨을까. 왜 내 마음이 고맙다고 하면서도 자신은 그런 마음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라고 하셨을까.
그리고, 무시하고 싶었지만, 모르는 체 하고 싶었지만, ‘냉철한 부분’이 ‘눈 돌리지 마. 직시해.’라며 이야기해 오는 부분.
내일은 졸업식이다. 나는 내일, 학교에 가서, 상과 장학증서를 수여받고, 요안나 선생님을 한 번 더 봐야 한다.
선생님은 나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나는 선생님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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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413년도 북부군 마법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학생들은 우리 북부군의 동량이 될 인재들로서, 그 어느 해보다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졸업하는데 있어 본 교장은 정말 자부심을 느껴 마지 않습니다. 이는 모두, 언제나 아카데미를 아껴주시고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시지 않는 대공 각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힘입음입니다. 우리 아카데미 교직원과 학생, 졸업생은 언제나 대공 전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오늘따라 더 힘을 준 장광설을 내뿜고 있는 우리 교장. 사람은 참 좋은데 왜 저기만 올라가면 저러는지 알 수가 없다. 평소에도 잘 듣고 있지 않지만, 오늘은 더더욱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맨 앞줄에 앉아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좀 있다가 단상에 올라가야 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올라갈 때 아마 ‘뭘 쑥스럽게 불러서 상까지 주냐’ 이런 마음이었겠지만, 오늘은 정말 올라가기 싫었다. 어느 한 구석에 요안나 선생님이 앉아있을 단상 위에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냉정한 부분’의 도움이 아니더라도, 내가 올라가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잘 알고 있다. 나는 무려 대공 전하께 상을 받게 되어 있다. 여기서 내가 단순히 어제 채였다고 저 자리에 올라가길 거부한다면, 대공 전하께서 나를 곱게 보실 리 만무하다. 그러면 나에게 주기로 하신 매달 5드로그의 장학금도 날아갈지도 모르지. 주기로 했던 도움도 날아갈테고.
그래도, 싫은 건 싫다. 생전 처음으로 차여서...도 있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나는 내 서투르고 어설픈, 그리고 성급한 고백으로 인해, 지난 4년간 선생님이 나에게 주었던 가슴 속의 따스함을,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날려버린 게 너무 싫었다. 아직도 내 가슴 속은 어제 깨어져 구멍이 난 것처럼 휑했다.
그 결과, 오늘 아침에 마지막으로 교복 로브를 입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곤돌라를 타고 학교로 향할 때도, 맨 앞줄로 안내받아 자리에 앉았을 때도, 나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채 움직이는 자동인형 같은 느낌이었다. 내 의식은 멍한데, 내 얼굴 표정은 굳어있는데, 나는 저절로 손발을 움직여 자리에 가고, 앉았다 일어섰다 하고 있었다.
얼른 끝나라.
“이상으로 교장선생님의 축사를 마치겠습니다. 다음은 우수졸업자에 대한 시상 시간이 있겠습니다. 시상해 주실 분은, 위대하신 황제 폐하로부터 인정받은 북부 영지의 합법적인 지배자이시며, 북부 대요새의 지도자이시며, 제국군 북부군의 총사령관이시며, 르플레스탁 기사단의 단장이시며, 북부 마법 아카데미와 마탑의 합법적인 소유자이시며, 니아트 백대산맥의 수호자이시며, 트세롭 백작령과 대수림의 정당한 상속자이시며, 제국 추밀원의 일원이시며, 북부 영지의 모든 것의 여탈을 관장하시는, 북대공 전하이십니다.”
저 긴 호칭이 시작되기도 전에 모두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 이티클레 대륙에서 존귀함으로 따지면 황제 폐하를 제외하면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 현 북대공 전하께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현 북대공 전하이신 오스카엣 대공님은 천상 무골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 평가가 틀리지는 않는 모양이다. 대공님은 이런 자리에까지 완전히 반짝거리며 빛나는 풀 플레이트 차림을 하고 계셨다. 장갑 대신 가벼운 금속 건틀릿을 낀 것은 나에게 뭔가를 건네야 하기 때문이겠지.
대공 전하께서 단상에 서서, 헛기침을 한 번 하시더니, 가볍게 말씀하셨다.
“모두 일어서시오.”
가볍게 말했는데도 그 소리가 아카데미 운동장을 가득 메운 학부모들에게까지 들린 것 같았다. 무릎을 꿇고 있던 사람들이 한시에 몸을 일으켰다. 역시, 대륙에 몇 안되는 오러 마스터. 무골 집안에서 태어난 진성 무골 답다.
사회를 보시던 스프리 선생님이, 예의 약간은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시상하겠습니다. 먼저, 최우수 졸업생에 대한 시상입니다. 기리인 모스, 앞으로.”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을 올랐다. 이 자리에서는 창의적일 필요가 없다. 주어진 역할을, 나에게 기대하는 역할을 하고, 기대하는 말을 해 주면 된다. 나는 정중한 동작으로 수상자를 위한 단상에 올라갔다. 대공 전하께서 풀 플레이트 메일을 절그럭거리며 내 앞에 다가와 섰고, 대공 전하 뒤편에는 시상을 돕기 위해 누군가 상장과 졸업장 등을 들고 서 있었다.
아.
요안나 선생님이었다.
평소보다 더 단정하고 단아하게 꾸민 요안나 선생님은, 언제나보다 더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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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을 계산못해서 비축분이 확 떨어졌네요. 10편 갓 넘자마자 허덕일줄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주고 가시면 정말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