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1 2. 말할 수 있는 것, 말할 수 없는 것 =========================
그때 나는 라루트님의 주선으로, 광장 근처에 위치한 여관방을 빌려서 거기에 묵고 있었다. 그런데 자꾸만 그 방에서 사고가 생기는 것이었다. 사고라고 해 봐야 걸린 액자나 옷걸이가 떨어진다거나, 초가 엎어진다거나 하는 자잘한 사고였지만, 내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그런 일들이 생기니 참 당혹스러웠다. 그 때는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식비를 아끼기 위해 – 5드로그면 4인가족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한 달 정도는 지낼 수 있는 금액이긴 하다. 하지만 나는 제도에 가서 집을 구하거나 하는데 돈을 써야 할 수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돈을 아껴야 했다 – 새벽에 일어나 전날 사둔 빵을 자그마한 나이프로 자르고 있었다. 빵은 딱딱하고 칼은 무뎌서 영 안짤려서 나는 짜증을 내며, 아 이 칼에 뭐가 좀 덧씌워지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했다. 그랬던 것 같다. 그 순간.
그 자그마한 나이프, 빵 자르는 거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을 그 나이프가 빵과 접시를 관통해 테이블까지 틀어박힌 것이다. 그것도, 마치 더운 여름날 버터를 가르듯 아무런 저항 없이 스르륵 밀려들어가는 것처럼.
뭐야, 이거. 아무리 힘이 세도, 테이블이나 접시를 망가트리면 망가트렸지 이렇게 깔끔하게 구멍뚫듯이 들어가지는 못할 텐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봐, ‘시스템’. 어떻게 된 일이야?
바로 ‘창’이 떠오를 줄 알았는데, 내가 불안할 정도로 창은 한참동안 떠오르지 않았다. 뭐야, 왜 그래, 라고 생각하며 초조하게 기다리기를 한참, ‘창’이 하나 떠올라 왔지만, 그 내용이라는 게 영 실망스러웠다.
<본 시스템의 상정 외 상황입니다.>
쉽게 말해 너도 모른다고?
<인정합니다. 어떻게 방금과 같은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만약 알고 있었다면 당신의 스킬에 저 ‘버터 자르듯 하는’ 스킬이 포함되었을 겁니다.>
기술 이름은 좀 근사한 걸로 붙이자, 라고 뻘생각을 하며 나는, 빵 자르는 칼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미 바크 선생님과 약속한 새벽 달리기 시간이 아슬아슬했지만, 나도 한 때는 마법사 나부랭이였다. 호기심을 참을 수 없는 것이 마법사의 주요 덕목이지 않는가. 나는 빵 칼을 잡고, 아까 어떻게 이 상황이 생겼는지 생각해 보았다.
아까, 이걸로 빵이 안 잘려서 내가 짜증을 냈었지. 그래서, 이 무딘 칼날 말고, 이 위에 뭔가 덧씌워서...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내가 잡고 있던 빵 칼은 아까처럼 스무스하게 물건들을 베어나가기 시작해 접시와 여관방 안에 있던 테이블 윗판을 일도양단 해버렸다. 너무 깔끔하고 날카롭게 베인 테이블은 아직 넘어지지도 않은 채 서로에게 기대어 똑바로 서 있는 중이었다. 뭐야, 이게... 이봐, ‘시스템’. 내 생각이 맞을까?
<그런 것 같습니다. 오늘 이런저런 시험을 해 보면 확실해 지겠죠. 그런데, 늦지 않았습니까?>
으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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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 날 오전은 건수잡은 바크 선생님에게 ‘왜 별명이 토나오는 디혼인지’ 뼈저리게 알게 되는 체력단련을 받느라 아무런 생각을 못 하고 말았다. 그 날 오후에, 바크 선생님의 감독 하에 백 보 사격과 이동 속사 연습을 마치고 나 스스로 개인연습을 하던 지금 같은 시간에, 자그마한 단검과 화살촉, 그리고 보통의 물건들로 시험을 해 보면서 몇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1. 나는 한정적인 조건 하에서 마나를 직접 만질 수 있다. 연습하면 익숙해지긴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다른 모든 것을 머리에서 지워야만 가능하다.
2. 그에 비해 물체에 마나를 주입하는 것은 쉽다. 마법을 쓸 때 내 몸으로 마나를 끌어들이는 감각과 반대로, 내 몸에서 밀어내는 식으로 생각하면 물체에 마나가 ‘덧씌워진다’.
