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6 2. 말할 수 있는 것, 말할 수 없는 것 =========================
자크 할아버지는 내가 내민 선물을 정중히 받아드셨다.
“자크 님.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자크 님이 저를 편하게 해 주셔서 제가 그 동안 백작가를 드나들면서 힘들어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닐세, 자네 덕에 리미 아가씨가 조금이나마 밝은 표정을 짓는 걸 볼 수 있어 나도 좋았다네. 그러니 이 선물은 고마움의 표시가 아니고, 기리인 모스라는 훌륭한 청년이 준 인연의 징표로 받아들이지. 그런데 이게 뭔가?”
“가죽으로 된 장갑입니다.”
“자주 끼고 다니겠네. 고맙네.”
선물을 조심스럽게 코트의 속주머니에 갈무리하신 자크 할아버지는, 다른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드셨다.
“받게. 리미 아가씨의 편지라네.”
“편지...요.”
“일단 먼저 읽어보고 말하지.”
나는 그 말대로 붉은 밀납으로 봉인된 편지의 봉인을 뜯어내고 편지를 펼쳤다.
‘2일 후에 떠난다고 했지? 내일 저녁에 우리 집으로 와 줘. 부탁해. 리미.’
“뭐라고 되어 있나?”
“내일 저녁에 집으로 와달라고...”
“그래. 내일 저녁 식사시간에 맞춰서 백작가로 와 주게. 별 일은 없지?”
“네, 준비가 다 끝났기 때문에...”
“그럼 기다리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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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뢰브 백작가의 식당에서 내가 먹게 된 마지막 만찬은, 역시 리미와 나 둘만 참석했다. 백작님은 오늘도 신입 기사들의 훈련 때문에 병영에서 주무시게 될 거라고 한다.
“그럼 기리인, 여관에서 나와버렸어?”
나는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어 그게, 내가 좀 바보짓을 해서.”
“기리인 너도 바보짓을 할 때가 있구나?”
‘띠링!’
<그러게 말입니다. 냉철 94라는 수치가 아깝습니다.>
아 좀.
“작별인사를 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거든. 그래서, 제일 관계가 쉬운 사람부터 인사하자고 했는데, 그게 여관 아줌마였어. 근데 작별인사를 하고 여관에 있는 게 되게 어색한거야...”
리미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래, 그거 어색하긴 하겠다. 큭큭! 아무리 그래도 그렇다고 거기서 짐 싸서 나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
리미는 레이디 에티켓 같은 건 어디 치워버렸는지 박장대소를 했다. 솔직히, 그런 리미가 더 보기 좋았다. 여왕님 모드보다 말이다. 한참을 웃던 리미는 진정하고는 말했다.
“그래서, 어디서 자?”
“어... 부둣가에 노무자용 임시 숙소가 있어. 거기서 잤어.”
“춥고 불편하겠다.”
“어, 뭐...”
많이 춥지... 그나마 좀 날이 따뜻해져서 버티는 거지. 나 혼자밖에 없어서 난방이 안 되다 보니 냉골에서 자야 하는 게 컸다. 물론 거기에 내 활이랑 화살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리미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럼,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가.”
“에?”
“손님 방 내 줄게.”
아. 그런 의미였나. 순간적으로 얘가 자크 할아버지나 저택 사용인들이 다 보고 있는데 무슨 소리 하는 건가 하고 깜짝 놀랐네. 내가 놀라거나 말거나, 리미는 자크에게 “손님방을 준비해 줘. 그리고, 오늘의 요리는 뭐지?”라고 자연스럽게 물었고, 자크 할아버지는 “송아지의 등심을 와인에 재운 스테이크 요리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리미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자크. 와인 한 병만 갖다줘.”
자크 할아버지가 흠칫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흠칫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대신 주인님께는...”
“응, 말씀드려도 좋아. 비밀도 아니고 말야. 나도 이제 성인인데.”
“알겠습니다.”
자크 할아버지가 식당 문 밖으로 사라지자, 나는 리미를 바라보았다.
“백작님도 없는데 우리 둘끼리 와인 마시면, 나중에 오해하시는 거 아냐?”
