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15화 (15/309)

00015 1. 모든 것을 잃은 소년 =========================

<자기 희생을 거쳐 당신은 숭고한 영웅으로 거듭났습니다.>

내 병실에는 온갖 꽃들과 과일들이 빼곡이 들어찼다.

북부 대요새의 거주구역 절반 이상을 태울 뻔한 초대형 참사를, 그저 1~20년에 한 번쯤 올 수 있는 대형 화재 정도로 막았다. 그것도, 자신의 능력 이상의 마법을 무리하게 사용해 가면서. 죽은 사람들은 슬픔의 근원이 되고 타버린 집과 가게는 한숨의 근원이 되지만, 아니 그러하기에 더더욱, 사람들은 나를 영웅으로 생각하며 칭송하는 모양이다.

‘시스템’이 말해 준 대로 나는 ‘냉철’을, 그것도 93이라는 아주 높은 수치로 – 내 지능에 비교해 보자면 높은 수치이겠지 – 얻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내 상황을 냉철하게 생각하고 또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고전적 정의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영웅이었다. 비범한 어린 시절, 뛰어난 재능, 커다란 적, 자기 희생을 통한 극복. 여기서 자기 희생이 더욱 커질수록 영웅의 비극성은 더욱 커지고, 비극성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높이 칭송한다.

그 점을 고려해 보자면 나는 내 마법사로서의 능력도, 내 부모님도, 내 집도, 내 빛날 것이 뻔한 미래도, 그 모든 것을 희생하여 사람들을 구했다. 모든 것을 바친 영웅. 얼마나 비극적인가.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당신이 그 결과를 좋아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꽃이, 과일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물론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마법을 못 쓰는 것일 뿐이니 머리를 쓰는 다른 일거리를 어떻게든 찾아보면 된다. 예를 들면 북부군 행정부서 같은 데 들어가서 일한다거나. 아이들을 가르친다거나. 몸을 덜 쓰는 일거리야 찾아보려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웅대접 해 주고 있는 동안에는, 내가 무리하지 않은 요구를 한다면 받아들여 줄 가능성도 클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내 몸 주변의 마나를 끌어모으는, 내 몸 안에서 회로가 뿌듯하게 꽉꽉 차서 돌아가는 그 감각. 내 비루한 팔다리를 움직이지 않아도, 내 몸 주변의 모든 것을, 내 세상을 만지고, 움직이고, 변화시킬 수 있던, 나보다 큰 내가 된 듯한 그 감각. 그 어떤 여자친구와의 섹스보다 황홀한 감각. 내가 마법사가 된 이후 가장 멋진 기억. 그 기억, 그 감각에서 나는 강제로 떨어져 나가게 되었는데.

가끔 길거리를 지나다니다 보면 팔이나 다리가 하나 없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북부에서는 흔한 일이다. 북부 산맥의 마수들은 음한한 마나를 뿜는다. 자칫 잘못하면 순식간에 팔다리가 얼어 터져버린다. 북부군에서 마수들과 싸우다가, 한 순간의 타격으로 팔다리를 잃고, 얼마 안 되는 보상금 받고 군대에서 쫓겨난 사람들. 어떻게든 입에 풀칠은 하지만, 한결같이 눈에 생기가 없는, 웬지 취해 있는 그런 사람들.

마법을 잃은 나는 그 사람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잘린 게 보이는 팔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팔다리일 뿐.

영웅? 명성? 칭송? 개나 주라지.

---

‘띠링!’

<상태 이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한 중증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모든 의욕이 사라집니다.>

---

나는 말할 의욕도, 생각할 의욕도 잃었다.

몸은 더 이상 아프지는 않다. 거동하는 데는 문제도 없다.

하지만 여기를 나가서, 다음에는 어디로 갈까? 무엇을 할까? 할 수 있는 일도, 당장 해야만 하는 일도 아무 것도 없는데.

나를 위로한답시고 들여놓은 꽃이며 과일의 향기도 지금은 끔찍하기만 하다.

나를 위로한답시고 찾아온, 조만간 대수림 너머의 장벽에 있는 병영으로 떠나야 할 동기생들의 인사도 귀찮기만 하다.

하다못해, 눈물로 젖은 헤나의 입맞춤도,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모든 게 귀찮다.

배도 고프지 않아 나는 식사에는 손도 대지 않고 멍하니,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그런 나를 걱정하는 것일까.

요안나 선생님은, 매일 아침 일찍 내 병실에 들른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마치 밀랍인형이라도 된 듯, 같은 자세로 창밖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선생님도 그런 나에게 아무런 말을 걸지 않고,

한 시간 남짓 가만히 앉아 있다가 갈 뿐이다.

저열한 복수심일까. 내가 아팠으니, 당신도 아파보라는.

그건 아닌 것 같다.

매일매일 조금씩 선생님의 얼굴이 퀭하게 바뀌어가지만,

그걸 보면서 내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하거나 그러지는 않으니까.

그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일어설 기운도 없어 그대로 누운 채, 나는 해가 지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었다. 뭔가 하려면, 이제 이 방 안에 불을 켜야 한다. 하지만 불을 켜는 것 자체가 예전의 나를, 라이트 마법을 마음대로 쓰던 나를 떠올리게 한다. 그것 자체가 미칠 것 같아,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누워 있는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익숙한 발자국 소리.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석양의 끝자락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기리인.”

선생님이 나를 부른다.

“나를 봐.”

아무런 힘도 없다. 고개를 돌릴 의욕조차도 없다.

“나를 봐!”