3. 칼에 이것을 응용하면 마치 전설의 명검처럼 무엇이든 자를 수 있다.
4. 화살에 이것을 응용하면, 마치 화살을 보이지 않는 손이 붙잡아주는 듯 더 정확하게 맞힐 수 있고, 주입한 마나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속도가 빨라진다.
3번 항목이 아주 심각하게 끌렸다. 내가 검사로 전향한다면, 마나를 덧씌운 검을 휘두른다면, 상대의 검이나 무기를 다 잘라버릴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마나를 덧씌우기 위해서는 내가 적어도 몇 초간 집중을 하는 순간이 필요한데, 칼끼리 부딪히는 싸움터에서 그게 가능할 리는 없을 것 같아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때쯤 시스템도 나에게 대답을 해 왔다.
<마나를 만지거나, 밀어낼 수 있게 되었군요.>
그래. 좀 더 연습을 거치면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도와드리겠습니다.>
뭐? 어떻게?
‘띠링!’
<개인 정보가 업데이트되었습니다. ‘정보 확인’을 통해 확인해주세요.>
‘정보 확인.’
<이름 : 기리인 모스
나이 : 18세
HP : 989/1100
힘 : 80
민첩 : 100
지능 : 100
마나친화력 : 0
매력 : 100
지구력 : 80
특수 : 의지력 101 / 언변 91 / 냉철 94 *보너스스탯 1
스킬 : 정보확인 Lv. 1, 마나 배치 Lv. 1>
<당신의 그 행동을 스킬로 구현했습니다.>
음? 그럼 뭐가 좋고 뭐가 안 좋나... 가만 있자. 정보 확인은 상대와의 관계나 포지션에 따라 실패할 확률도 있다.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스킬에는 성공과 실패의 확률이 있다는 말인데...
<정확합니다. 역시 똑똑하군요.>
무시 무시. 어쨌든, 내가 그 실패의 확률을 담보하고 그 행동을 ‘스킬’로 만들어 쓴다면, 어떤 장점이 있지?
<당신은 ‘정보 확인’을 할 때 필사의 각오로 집중을 하며 쓰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럼, 스킬 형태로 그걸 쓴다면... 그래, 다른 고민을 하지 않더라도 훨씬 편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겠군?
<정확합니다. 만약 마나 배치의 레벨이 올라간다면 성공 확률이나 범위가 훨씬 더 넓어지겠죠. 효력도 강해질 겁니다.. 그때쯤 되면 검사로 전향해도 큰 성취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난 상대의 칼날과 가까운 위치에서 곡예를 부리고 싶지 않다구. 암튼, 그러면 이 스킬의 레벨을 어떻게 올릴 수 있을까?
<자주 마나 배치를 연습해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반복된 행동이 실제로 본 시스템을 자극해 스킬의 등록을 이끌어낸 것처럼, 반복된 행동을 통해 그 행동이 몸에 익숙해질수록 스킬의 성공 확률이나 적용 범위가 커질 겁니다.>
음. 그건 합리적인 말인 것 같다.
<본 시스템은 언제나 합리적입니다.>
어이쿠, 삐질라.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거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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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나 혼자 활을 쏘아보는 이 시간에 나는 반복해서 마나를 씌운 화살을 쏘는 연습을 했다. 칼로 뭔가를 베는 연습을 하기가 참 힘들었기에, 자연스럽게 마나를 불어넣은 화살, 줄여서 ‘마불살’ - 그래, 나 이름 못 붙인다. 나도 안다. - 만 더 익숙하게 쏠 수 있게 되었다. 그걸 단련한 게 지금이다. 대략 20미터 정도까지 화살에서 마나를 뻗치게 할 수 있다. 그 상태에서 화살을 쏘아본 적이 있는데, 보통의 장궁으로 비스듬히 앞쪽으로 멀리 쏘면 대략 300미터 정도 가는데, 내 마불살은 그 다섯 배 정도 날아갔다.
당연히, 이걸 곡선을 그리는 게 아니고 직선을 그리게끔 앞으로 쏘면, 무지막지한 힘을 가진다. 내가 아까 지푸라기 과녁을 한 단 더 가져온 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두꺼운 과녁이 화살의 힘을 못 이겨 찢어져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총 스무 발의 화살을, 200미터 정도 되는 거리에서 앞으로 쏘았다. 처음 열 발은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내가 직접 마나를 주입해서 마불살을 날렸고, 나머지 열 발은 스킬을 사용해서 쏘았다. 스킬을 쓸 때는 세 발이 실패해서 일반 화살처럼 중간에 떨어져 버렸고, 스킬을 사용하지 않으니 과녁에 명중하지 못한 화살이 한 발 나왔다.
