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2 2. 말할 수 있는 것, 말할 수 없는 것 =========================
식당 역시, 백작가 기준으로 ‘소박’하고 ‘단촐’했다. 물론 나로서는 오늘이 세 번째인데도 황송스럽기 그지없는 광경이다. 이 새하얀 식탁보 좀 보라지. 아무리 매일 이 식탁보를 빨아도 이렇게 깨끗하게는 되지 않을 텐데. 벽에 걸린 그림이나 여기도 걸려있는 샹들리에, 높은 천장은 고사하고, 의자마저도 장인의 손길로 새겨진 세공이 가해진, 정말 만지기조차 좀 주저되는 그런 것들이다. 방은 이미 훈훈하게 데워져 있었다. 벽난로 안에서 잘 마른 장작들이 타면서 나는 딱 딱 소리가 났다.
긴 테이블의 한 가운데에 포크와 나이프들이 두 자리 세팅되어 있었다. 두 자리?
“오늘은 백작님은 안 오셔?”
“응. 오늘 아빠는 병영에 가셨어. 거기서 주무셔야 할 것 같대.”
그렇구나. 리미랑 단 둘이라니. 뭐... 자크 할아버지도 계시고, 요리사나 사용인들도 있고... 그리고 얘도 전같진 않으니까 괜찮겠지 뭐.
나는 리미에게 가볍게 팔목을 붙들린 채로 자리로 걸어가, 레이디와 함께 하는 사람 답게, 식탁 의자를 빼 주었다. 리미가 자연스럽게 내가 밀어넣어주는 의자에 앉은 뒤, 나도 내 자리로 가 자리에 앉았다. 우리가 앉기를 기다렸는지 이 저택에서 근무하는 사용인들이 접시들을 날라오기 시작했다.
“오늘의 요리는 뭐지?”
리미가 자연스럽게 묻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와서 우리 근처에 서 있던 자크 할아버지가 말했다.
“향신료로 맛을 낸 송어 구이입니다.”
아. 송어라면 뼈를 발라내거나 생선을 뒤집지 않으면서 먹는 온갖 에티켓 같은 걸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다행이다. 리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앞에 놓여진 노란색 수프에 숟가락을 담갔다. 자크 할아버지는 별 말 없이 뒤로 물러나, 두어 걸음 뒤에 시립했다. 할아버지와 나의 눈이 마주쳤고, 할아버지의 눈에 가벼운 미소가 어렸다. 나는 이 저택에서 처음 식사를 하게 된 2주 전에 자크 할아버지가 해 줬던 말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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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백작님과 리미와 함께 식사나 하자는 제안을 들은 내 반응은 저랬다.
“흐음... 기뻐하는 반응 같진 않군?”
“아...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그래? 그런 것 치고는 당장 뭘 먹으면 체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내가 뜨끔한 표정을 짓자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백작님은 대공님 못지않은 무골이시라 본인 스스로도 예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고 신경쓰지 않으시는 분이시니까. 자네가 식사 자리에서 말로 무례를 범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걸세. 그리고 자네는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리미...는요?”
“리미 아가씨에 관해서라면, 자네가 설사 수프 접시를 들고 혀로 핥아먹어도 아무런 말 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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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접시를 핥지는 않았지만(핥고 싶을 정도로 맛있긴 했다), 내가 갓 구워져 나온 빵을 손으로 잡는다거나 빵의 껍질을 이용해 수프 접시를 닦았을 때도 리미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빵 껍질은 일부러 해 본 건데 말이다.
수프와, 베이컨과 초록색 말캉말캉한 계란맛 나는 채소(나중에 할아버지에게 물어보니 아보카도라는 채소란다)로 만들어진 애피타이저를 먹는 동안, 리미는 별 말이 없었다. 처음 백작가에서 저녁 식사를 할 때는 리미가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었나 하며 좌불안석이었는데, 나중에 차를 마시며 알게 된 사정은 정말 별 것 아니었다.
요즘 리미는 사교계 에티켓을 익히는 중이었는데, 레이디는 식사 자리에서 음식물을 흘리거나 이빨을 보이는 게 아니라던가. 물론 주어진 화제에 대해 예의바르게 참여는 하지만, 스스로 화제를 꺼내거나 하는 건 별로 안 좋게 본다던가 뭐라던가. 아아, 나로서는 소화불량 걸릴 것 같은 세계다. 어쨌건, 내가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면 리미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면 좋지. 물론 아카데미 4년을 같이 보냈지만, 그리고 리미가 계속 나한테 들이댄 것도 맞지만, 나는 리미를 회피하기에만 애썼지, 리미하고 뭘 같이 해 본 적이 거의 없으니... 그렇다고 날씨 얘기를 꺼내면 뻔히 ‘나 화제 없음’이라는 뜻이니 그것도 안 되겠고. 그때, 리미가 푸흡, 하고, 입을 가리고 웃었다.
