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28화 (28/309)

00028 2. 말할 수 있는 것, 말할 수 없는 것 =========================

우리 둘은 나란히 누운 채 한참 서로를 쓰다듬으며 입을 맞추었다. 내 품 안에 안긴 리미를 보고서 그간의 ‘아카데미의 여왕’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크지 않은 리미의 몸은 마치 쫀득한 반죽처럼 내 몸에 찰싹 안겨왔다. 그렇게 우리는 섹스 후의 열기를 입맞춤과 가벼운 애무로 나누었다.

“하아...”

리미가 아직 열기가 남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할 걸 그랬어.”

나는 피식 웃으며, 다시 리미에게 입을 맞추었다. 잠시 얽히던 우리 둘의 입술이 떨어지고, 리미가 말했다.

“기리인, 고마워.”

“응?”

“내 처음을 결코 잊지 못할 추억으로 만들어 줘서.”

나는 다시 리미에게 입을 맞춘 후 말했다.

“나야말로. 진짜 리미를 소개해 줘서 고마워. 레이디의 첫 남자가 되게 해 줘서 고마워.”

리미는 환하게 웃으며 다시 내 목을 감고 자신쪽으로 당겼다. 우리 둘은 다시 키스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리미 역시도 나와 같은 고민과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내일 제도로 떠나기 위해 출발하고, 리미는 이 곳에 남아 사교계에 데뷔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리미가 나를 좋아했던 마음 자체는 진짜일 것이고, 내가 지금의 리미가 예쁘고 사랑스럽다고느끼는 것 자체도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리미도 나도 서로를 사랑한다고, 어떤 제약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걸 극복하고 맺어지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첫 경험 후에 ‘사랑한다’가 아닌 ‘고맙다’, ‘좋았다’고 말하는 리미를 보며 나는 그걸 알 수 있었다. 더불어, 여자들의 마음이나 생각은 역시 남자들보다 훨씬 고단수라는 생각을 했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어느새 어깨가 확 밀쳐지며 침대의 한가운데에 눕게 되었다. 리미가 그런 내 위로 올라왔다. 아직 땀과, 우리 둘의 애액으로 젖은 몸이 부벼지고, 리미의 결코 작지는 않은 가슴이 봉긋하게 내 가슴 위에 눌러졌다.

“응?”

내가 짓궂게 물어보자, 리미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손을 뻗어 내 두 뺨을 잡고는, 지근거리에서 말했다.

“즐거운 추억은 많을수록 좋은 거야.”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리미는 다시 내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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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까지 있으면 좋지 않을 것 같아, 새벽에 급히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간단히 씻고, 어느새 방문 앞에 날라와 있는 내 옷가지들을 주워입었다. 책상에 비치된 펜과 종이로 리미에게 간단히 편지를 적어 아직 손님방 침대에서 자고 있는 리미의 머리맡에 둔 후 나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그러나 조용히 떠나려던 내 의도는 처음부터 좌절되고 말았다. 1층 현관문가에 자크 할아버지가 서 계셨던 것이다. 비명을 안 지른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자네가 이럴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지. 가세.”

자크 할아버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앞장서 현관문을 열고 나가셨다. 나는 별 수 없이 자크 할아버지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니아트 호수를 끼고 있는 북부 대요새는 늘 아침마다 엷게 안개가 낀다. 겨울에는 이 안개가 고스란히 서리가 되지만, 이제 곧 봄이 올 모양인지 뿌옇게 안개가 끼고 있었다. 아직 농밀하다고는 할 수 없는 안개. 곧, 아침을 짓는 연기들이 뒤섞이면, 더 짙어지겠지. 아직은 질감을 갖추기 전의 안개 속으로, 나는 자크 할아버지를 따라 저택의 정원을 나서, 내성 밖으로 나갔다.

“기리인군.”

긴장해서인지 내 대답은 평소보다 빠르게 나왔다.

“네.”

“허허. 긴장하지 말게. 자네를 원망하는 게 아니야.”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약간 발걸음을 재게 놀려, 자크 할아버지의 옆에 가서 섰다. 어스름한 새벽, 조금씩 아침을 준비하는 귀족가의 사용인들과 주부들이 골목을 메우고, 아침 빵을 굽는 빵가게의 불빛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자크 할아버지는 별 말 없이 서쪽으로, 그러니까 부두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할아버지가 대체 뭐라고 하실지 몰라 약간 불안한 채 그저 할아버지의 옆에서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상업지구가 끝나고, 남대로를 건너기 직전 할아버지가 멈춰서셨다.

“이 나이가 들고 보니 말일세.”

“네.”

그렇게 서두를 뗀 자크 할아버지는 내 쪽이 아닌, 해가 떠오를 동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젊을 때 사랑이다 미움이다 이렇게 복닥거리고 다투는 게 그 때는 세상이 무너질 일 같지만, 지나고 나면 모든 게 추억이고 기억이 된다는 걸 알게 된다네.”

자크 할아버지는 짓궂은 미소를 띄며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리미 아가씨에게 마지막으로 자네와 저녁식사라도 하라고 부추긴 건 나였다네.”

“네에?”

