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24화 (24/309)

00024 2. 말할 수 있는 것, 말할 수 없는 것 =========================

보름달이 훤히 떠오른 밤, 골목길을 걸어 나는 여관으로 향했다. 등에 멘 활과 허리에 맨 화살이 상당히 무겁게 느껴졌다. 실제로도 무거웠지만, 아까 바크 선생님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서 더 무거운 것 같았다. 선생님은 아까 왜 그랬을까. 마치... 그래. ‘너무나 큰 죄를 지어 면목이 없는 사람’ 같은... 아, 설마 그런 건가. 원래 대장장이 가문이었는데 부모랑 싸우고 때려치고 나오면서 들고 나왔다거나...

‘띠링!’

<당신에게 소설가의 재능까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 자식, 명백히 비꼬는 거지? 뻔한 스토리 쓰지 말라고 그러는 거잖아.

<역시 똑똑하시군요.>

아. 대꾸를 하지 말자. 내가 말빨에서 밀리는 상대가 있을 줄이야. 이야기하면 이야기할수록 말려들어가는 것 같다. 나는 걸음을 재촉해 여관에 이르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1층 식당 겸 주점의 분위기도 파장에 가까웠다. 카운터를 보던 이쿠르 아줌마가, 한 무리의 취객들로부터 술값을 받고 있었다. 나는 그 분들이 지나갈 수 있게 잠시 비켜드린 다음, 아줌마에게 인사했다.

“이제 오니, 기리인? 씻어야지? 저녁은?”

“먹었어요. 저, 아줌마. 이거 말인데요.”

나는 등에 맨 케이스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무기인데, 위험하니까 건드리지 못하게 해 달라고.

“그래? 그럼 내일 성에 들어갈 때 맡기렴.”

“네? 성이요?”

“아차. 내가 말을 안 했었나? 라루트 님이 오늘 전갈을 보내오셨어. 내일 오전 10시에 성으로 오라고 하시던데.”

“라루트 님께서요? 무슨 일이라고는...”

“몰라. 인편에 전갈만 보내오신 거라. 그 때 저걸 들고 가서 맡기면 되지 않겠니.”

“하긴, 성 내가 더 안전하겠군요. 감사합니다. 이쿠르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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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활과 화살을 메고 라루트 님을 찾아갔을 때, 라루트 님은 언제나처럼 책상에 앉아 정신없이 일하고 계셨다. 고개를 들어 나를 본 라루트 님은 “아, 왔는가? 잠시만 앉아 기다리게.”라고 짧게 말하고는 다시 뭔가 서류를 맹렬하게 넘기며 읽기 시작했다. 넘기다가, 펜으로 여백에 내용을 끄적거리다가, 다시 넘기다가,를 한참 반복하던 라루트 님은 서류의 맨 마지막에 뭐라뭐라 한참 적더니, 옆의 지저분한 천을 들어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를 빨아낸 후 서류를 덮고는 한 쪽의 서류 다발 위에 던져놓았다. 그리고는 나를 보았다.

“그건 뭔가?”

“아, 활과 화살입니다. 귀중품인데, 여관방에는 둘 수 없어서...”

“잘 됐군. 그거 들고 따라오게.”

라루트 님은 잽싼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바깥으로 나가셨다. 나는 황급히 라루트 님의 뒤를 따랐다.

“활 연습은 잘 되고 있는가?”

“네, 나름 잘 되고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수치로 말해주면 좋겠는데. 그게 필요한 상황이라서 말이야.”

“백 보 거리에서 스무 발 쏘면 스무 발 다 맞힐 수 있습니다.”

라루트 님은 놀란 눈을 하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기리인 군, 그건 ‘나름 잘’이라고 하면 너무 과한 겸손인 것 같은데? 그 정도로 잘 쏜다니 마침 잘 됐군. 가면서 간단히 설명하지. 전에 자네 제도로 가기 위해 어떻게 할 거라는 얘기 들었던가?”

“상단 어쩌고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 대공 전하에게 소속된 상단이 있는 건 알고 있지?”