“기리인, 화제 찾으려고 너무 애쓰는 거 아냐?”
“아... 보였어?”
나는 머리를 긁적였고 리미는 입가를 가린 손을 내렸다.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예전처럼, 아카데미에서 ‘여왕’으로 군림할 때처럼 오만한 미소가 아닌, 그냥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편한 장소에서는 너도 그런 미소를 지을 수 있구나.
“그러고 보니... 너하고 이렇게 길게 얘기해 보는 게 처음이네.”
그렇게 말하며 리미는 왼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아련한 표정으로 잠시 먼 곳을 쳐다보았다.
“아니, 내 또래 애들이랑 이렇게 길게 얘기해 본 게 처음인 거 같아.”
“학교 다닐 때 다른 애들이랑 얘기 많이 하더니...”
내 어벙한 말에 리미는 피식 웃었다.
“걔네들은 나를 무서워했잖아. 솔직히 나, 걔네들하고 어울려 다니면서도 걔네들하고 제대로 얘기해 본 적이 없어. 내가 뭐라고 하면 다들 네, 네 하며 떠받들기 바빴지.”
내가 약간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리미는 피식, 약간은 씁쓸하게, 웃었다.
“너도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었구나?”
“...부인하면 너에게 모욕이 되겠지. 응, 맞아. 네가 그런 상황들을 잘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리미는 다시, 약간은 씁쓸하게 웃었다.
“사람들이 웃긴다? 자기들 멋대로 기대하고, 기대에 벗어나면 실망해. 욕하고. 유년학교 때부터 그랬어.”
리미는 가볍게, 옆에 잔에 담긴 크랜베리 주스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나 외동딸이잖아. 엄마도 일찍 돌아가시고, 아빠는 맨날 바쁘시고. 맨날 혼자 놀다가, 유년학교에 가니까, 진짜 친구들이 많은 거야. 첨에는 다들 친하게 놀았어. 걔네들 집에도 가고. 근데, 2학년, 3학년이 되니까 애들이 점점 나를 따돌리기 시작하는 거야. 나를 보면서 수군수군대고.”
“나도 그 심정 이해해. 대놓고 나를 보면서 자기들끼리 속닥이는거 진짜 짜증나지.”
처음으로, 나는 리미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
“그치? 진짜 짜증나지? 애들한테 더 잘 해주려고 해 보기도 하고, 왜 그러냐고 물어봐도 별로 소용이 없는거야. 점점 겉돌고. 짜증나고 막 학교 가기 싫고, 아빠한테 짜증내고 싶은데 아빠는 없고. 자크한테 떼쓰고 그랬지. 아마 자크 흰 머리 중에 절반은 나 때문에 생겼을 거야.”
“절반은 넘을 겁니다, 아가씨.”
새삼 저 둘이 단순한 주종관계가 아니라 진짜 할아버지와 손녀 같다는 생각을 했다. 리미는 입을 삐쭉대더니, 말을 이었다.
“어쨌든, 어느 날 가기 싫어서 쭈뼛대면서 가고 있는데, 갑자기 확 짜증이 나는 거야. 기왕 나를 따돌리고 겉돌게 할 거라면, 내가 귀족가 딸이라서 그랬다면, 한 번 애들한테 내 마음대로 해 보기나 하자, 싶었어. 아마 그게 내가 유년학교 4학년때인가 그랬을거야. 진짜 웃긴게 뭔지 알아? 내가 막 못되게 오만하게 구니까, 애들이 알아서 슬슬 기는거야.”
리미는 그 때를 생각하듯, 포크로 접시에서 샐러리 한 조각을 찍어서 입으로 가져가더니 거칠게 씹었다. 꿀꺽 삼키고는, 아까보다는 누그러진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이게, 사람을 잡아먹더라. 처음에는 애들을 좀 곯려줘야지, 분풀이해야지 하는 생각에서 출발했는데, 그러다보니 내가 점점 그 역할에 물들어가는 거야. 나중에는 애들을 턱짓으로 부리는데 익숙해질 정도로 말이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제도에 보내지 않겠다는 아빠 말 때문에 아카데미에 들어갔고, 거기서도 똑같이 행동했던 거고.”