내가 눈이 휘둥그레 커져 물어보자 자크 할아버지는 여전히 그 짓궂은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자네 귀족가의 레이디들이 다들 정조를 지키고 깨끗한 줄 알지? 경험이 없는 요뢰브 백작님이야 그렇게 생각하시겠지만, 오히려 우리같은 평민들의 남녀들보다 훨씬 더 문란하다네. 그렇게 귀족가에서 정절을 중요시하는 이유도 그만큼 안 지켜지기 때문이지. 그래서 사교계에는 오늘도 내일도 질긴 치즈같은 가쉽(gossip)들이 떠돌아다니는 거고 말일세.”

짓궂음은 사라졌지만, 미소는 남아있다.

“오랜 기간 아가씨를 옆에서 지켜본 나는 알 수 있었네. 자네가 꽃을 준 이후 아가씨가 한 단계 성숙해서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걸. 자네와의 짧은 시간이 좋고 나쁜 기억으로 점철된 청소년기에 마지막 행복한 마무리가 되어준다면, 아가씨는 이제 인생의 새로운 막으로 나가는데 거리낄 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네. 아가씨도 아마 그런 생각까지는 아니라도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끼셨을 거야. 그래서 자네의 방문을 두드리셨던 것일 테고.”

나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태도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배려와 안배가 없이는, 나는 변화한 리미도 몰랐을 테고, 어젯밤의 뜨거운 섹스도 없었겠지. 내 표정을 살핀 할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조심히 가게, 기리인군. 여행이란 힘든 것이라네. 자네의 여로에 평안함이 깃들길.”

“감사합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자크님.”

나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자크 할아버지는 내 어깨를 두어 번, 친밀하게 두드려주시더니, 다시 상업지구 쪽으로 뒤돌아서 걸어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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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인군! 그 쪽을 당겨주게!”

배라는 건 생각보다 많이 흔들리는 물건이었다. 호수이고, 묶어놨는데도 말이다. 약간씩 비틀거리는 기분으로 나는 반대쪽에서 아저씨들이 던진 밧줄을 잡고, 힘껏 당겼다.

“끄응! 이 정도면 됩니까?”

“옳지. 그 밧줄 끝에 고리모양으로 된 매듭이 보이지? 그걸 바닥에 있는 갈고리에 걸어주게.”

나는 줄을 팽팽하게 당긴 다음 갈고리에 걸었다. 예전 같았으면 꿈도 못 꿨을 일인데, 내 힘이 생각보다 커서인지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걸었습니다!”

“좋아! 다 됐네. 나가지!”

나는 아저씨들과 함께 선실의 계단을 올랐다. 호수의 바람이 불어와 옷깃을 여미며 갑판으로 내려서자, 작업을 감독하시던 상단의 오그코 아저씨 – 직함은 들었는데 까먹었다 – 가 내 등을 결코 약하지 않게 철썩 치며 말했다.

“이 친구, 마법사라고 해서 비리비리할 줄 알았더니, 제법 힘이 좋은데? 나중에 일자리 없거든 한 자리 줄 테니까 말만 하라구! 안 그런가?”

오그코 아저씨는 옆의 사람들에게 물었고, 다들 “한 사람 몫은 충분히 하겠는데?” “잘 생기기도 했고, 이틱이나 레카 가면 아가씨들이 사죽을 못 쓰겠어.” “아가씨들만 그럴까? 남자 밝히는 놈들도 그러겠는데?” 하며 다들 껄껄거렸다. 나는 멋쩍게 하하 웃고 말았다. 아저씨들 나름의 친해지는 방법, 약간 곤란하긴 하지만 기분나쁘지는 않았다.

그 때 “으흠.” 하는 헛기침 소리와 함께 누군가 배에 올라오고 있었다. 아. 라움 상단주님이다. 오그코 아저씨와 다른 일꾼들은 모두 상단주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상단주님 오셨습니까.”

“아. 잘 하고 있겠지?”

그렇게 슥 둘러보던 라움 상단주님의 눈길이 나에게 와서 멎었다.

“응? 기리인군! 자네가 여기서 뭘 하나?”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별로 할 일도 없고 해서, 이 분들 일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이보게 오그코. 저 분은 손님이자 호위를 맡아주실 분인데, 이런 힘쓰는 일을 시키면 어떻게 하나.”

“아닙니다, 라움 상단주님. 제가 하겠다고 자원했습니다.”

“자원했다고?”

라움 상단주님은 약간 놀라시더니,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리시고는, 선실로 내려갔다. 오그코 아저씨가 상단주님을 수행해 내려갔다가, 잠시 후 올라왔다. 라움 상단주님이 아저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시더니, 나를 향해 “잠시 갈 데가 있는데 같이 가세.”라고 말씀하셨다. 음. 기분나빠 보이지는 않는데. 그런데 내가 저 분들 일을 도와 짐을 나르고 밧줄을 묶고 한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 작품 후기 ============================

약간 짧습니다.

어제 잠을 설쳐서 제 분량이 안 나왔네요. 죄송합니다.

내일은 꼭 충분한 분량을 올리고, 가능하다면 연참도 해 보겠습니다.

제르디엘 님, genessis 님 코멘트 감사합니다.

선추코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느 분인지 모르겠지만 원고료쿠폰 주신 분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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