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5 2. 말할 수 있는 것, 말할 수 없는 것 =========================
“아, 그래! 그러고 보니 그때 뭔가 상당히 곤란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도 같아. 난 그때 내가 그걸 받은 후 대공 전하를 뵈어야 해서 그래서 곤란한 건가 하고 여겼더니, 그게 메시지 스펠 때문이었나?”
곤란하다... 라.
“곤란하다면 어떤 곤란함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어떤 상황에서 느낀 곤란함과 비슷하다고 말씀해 주시면 조금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만.”
“음...”
그러더니 라움 상단주님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방에서 자위행위 하다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부모님에게 걸린 느낌?”
으윽. 두 중년의 아저씨들은 짓궂게 웃었고 나는 약간 곤란하게 하하하, 하고 웃고는, 말했다.
“그럼 그 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습니까, 아니면 상단주님께서 호출해서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불렀지. 하도 연락이 없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아까, ‘자위행위를 하다가 들킨 느낌’이라는 게, 생각보다 정확한 느낌이실 겁니다. 문자 그대로 ‘들켰다’는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음?”
라움 상단주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럼 뭔가 꿍꿍이속이 있다는 말인가?”
“그건 아닐 겁니다. 그랬다면 저 정도의 느낌이 아니라 좀 어두운 느낌을 받으셨을 가능성이 크죠.”
“저기, 잠시.”
라루트 님이 끼어드셨다.
“내가 그 마법사라면, 그런 느낌이 아예 가지 않게끔 조심하거나, 아예 다른 느낌이 전달되게끔 했을 것 같은데?”
나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설명했다.
“느낌을 완전히 지우거나 자기 마음대로 보낼 수 있는 것은 적어도 5서클을 마스터해야만 합니다.”
“아, 그렇군.”
“그러니 정리해보면, 2~3일 정도 늦을 것이다, 마법을 시전하지 못할 정도로 아프거나 곤란한 상황도, 위협을 당하는 상황도 아니고, 부정을 저지르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지금 뭔가 ‘부끄러운 일’에 빠져 거동을 못하는 것이고 2~3일만 지나면 움직일 수 있다... 이 정도일 겁니다. 상단주님, 혹시, 그 분들이 농경지에 가면, 좀 술대접 같은 걸 받나요?”
“음? 아. 그래, 그런 재미라도 없으면 그 지루하면서 힘든 일을 버티기 힘들지.”
“라루트 님. 혹시 올해 토이드 술이 나왔나요?”
“토이드 술... 아! 혹시 자네, 토이드를 처음 마시는 것을...”
“네, 그거가 아닐까 합니다. 딱이거든요. 숙취로 2~3일 정신 못 차리니까.”
토이드는 우리 영지에서 나오는 약초 중, 빈혈이나 어지러움에 도움이 되는 약재다. 향이 향긋해서 큰 뿌리를 나무 병에 넣고 술을 부어놓은 후 밀봉해 놓고, 1년 후에 따서 마신다. 향이 좋고 술술술 잘 넘어가는 술이다.
문제는 이 술이 너무 술술술 넘어가는데다 과음하면 지옥 같은 두통과 온 몸이 두드려맞은 듯한 몸살 통증을 유발하는 술이다. 그래서 우리 북부 사람들은 어떠한 술고래라도 토이드 술은 과음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귀한 분이 오셨을 때 인사차 내어놓거나, 건배 자리에서 조금씩 마시는 술로 더 널리 쓰인다.
“아마, 귀한 술이라고 농부들이 내놨고, 처음 맛보는 분들이 어 이거 무지 맛있네 하면서 홀짝홀짝 마시다가 숙취로 앓아누웠겠지요. 두 분은 토이드 마신 후의 숙취가 얼마나 센 지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라움 상단주님과 라루트 님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마 그 지옥 같은 다음날을 떠올리고 계신 거겠지.
“꼼짝달싹은 못 하겠고, 호출은 왔으니 대답은 해야겠고, 해서 그렇게 애매한 답변을 날린 걸겁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일쯤이면 일어나 거동할 수 있을 거고, 모레에는 도착하겠네요.”
라움 상단주님과 라루트 님은 감탄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토이드 술! 그걸 왜 생각 못했지? 한 번 연락해 봐야 겠군. 이 놈들이, 그런 일이 있으면 똑바로 이야기를 할 것이지! 얘기 안 하고 있다가 큰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렇게 말한 라움 상단주님은, 나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다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아하하. 좀 부담스러운걸.