“아...”
내 표정을 본 리미는 다시 풋, 하고 웃었다. 졸업식 전날에도 잠깐 생각했었지만, 여왕님처럼 도도하게 굴지 않고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웃는 리미는 여왕님 모드일 때보다 훨씬 귀엽고 매력적이었다.
“아가씨, 메인 요리를 들일까요?”
“응, 그래줘, 자크.”
그 뒤로 리미와의 식사는 한층 무난하게 흘러갔다. 나는 리미에 대한 적대감이 한결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아 물론, 리미가 내 여자친구들에게 했던 행동을 잊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리미와 이렇게 맛있는 것을 먹으며 이야기하는 것을 불쾌해하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우리는 꽤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차를 마시면서도.
“뭐야, 그럼 그때 내가 화염구 실패해서 옷 태워먹었을 때 다 보고 있었던 거야?”
“나만 봤나? 우리 반 애들이 다 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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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지체하다가는 야간 훈련에 늦을 것 같아서 이만 작별하기로 했다. 저택의 현관을 향해 나서는데 리미가 아까처럼 내 손목의 옷깃을 잡으며 말했다.
“기리인, 저... 다음 주에도 와 줄수 있지?”
나는 아무 뜻 없이 순수하게 리미에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럼. 다음 주에 봐.”
그러자, 리미가 환하게 웃으며, 내 손목을 놔주고는 손을 흔들었다. 나는 손을 마주 흔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저택 밖에는 자크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해가 진 후라 내성의 문 밖으로 나를 내보내주기 위해서였다.
“역시 능숙하군.”
“네?”
“여자를 대하는게 능숙하단 말이야. 나는 그 나이에 손목도 한 번 못 잡아본 쑥맥이라 여자 앞에 서면 말도 잘 안 나오고 그랬는데. 대단해, 기리인군.”
나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서 머리만 긁었다.
“아가씨가 예전처럼 웃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야.”
“이런 말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리미와 자크님의 관계는 단순한 상전과 사용인의 관계같지는 않습니다.”
“주인마님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유모가 없다 보니 리미 아가씨를 어릴 적부터 돌봐야 했지. 그러다보니 반쯤은 손녀 같다네.”
허허 웃은 자크 할아버지는, 성문의 경비병들에게 인사하고, 쪽문을 열어달라 부탁한 후, 나에게 말했다.
“고맙네, 기리인군.”
나는 할아버지의 등 뒤에 고개를 숙여보인 후, 내성 밖으로 나가 아카데미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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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훈련은 별 것 없다. 불을 밝힌 기사 아카데미 연병장에서 달리고, 백 보 사격장에서 과녁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게 다다. 어두운 곳에서 멀리 있는 과녁을 보는 연습을 하는 건데... 이번에는 퀘스트를 깨야 해서, 나는 약간, 꼼수를 썼다.
쐐액-! 텅!
스무 발 째를 다 쏘고, 활을 내리고 숨을 고른 후, 나는 디혼 선생님과 함께 과녁을 향해 걸어갔다.
============================ 작품 후기 ============================
이문세 님과 크리스펠로 님의 코멘트 감사합니다. 동시에 제가 충분히 설정에 대해 설명드리지 못한 면이 있는 것 같아서 이 자리에서 잠시나마 말하려고 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게임의 캐릭터입니다. 캐릭터 '기리인 모스'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가 있는 거죠. 이 사람이 선택을 내리는대로 기리인은 움직입니다. 또, 기리인 모스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 그의 주변 인물들과 관계된 일을 플레이어는 'RPG의 이벤트'로 받아들이게 되는거죠.
처음 이 설정을 생각한 건 단순한 계기였습니다. 게임의 세상에 플레이어가 캐릭터로 빙의된 경우는 많이 봤지만, 게임의 캐릭터의 시점에서 게임 속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어떨까? 스탯이나 퀘스트창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퀘스트를 깨기 위해 플레이어가 선택한 것을 캐릭터는 어떻게 자기의 선택으로 녹여낼까? 이런 의문들이었죠.
이문세 님에게 리리플했듯, 이 질문은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또는 우리의 행동은 미리 결정된 것이고 자유의지란 환상인 건가?'라는 철학적 질문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 질문을 다룰 만한 깜냥은 결코 아니죠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고 가시면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