“오해하시라지. 뭐 그땐 이미 너는 여기 없을텐데 뭐. 그리고 울 아빠는 기본적으로 너를 좋아하시기 때문에, 아무 말 안 하실 거야. 자크도 아무 말 안 하잖아?”
그렇게 말한 리미는 며칠 전처럼 샐러리 하나를 입에 집어넣고 와삭 깨물었다. 그때 자크가 손에 병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중부 영지의 BR 포도원에서 나온 BR 403년산입니다.”
와인에 대해 까막눈인 나는 그게 좋은지 어떤지 몰랐지만 리미의 표정은 환해졌다. 자크는 익숙한 동작으로 와인의 밀봉을 벗겨내고, 코르크 마개를 따낸 후, 어느새 우리 둘의 옆에 준비된 잔 중 리미의 앞에 있는 잔에 조금 따랐다. 리미 역시 익숙한 동작으로 코로 와인을 가져가 향을 맡고, 잔을 기울여 와인을 입 안에 넣고 향을 음미한 후, 자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BR산인데. 평소보다는 약간 덜 떫네?”
“아가씨는 와인에 익숙하지만 기리인 군은 경험이 많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떫은 맛이 덜하고 단 맛이 좀 더 강한 403년산을 가져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자크 할아버지는 나와 리미의 잔을 채워주었다. 리미가 잔의 아랫동을 세 손가락으로 잡고 들어올렸다. 나는 한 박자 늦게, 리미의 손모양대로 잔을 들었다.
“뭐라고 건배할까?”
리미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올해 서로가 새롭게 맞게 될 새로운 생활이 즐거운 것이기를.”
“그거 좋네. 즐거운 것이기를.”
쨍. 리미와 나의 잔이 부딪히고, 우리 둘은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나무 탄 향 같기도 하고, 솔잎 향 같기도 한 복잡한 향이 코를 찔렀지만, 그 향 때문에 와인의 맛은 훨씬 풍부했다. 간혹 아버지가 주시는 술 한잔이나, 주점에서 맛보는 맥주가 아닌, 처음 맛보는 와인은, 달고, 떫고, 매콤한 복잡한 맛이었다.
“후아...”
리미는 한 모금 들이키고는, 탄성을 지르더니, 다시 한 모금 들이켰다.
“맛있다...”
“저, 난 와인은 잘 모르지만, 너무 술을 빨리 마시는 거 아냐...?”
“이 정도는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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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믿은 내가 바보다.
“그래서 말야... 그때 내가 그놈을! 콱!”
깔깔대는 리미. 자크 할아버지는 두 병째의 와인을 들고 약간은 좌불안석인 태도로 서 계셨다.
“리미, 그만 마시자. 너 취했어.”
“응? 아니! 나 안 취했어! 안 취했어!”
하아. 나와 자크 할아버지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리미가 안 보이게. 취객이 안 취했다고 하면 그건 완전히 취한 거라더니.
“아가씨. 술이 과하셨습니다.”
“아직 새로 딴 병도 다 안 먹었는데.”
“남은 술을 아까워하면 술을 즐길 수가 없습니다. 그만 일어나시지요.”
오. 취한 사람이 말을 듣다니. 리미는 입을 삐쭉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리인, 그럼 잘 자. 나도 방에 가서 잘게. 아침에 볼 수 있으면 봐.”
그렇게 말하고 리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며 방을 나섰다. 저 녀석. 술이 들어가니 온갖 옛날 추억과 웃음과, 그리고 애교가 넘치는구만. 자크 할아버지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와인 병을 내려놓았다.
“한 잔 하시죠? 어차피 딴 거잖아요.”
자크 할아버지는 별 말 없이 옆에 선반에서 와인잔 하나를 가져와 와인을 따랐다. 나와 할아버지의 잔을 채우자 와인은 동이 났다.
“자네 생각보다 술이 세군.”
“아...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좀 놀라고 있습니다.”
몸이 건강해져서 그런 건가. 예전에는 술을 마시기는 해도 몸에서 술을 썩 달가워한다는 느낌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마셔도 기분이 약간 흥겨워지기만 할 뿐 취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할아버지와 나는 별다른 건배 없이 각자의 잔을 홀짝거리기 시작했다.