물론이다. 척박한 북부에서 목재, 약초, 몇 안되는 농작물 등을 모아서 제도나 혹은 니아트 강을 따라 배치된 이틱, 레카 같은 대규모 교역도시에 내다 팔고, 다시 이 대요새 안에 사는 사람들과 저 바깥의 농민들이 필요한 물품을 사 오는 상단이지. 대공 전하가 운영하는 상단이 아니라 일반 귀족이나 상인들이 운영하는 상단이었다면 아마 북부의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가난하고 못 살았을 거다.

“상단 일행에 가끔씩, 돈을 내거나 혹은 호위 일 등을 하면서 함께 이동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있네. 혼자서 가도 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갈 때 같이 가면 경비도 줄일 수 있고 보내는 우리 입장에서도 안심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자네가 그렇게 활을 잘 쏜다니 상단주와 이야기가 빠르겠어. 다행히 시간을 절약하게 됐군.”

라루트 님은 언제나 일에 쫓기는 사람 답게 ‘시간 절약’이 말버릇이다. 지금도 시간을 절약 운운한 라루트 님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기사 아카데미 옆, 외성의 수문 가까이 위치한 창고에 이르렀다. 내성에 거주하는 사람들 및, 두 아카데미와 북부군용 작업장, 그리고 상단을 위한 창고 건물들이 여럿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라루트 님과 나는 부두에 가까운 공터로 향했다. 거기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짐을 들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짐들을 차곡차곡 쌓고, 두터운 천으로 포장한 후 새끼줄로 잘 묶어, 수레에 올린다. 소가 끄는 수레가 계속해서 부두로 향하고, 또 빈 채로 부두에서 돌아온다. 온갖 사람들이 김과 땀을 뿜으며 바쁘게 돌아다니고, 또 소리치고 있다. 간만에 보는, 활기찬 광경이다.

라루트 님은, 아, 하고서는 한 쪽으로 걸어가며 손을 들며 외쳤다.

“이보게! 라운 상단주!”

스무 걸음 쯤 떨어져 있던, 서류를 받아들고는 누군가가 맹렬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던, 마흔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아저씨 한 명이, 이 쪽을 돌아보고는 역시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라루트님, 오셨습니까.”

“이거, 왜 이리 정신이 없나? 평소보다 더 번잡하구만그래?”

“아하하, 죄송합니다. 상단에 일이 생겨 짐 싣는 순서가 복잡해지다보니, 지금 이렇게 서두르지 않으면 저 짐꾼들 삯을 하루치 더 줘야 하게 되어서 말입니다.”

“일이라고?”

‘띠링!’

<서브 퀘스트 – 상단주의 사정>

<라운 상단주에게는 뭔가 고민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고민거리에 대해 물어보세요.>

<성공시 연계 퀘스트로 이어집니다.>

떴다, 연계 퀘스트!

“오늘은 이 친구를 소개시켜 줄 겸 해서 왔다네.”

“이 분이 어떤 분이신지...?”

“기리인 모스 군이라네.”

“기리인...? 아! 그, 대화재를 막아낸?”

라운 상단주님은 표정이 확 밝아지더니 내 쪽으로 와서 두툼한 두 손으로 내 손을 덥석 붙잡고는 말했다.

“우리 집도 그 거주 구역에 있다네. 자네가 우리 가족을 살린 거나 다름없어.”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과찬은 무슨! 지금 보니 얼굴도 잘 생기고, 아주 바른 청년이구만? 하하! 만나서 반갑네, 만나서 반가워!”

어우. 상인들의 친화력은 역시, 흉내내기 힘든 본능적인 경지에 있다.

“이 친구가 그동안 활을 연습했는데, 백 보 거리에서 스무 발을 모두 맞추는 정도라는군. 머리도 좋고 하니 내려가면서 상단 일을 좀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만약의 경우에 상단을 보호할 수도 있고 말이야.”

라운 상단주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내려가겠다고 해도 당연히 도와드려야 할 마당에, 도와주시겠다고까지 하니 감지덕지지요. 그럼 상단의 호위 무사로 고용하는 형식으로 하겠습니다. 의식주를 제공하고, 전체 기간동안의 급여를 2드로그로 하겠습니다. 만약 전투를 하게 되면 1드로그의 위험 수당이 추가로 지급됩니다.”

제도까지 배 타고 가면 20일. 20일에 숙식 빼고 2드로그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군. 내가 라루트 님을 바라보자 라루트 님은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 그리고, 기리인 군이 들고 있는 이 짐들도 함께 좀 맡아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지요. 이봐!”