쾅쾅쾅, 거칠게 다가온 발소리의 주인이 팔을 뻗어와 내 턱을 거칠게 붙잡고 돌린다. 약간 놀라 선생님을 바라보니, 선생님은 생전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화를 내고 있었다.

“여기서 이렇게 매일매일 조금씩 죽어갈 거야?”

“...”

“그 눈! 그렇게 죽은 눈 하고 보지 말란 말야! 일어나! 나를 봐!”

어디에서 힘이 난 것일까. 나는 선생님의 손을 거칠게 쳐낸다.

“그만두세요.”

“뭐?”

“동정은 그만 두시라고요.”

명백히 상처받은 선생님의 얼굴. 그제야 나는 자그마한 복수의 저열한 쾌감을 맛본다. 하지만, 조금도 기분 좋지 않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앉으며,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한다.

“북부의 영웅? 자기 희생? 웃기지 마세요. 나에게는 남은 게 아무 것도 없어요. 값싼 칭송이 가라앉으면, 길거리에 주저앉아 값싼 술로 몸이고 마음이고 다 젖어버린 상이 군인이나 마찬가지 꼬라지가 되겠죠. 그런 내가 불쌍해요? 불쌍하냐구요. 어제까지 멀쩡히 달려 있던 팔다리가 한순간에 없어진 느낌, 알기나 하세요?”

해가 산 위로 거의 넘어가 빛이 거의 없어진 어두컴컴한 의무실 안. 그 안에서도 선생님의 얼굴이 빠르게 핏기를 잃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제 와서, 내가 불쌍해 보이나요? 그 때처럼, 나를 찌질하다고, 왜 내가 특별하냐고 얘기해보시지 그러세요. 아무런 관심도 없던 사람이 모든 걸 잃고 나니 그제야 불쌍하고 돌봐주고 싶은 마음이 드시나요? 그럼 말 말고 차라리 적선을 해 주시지 그러세요.”

짝!

이죽거리던 내 뺨에 화끈한 느낌이 들며 내 고개가 오른쪽으로 홱 꺾였다. 기어코 참지 못한 선생님이 내 뺨을 멋지게 후려갈긴 거였다. 아프지만, 오히려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선생님은,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화를 내는 것도, 나를 더욱 불쌍하게 여기는 것도 아니었다. 아, 저 표정은... 그래. 차갑게 분노하는 모습이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욱 분노하는 그런 모습이다.

“그렇게 남을 상처입히면서 자기까지 상처입히면, 속이 시원하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를 보고 선생님은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자그마한 빛덩어리를 손끝에서 만들어내어 천장에 붙였다.

“이대로 이렇게 말라죽어가는 너를 그냥 보고만 있으라는 거니?”

“이제 와서 뭘 어쩌실 건데요.”

“한 번 뭐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어?”

“할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하고 싶기는 하죠. 하지만 저에게 남은 게 아무 것도 없잖아요.”

피식. 요안나 선생님이 웃는다.

“기리인. 졸업식 전날 면담했던 거 기억나니?”

“네.”

“그때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

“장학금 준 거랑, 제도에서 보자는 거 말고요?”

“그래.”

“어... 선생님이 안식년을 맞게 되었다고 말씀하셨고, 제도로 갈 거라고 하셨죠. 제가 그래서 같이 가실래요 하고 여쭤봤더니... 선생님이 ‘너는 너 자신의 위치를 좀 더 자각할 필요가 있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 그 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그래. 너는 너 자신의 위치를 좀 더 자각할 필요가 있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선생님은 품 속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어 나에게 건네주셨다. 여느때보다 더 농밀해진 선생님의 향기가 확 내 코를 찔러왔지만, 나는 그 향기에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편지 상단에 제도 그랜드 아카데미의 문양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친애하는 요안나 이스카 님.

그랜드 아카데미 입학예정자 기리인 모스 군에게 닥친 개인적 불행에 대한 보고를 잘 받았습니다. 그의 졸업시험에 참관한 바 있는, 본 아카데미의 입학처장 라고로스 교수님의 실망과 비통함의 크기로 볼 때, 그의 불행은 우리 그랜드 아카데미의, 나아가 우리 마법 학계와 제국 전체의 불행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불행에 대해 심심한 애도를 표합니다.

안타깝지만, 기리인 모스 군이 본 아카데미에 학생으로서 입학하는 것은 무리라고 여겨집니다. 다른 아카데미와는 달리 이 그랜드 아카데미는 마법 전문 아카데미입니다. 그가 교보재가 아닌 마법사가 되고자 하는 이상, 마법 사용이 불가능하다면 그랜드 아카데미의 입학은 본인 스스로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 아카데미는 요안나 님이 첨부한 기리인 군의 증상에 대한 보고서를 검토하여, 그의 증세가 일반적인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증상이라는 요안나 님의 결론에 동의하였습니다. 이에 본 아카데미는 제도 도서관 및 제도의 트리클 신전과 협의하여, <기리인 군의 증상에 대해 조사해 보고 가능한 치유방법이 있는지>를 안식년 연구 주제로 삼기로 한 당신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지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아무쪼록 기리인 군이 개인적 불행으로 인한 심신의 고통을 떨쳐내고 일어서기를 기원하며, 이만 마칩니다.

그랜드 아카데미 교장 데비로스>

내가 놀라서 고개를 들자, 선생님은 눈에서 불꽃이 튀어나올 것처럼 이글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너를 그렇게, 말라죽게 내버려 둘 것 같아?”

============================ 작품 후기 ============================

코멘트 좀 주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