“고맙네, 기리인 군. 내 상단 사람들에게 이야기 잘 해 놓겠네. 같이 내려가는 기간동안 잘 부탁함세.”
“부탁은 제가 드려야죠. 잘 부탁드립니다, 상단주님. 저도 열심히 돕겠습니다.”
‘띠링!’
<퀘스트 성공 – 상단주의 사정(2)>
<들은 정보와 기존의 지식을 조합한 멋진 추론이었습니다. 라움 상단주가 크게 기뻐합니다.>
<라움 상단주 및 상단원들의 호감도가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라루트 님의 호감도가 증가하였습니다.>
<훌륭한 추리에 대한 보상으로 1드로그가 지급되었습니다.>
헐. 나는 주머니 속에 갑자기 묵직하게 자리잡은 금화를 느끼고는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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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라루트 님은 “자네 꼭 수사기사 같더군.”이라는 칭찬을 날려 나를 몸둘 바를 모르게 하셨다. 수사기사라니. 내가 그런 황제의 대리인 급일 리 있나. 그냥 간단한 추론일 뿐인데. 어느새 우리는 왔던 길을 되짚어 걸어 내성의 문에 이르렀다.
“오늘 자네 덕에 여러 가지로 재미있고 또 시간도 절약했네. 고맙네 기리인 군.”
“아닙니다. 라루트 님 덕에 편하게 여행할 수 있게 되어 저야 언제나 대공 전하와 라루트 님의 배려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거 사람 말은 참.”
그렇게 말씀하신 라루트 님은 몸을 돌려 떠나려다 말고, 나를 돌아보셨다.
“아. 상단의 출발일은 짐이 다 실린 5일 후 아침이 될 거야. 미리 볼 일 있으면 봐 놓고, 작별인사 할 사람이 있으면 작별인사 하게. 필요한 짐이 있으면, 아까 창고에 가서 이키조그라는 사람을 찾게. 그 사람이 소형 물자 창고를 맡아보는 창고지기야. 이키조그에게, 내가 필요한 것을 내주라고 했다고, 말하게.”
“알겠습니다. 이키조그 님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그럼, 하고 라루트 님은 등을 돌려, 빠른 걸음걸이로 내성 문으로 향하셨다.
가만 있자. 여관방은 빼면서 인사드리면 되고. 바크 선생님은 활 때문에라도, 좋은 술이라도 사서 찾아 뵙고 인사드려야 할 것 같고, 그리고, 헤나나 시르키 같은 여자애들한테는 편지 써서 북부군 우편소에 맡기면 되고... 그리고...
아! 리미! 다음 주에 오겠다고 약속했었는데!
나는 사람들과 이별을 준비하기 위해 움직였다.
사실 준비랄 것도 없었다. 준비할 일이 적었다기보다는 이별을 말할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내가 지난 4년간 사귀고 교류했던 넓지 않은 범위의 사람들은 모두, 이 세상에 없거나, 이 북부 대요새에 없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러다보니 지금 내가 이별을 고해야 하는 사람은, 지난 두 달간 내가 제도로 내려갈 준비를 하며 만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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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제 떠난다고? 아쉽구나. 이제 좀 정들만 하니 떠나네.”
이쿠르 아줌마는 내가 내민 작별 선물을 받아들며, 진심이 느껴지는 투로 말씀하셨다.
“고마워요, 이쿠르 아줌마. 아줌마가 저를 많이 도와주셔서 지난 두 달 동안 편하게 지낼 수 있었어요. 빨래 같은 거 같이 해 주셔서 좋았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줌마는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나를 꼭 안아주었다. 통통한 아줌마 품에서는 여관 1층에서 늘 맡을 수 있는 익힌 밀가루의 아늑한 향이 나는 것 같았다.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아줌마를 어색하게 하기 싫었다.
“기리인, 너는 우리 모두의 영웅이야. 우리 여관도 네 덕에 불타지 않은 거나 다름없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너는 말썽 안 부리고 사고 안 치는 훌륭한 손님이었잖아. 두 달동안 즐거웠어.”
내 등을 토닥거려 준 아줌마는 나를 떼어놓고, 나를 약간 올려다보며 말씀하셨다.
“제도에 무사히 가길, 그리고 제도에서 좋은 일이 있기를 기원할게. 트리클 신께서 너의 천칭에 좋은 일들을 많이 예비해 놓으셨기를.”