지나가던 상단 사람 한 명을 부른 라움 상단주님은, “저 짐들을 귀중품이 실린 방에 함께 실어드려라.” 하고 말했다. 그 상단 사람에게 내 활과 화살을 넘겨받고 나자, 라움 상단주님은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여유있을 때 하세. 지금 워낙 정신이 없어가지고 말야. 오늘 중으로 이 일을 빨리 마무리지어야 하게 돼서 말이지...”라고 말씀하셨다. 잘 됐다. 퀘스트 깨야지.

“저,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내 물음에 라움 상단주님은 “말도 말게.” 하면서 말을 시작했다. 상인의 친화력 때문도 있지만 원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분인가보다.

“우리 상단이 북부의 농경지에서 농작물을 모아다가, 배로 실어서, 저 밑의 도시에 가서 파는 건 잘 알고 있지? 그래 이번에, 겨울 동안 말린 약초들을 모으라고 몇몇 놈들을 보냈단 말야. 이 일이 오래 걸리는 일이 아니에요. 소달구지 타고 하루 정도 가서, 거기서 하루 자고, 약재 모아서 갖고 오면 된단 말야. 원래 오늘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고. 그러면 오늘 내일 이틀 분만 일하면 배에 모든 짐을 싣게 되어 있었단 말야.”

이 분, 이야기꾼의 재능도 있으신가보다. 나와 라루트 님은 어느새 라움 상단주님의 이야기에 술술 빨려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아 그런데, 이놈들이 이틀이 돼도 안 나타나고 있단 말이야. 거기 간 놈들 중에는 상단 마법사도 한 명 끼어 있어요. 이 놈한테 메시지 마법을 받았는데, 이틀 더 늦어져서 내일 모레 도착하기로 했단 말야. 늦어지는 거야 사정이 있으면 그럴 수도 있는데, 이유를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하네 이놈들이. 그래 어쩌겠나, 저 일꾼들을 이틀 사흘씩 그냥 놀리면서 수당을 줄 수도 없고. 오늘 이 짐들을 다 배에 실어놓고, 다음에 약초가 날라져오면 그 때 다시 일꾼들을 모집하려고 지금 서두르는 중이라네.”

‘띠링!’

<서브 퀘스트 업데이트 – 상단주의 사정 (2)>

<라움 상단주는 약초를 거두러 간 일행이 왜 오지 않는지 궁금해합니다. 사정을 조금 더 물어보고, 그 이유에 대해 같이 고민해 주세요.>

<보상 : 상단주 및 상단 일행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뭐, 당장 할 일도 없으니까. 오늘 아침 훈련도 없고.’

“상단주님, 몇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라루트 님이 흥미가 생긴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시는 가운데, 라움 상단주님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메시지 스펠을 사용한 마법사 분 말입니다만, 서클이 몇 서클인지 알 수 있을까요?”

“가만있자... 3은 아니고,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니까... 아마 4서클일 걸세.”

역시.

“그렇다면, 혹시 메시지 스펠을 받았을 때, 어떤 느낌 같은 건 못 받으셨습니까?”

“느낌이라니?”

“4서클 마법사면 꽤 훌륭한 마법사입니다. 물론 통신석의 도움을 받았겠지만, 메시지 스펠을 그 원거리에서 날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걸 증명하죠.”

나는 마법에 대해 설명하며 약간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한 때는 나도 마법사였는데. 이제는 마법을 그냥 잘 아는 일반인일 뿐이라니.

“그래, 그런데?”

“고급 메시지 스펠이 시전되었을 때, 시전자의 감정이 전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4서클이라면 꽤 확률이 높겠군요. 상단주님이 그 때 다른 기분을 느끼셨는데, 혹 다른 일 때문이라고 생각해버린 게 아니실까 해서 여쭤봅니다.”

라움 상단주님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아, 하며 주먹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 작품 후기 ============================

읽는 분이 많아지고 추천과 코멘트가 생기니 쓸 맛이 납니다.

일하느라 바쁘면서도 짬짬이 썼습니다.

제르디엘 님, 크리스펠로님 코멘트에 담긴 호평 정말 감사합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고 가시면 더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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