‘띠링!’
<이 정도면 훌륭합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스킬 성공률이 70%, 공을 들였을 때 90%라는 건 꽤 높은 거지.
<지금 출발해야 할 겁니다. 그래야 제 시간에 돌아와 야간사격 훈련과 야간 체력단련을 할 수 있습니다.>
뭐? 벌써 그렇게 되었나. 나는 황급히 과녁으로 뛰어갔다. 두 과녁을 관통해 깊숙하게 꽂힌 화살 열여섯 발을 뽑아, 전통에 넣고, 시위를 내려서 활을 보관해놓고, 원래대로 과녁을 정리해 놓은 다음, 활과 화살을 가지고 뛰어가 디혼 선생님에게 드리고. 나는 황급히 기사 아카데미를 나서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민첩 수치가 100이 된 후 나는 달리는 것이 즐거워졌다. 지금은 모두가 놀랄까봐 숨기고 있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달리거나 움직일 수 있다. 지구력도 80이 되어서인지 오래 달려도 지치지 않는다. 예전의 내 몸 같았으면 중간에 한두번 멈춰서 마법을 사용해 가며 뛰었을 텐데, 지금은 이 정도로는 끄떡없다.
나는 너무 빨리 달리지 않게끔 조심하며, 빠르게 달려 아카데미와 북부군 공용 작업장 – 이 곳을 지날때마다 부모님이 여기서 일하셨던 생각이 나 가슴이 먹먹해진다. -을 지나서 중앙 광장에 접어들었다. 후우, 후우.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자. 만났을 때 숨을 헐떡거리면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나는 조금씩 석양이 드리워지는 시간, 광장에서 이리저리 다니던 사람들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하는 시간에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가, 내성 문에 이르렀다. 내성 경비대 아저씨들은 이제 내 얼굴을 익히 알아서, “오늘이 약속 날이니?”같은 말을 하며 내성의 문 중 쪽문을 열어주셨다. 나는 아저씨들에게 인사하고 내성으로 들어가, 중앙의 영주 성이 아닌, 오른쪽 코너에 위치한 백작가로 향했다.
“왔군. 늦지 않았으니 걱정은 하지 말게.”
자크 할아버지가 문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리미는요?”
“안에 있지. 들어가보게. 오늘은 아무 것도 안 들고 왔나?”
“그러게요. 훈련장에서 바로 오느라.”
자크 할아버지는 그냥 안쪽을 향해 손짓했다. 나는 그 손짓대로 요뢰브 백작님의 크지 않은 집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몇 번이나 와 봤지만 여전히 이 문을 들어설 때면 좀 조심스럽다. 요뢰브 백작님은 내가 사소한 에티켓 실수를 하더라도 불쾌해하거나 그걸 빌미로 나에게 해꼬지를 하실 분은 아니지만, 뭐랄까, 귀족의 세계는, 적응하기 어렵고, 내 생각보다 훨씬 호화스러워 보인다. 저 스테인드 글라스, 저 샹들리에, 저 벽에 건 태피스트리 등이, 내 눈에는 휘황찬란한 저것들이, 요뢰브 백작님의 취향을 따라 겉멋 들이지 않고 소박하게 한 거라니, 역시 나와는 사는 세계가 다른 것 같다.
그리고, 그 샹들리에 아래, 번잡스럽지 않은 살구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약간은 어두운 색의 금발머리 소녀가 서 있다.
“어서 와, 기리인.”
“안녕, 리미. 미안. 훈련장에서 바로 오느라 빈 손이네.”
리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와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뭘.”
리미는 내 팔목을 가볍게 잡고, 나를 거실 안쪽의 식당으로 안내했다.
============================ 작품 후기 ============================
리미가 재등장했습니다.
제목이 이걸로 괜찮을까요? 뭔가 더 흥미를 끌만한 제목은 없을까요?
내용이랑 걸맞지 않는 뭐 '빙의' 이런 걸로 해야 하나?;;; 별 생각이 다 드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추코쿠를 보내주신다면 더 감사하며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