“트리클의 저울대가 이 여관과 아줌마와 아저씨를 지켜주길 저도 기원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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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3일 후에 제도로 떠난다고.”
바크 선생님은 내가 내민, 어린아이 머리 만한 배럴(barrel)을 받아들고는 어색하다는 투로 말씀하셨다. 내 궁술이 완성되었다는 선언을 한 이후 선생님은 내 궁술을 지도해 주지 않았다. ‘너는 이미 일가를 이룬 사람이다. 그런 이에게는 바른 자세나 호흡 같은 것은 부차적일 뿐이다’는 말을 남기고, 선생님은 나 스스로 계속 활을 쏘아보게끔 했다.
덕분에 나는 좀 무식하다 싶은 연습량을 소화하며, 컴파운드 보우에 완전히 적응했다. 직사, 곡사, 속사. 그리고 하면 할수록 이 도르래가 달린 좀 우스꽝스럽게 생긴 활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아티팩트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아티팩트를 나에게 아무런 댓가 없이 ‘명궁에게는 명기를’이라는 말만 하고 넘겨주신 바크 선생님께 죄송스럽고 또 고마웠다.
그래서 나는 저 배럴 하나에 1드로그라는 말도 안 되는 고가의 술을 사서 선생님께 드린 것이다. 돈을 드리면 선생님께 모욕이 될 테니까.
“그 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 바크 선생님은 약간 어색하게 마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들자 선생님은 어색한 말투로나마 말을 시작했다.
“나는 마법은 잘 모른다. 하지만 마법사와 전사나 궁수의 마음가짐이 다르다는 것은 안다. 몸 밖의 마나라는 존재에 몸을 맡기는 마법사와는 달리 전사나 궁수는 자기 몸 이외의 것을 다루기 힘들다. 그렇기에 그만큼 고된 단련을 하고, 그 단련이 몸에 배는 것이다.”
그러더니 선생님은 내 두 어깨를 꽉 쥐었다. 좀 아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손아귀를 통해 전해지는 것이 통증이라기 보다는 나를 격려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 동안 네가 육체를 단련한 시간은 짧을지 몰라도, 그 강도는 기사 아카데미를 다니는 어느 누구 못지 않았다. 네가 낙오하면 비웃어주려고 했지만, 너는 중간에 토하거나 쓰러졌다 다시 일어날지언정 끝까지 모든 과정을 마쳤다. 그렇기에 너는 훌륭한 궁수가, 훌륭한 전사가 될 수 있을 거다.”
바크 선생님은 툭툭,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고는 몸을 돌려 손만 뒤로 흔들었다. 아. 어색해한다, 어색해한다. 나는 다시 상체를 완전히 숙여 인사하고는, 선생님이 더 어색해하기 전에, 그리고 저 배럴을 따서 명주(名酒)의 맛을 보고 싶어 더 안달내기 전에 방문을 닫고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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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이 이틀 남았군.”
라루트 님을 찾아뵙자 라루트 님은 언제나처럼 서류에 파묻힌 채 말했다.
“준비는 다 끝났나?”
“네, 이키조그 님께 배낭과 필수 용품들을 받고, 제가 옷가지들과 필수품들을 사서 채워 넣었습니다. 상단과 함께 움직일 거라 취사도구 같은 것들은 많이 필요없어서 짐은 생각보다 가볍습니다.”
“그렇군.”
“라루트 님,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나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할 것 없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한 것일 뿐이니까.”
“라루트 님에게는 호수의 물 한컵이었을지 몰라도 저에게는 그 한 컵이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잔잔히 웃은 라루트 님은, 펜을 내려놓고 다가와 손을 내미셨다.
“그렇다면 기념으로 악수 한 번만 해 주게.”
내가 손을 뻗어 라루트 님의 손을 잡자 라루트 님은 손을 가볍게 쥐며 말씀하셨다.
“자네가 제도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이 내 노력이 물거품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야. 무사히 도착하길 기원하겠네.”
“감사합니다, 라루트 님.”
============================ 작품 후기 ============================
조언을 받아 제목에 칼을 댔습니다.
아직도 완전히 맘에는 안 듭니다.
어떻게 손을 대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조언이 오면 또 바뀔지도 ㅠㅠ
다음 편에는 응응응신이 들어가겠네요.
쓰면서 리미와 최초로 응응응신을 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추/코/쿠 주고 가시면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