“기리인 군.”
“네.”
“...아니, 아닐세.”
고개를 저으며, 남은 술을 한 입에 털어넣은 자크 할아버지는, “그것 또한 자신이 짊어질 짐, 그것 또한 자신을 성장시킬 양분.”이라는 무슨 경구같은 말을 하고는, 내 손에서 빈 잔을 받아들어 테이블 위에 놓더니 말했다.
“이 쪽으로 오게. 손님방을 안내해 주겠네.”
나는 자크 할아버지를 따라 식당을 나서, 난로불이 약해져 약간은 한기가 느껴지는 거실을 지나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처음 올라와보는 2층에는 크고 작은 방들이 있었다. 복도는 멋진 세공을 한 촛대 위에 놓인 양초 불빛으로 밝혀져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 복도 끝의 방에 들어갔다.
“여기가 손님 방일세.”
널찍한 침대와 책상, 간단한 옷장. 단촐하지만, 그 단순함은 극도의 단아함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여기에 내 비루한 몸을 뉘어도 괜찮은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할아버지는 벽의 촛대에 불을 붙이고는, “간단한 속옷류는 옷장 안에 있네. 그리고 옷은 벗어서 밖에 내놓으면 내일 빨아서 말려주지.” 라는 말을 남기고는 푹 쉬라며 방을 나가셨다.
간단히 씻고 속옷 차림으로 호화스러운 흰 이불 속에 파묻혔다. 손님이 매일 있지는 않을 백작가의 방인데도 매일 새로 관리하는 듯 뽀송뽀송한 느낌이 났다. 아까의 황송스러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는, ‘그래, 까짓것, 내가 평생 이런 방에서 몇 번이나 자 볼 기회가 오겠어.’ 라고 생각하며, 대자로 팔을 폈다. 술기운이 기분좋게 올라오며 나는 어느새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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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인.”
누군가의 목소리. 꿈인가. 아니다. 누군가 나를 부르며 내 팔을 흔들고 있다. 두 달간의 새벽 운동을 통해 단련된 내 몸은 가벼운 자극에도 번쩍 눈을 떴다.
“기리인. 일어났어?”
나는 심장이 쿵 하는 소리가 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깜짝 놀랐다. 나를 깨운 건 리미였다. 리미라서 놀랐다기 보다는... 얇은 슬립 하나만 입은 그녀의 차림 때문이었다. 방은 춥지는 않았지만, 어두운 복도를 지나온 리미는 가볍게 떨고 있었다. 리미의 슬립 아래에서 추위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도톰한 두 돌기가 슬립을 가볍게 밀어올리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예상하지 못했다면 내가 바보일 거고 내 지능 100이 아깝지. 굳이 묵어가라고 했을 때부터 이런 일이 있지 않을까 반쯤 예상하기는 했다. 하지만, 내일이면 떠나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를 – 아마 다시 보지 못 할 가능성이 크겠지 – 사람을 위해, 레이디의 가장 큰 무기인 정조를 버릴 리 없다... 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런데 리미는 내 앞에 서 있다. 나는 황급히 일어나 앉았다.
“리미야...”
“앉아도 될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리미는 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잠시 손으로 내가 덮은 이불을 무의미하게 쓸며 머뭇거리던 리미가, 손가락을 하나 세우며 “라이트.”라고 마법을 시전했다. 그녀의 손 끝에 흰 빛의 덩어리가 생겨나고, 리미는 그 덩어리를 촛대 위에 옮겼다. 다시 침대에 앉은 리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일이면 떠나지...”
“응. 출발은 모레 아침인데, 내일은 상단에 가봐야 할 것 같아. 동행할 사람들도 만나고. 거기서 자야 할 것 같아.”
“그래...”
============================ 작품 후기 ============================
왠지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씬은 다음 편에 나오겠네요.;
genessis 님, 제르디엘 님, 크리스펠로 님 코멘트 감사합니다. 제르디엘 님이 여쭤보신 질문은 앞으로 전개에서 설명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