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29화 (29/309)

00029 2. 말할 수 있는 것, 말할 수 없는 것 =========================

그런데 내가 저 분들 일을 도와 짐을 나르고 밧줄을 묶고 한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결국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라움 상단주님.”

“응? 왜 그러는가?”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기분 나쁘셨는지요?”

“음? 내가 왜?”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라움 상단주님. 하지만, 상인을 대할 때는 쉽게 안심해서는 안 된다. 늘 어머니께서 신신당부하신 말씀이시다. 정작 우리는 늘 만나는 가게 아저씨 아줌마들 빼고는 이런 대상인들 만날 일도 없었는데. 어머니. 오늘따라 그립다. 아니, 아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젓고는 라움 상단주님에게 다시 말했다.

“아까 상단주님께서, 제가 일했다는 것보다 제가 ‘스스로 자청해서’ 일을 했다는 점에 더 놀라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 잘못 봤다면 죄송합니다.”

라움 상단주님은 잠시 말이 없다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것 때문에 그런 건 아닐세. 그저...”

그러더니, 상단주님은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자네가 너무 애쓰는 것 같아서 말일세. 왜 대왕께서도 그러시지 않았던가. 인내하되, 무리하지는 말라고 말일세.”

음. 무슨 말인지 짐작이 가긴 한다. 내가 억지로 나서서 그 분들과 어울리려 드는 게 아니냐, 라고 꼬집고 있는 거겠지. 원래는 안 그랬을 텐데, 능력을 잃고 나서 버림받지 않기 위해 조바심내는 거 아니냐... 그 말이 어느 정도는 맞기 때문에 부정할 수만은 없다는 게 좀 서글프다.

“명심하겠습니다.”

상단주님은 별 말 없이, 잔잔한 미소만 지으며 아까 오그코 아저씨의 어깨를 두드렸듯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묘하게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구석이 있구나. 아니면, 이것도 설마 상인의 스킬일까. 방심 유발이라거나.

‘띠링!’

<좋은 지적입니다. 상대에게 약해 보이는 것이 상대에게서 더 많은 양보를 이끌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들을 잘 관찰하는 것이야말로 당신의 스킬을 늘려나가는 출발점입니다.>

간만에 시스템씨의 ‘창’을 보니 반갑다. 아, 그러고 보니. 너 오늘 새벽에 나 봤냐?

<당신이 보는 것은 저도 보고 당신이 받아들이는 정보는 저도 받아들입니다.>

쩝. 앞으로는 섹스를 할 때마다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겠군.

<오히려 좋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당신의 섹스 기술이 스킬로 만들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저거 안 본 눈 있으면 어디 가서 사고 싶다. 나는 손을 움직이지 않은 채, <마나 배치> 스킬을 작동시켜 마나의 손으로 ‘창’의 x자를 눌러 닫아버렸다. 그 동안, 나와 상단주님은 부두가 옆에 있는, 내가 며칠간 냉골에서 떨면서 잠들었던 바로 그 건물, 부두 관리소와 창고를 겸한 건물로 왔다.

“아까 말했듯이, 자네에게 소개시켜 줄 사람들이 있다네.”

“소개요?”

“그래, 소개. 자네와 함께 이번에 상단 호위 역할을 맡아 레카 시까지 함께 내려갈 사람들이라네.”

나는 라움 상단주님의 인도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상단주님은 2층의 어느 방을 두드리더니, “들어오세요.”라는 어느 남자 목소리를 듣고는 문을 열었다.

“어? 상단주님이시네. 어서 오세요.”

방 안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벽난로 근처에서 책을 읽고 있던, 검은 칼라 없는 셔츠와 바지 차림의 남자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가벼운 금빛을 머금었지만 흰색에 가까운 머리에, 몸은 날렵하고 탄탄하게 생겨 달라붙는 셔츠에 멋진 선을 그려내고 있었지만, 그 얼굴은 생각보다 곱상했다. 그 남자의 초록빛 눈에는 장난기와 쾌활함이 어려 있었다.

“아, 에아임군. 잘 지냈나? 북부는 춥지?”

“어유. 정말 춥네요. 얼른 내려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쪽은...?”

“소개시켜주고 싶어서 데려왔네. 기리인 모스 군일세.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천재 마법사였는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대화재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리해서 마법을 못 쓰게 되었어. 그래서 제도로 가서 진단을 받아보기 위해 우리와 동행하게 되었네.”

에아임씨의 얼굴에 순식간에 동정이 어렸다. 내가 원한 건 아닌데. 처음 보는 사람에게 동정받고 싶지는 않은데. 나는 에아임씨가 그 동정을 자기 속으로만 생각할 정도로 사려깊은 사람이기를 빌며, 그에게 다가갔다. 곧 방 안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던 검은 머리에 각진 얼굴의, 한 30대 후반은 되어 보이는 아저씨 한 명과, 뭔지 모를 책을 보고 있던 요안나 선생님뻘 정도 되어 보이는 아래턱이 뾰족한 아가씨 한 명도 내 쪽으로 다가왔다.

“기리인군, 이 남자분은 에아임 로스 씨라네. 제도의 케아바 상단에서 북부 영지의 실사를 위해 보낸 사람이지. 이 쪽은 톨라츠씨, 그리고 이 숙녀분은 에빌로 양. 에아임씨를 돕고 있는 분들이라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기리인 모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에아임씨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아, 너무 과한 예의는 필요없어요. 편하게, 편하게 대해줘요. 기리인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나?”

“열아홉입니다.”

에아임씨는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이제 갓 성인이 되었군? 이거 나이차이가 적으면 형이라고 하라고 했을텐데, 꼼짝없이 아저씨라고 불리게 생겼네 이거.”

“그만 포기하시죠, 에아임씨. 서른둘의 유부남이면 아저씨 소리 듣는 게 맞습니다.”

톨라츠 씨가 사람 좋게 웃으면서 말했다. 에아임씨는 고개를 저으며, 포기할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래도! 내 나이 서른둘인데 벌써 아저씨 소리를 들을 수는 없지! 톨라츠 아저씨라면 몰라도! 이봐, 기리인. 말 놔도 되지? 나는 에아임 형님, 이라고 불러주게.”

와. 정신없다. 하지만 기분나쁘지는 않다. 라움 상단주님이 자신을 약하게 보여서 원하는 것을 쉽게 얻는 스타일이라면, 여기 있는 에아임씨, 아니 에아임 형님...은 사람을 자기 페이스로 끌어들이는 데 능한 사람인가보다. 이런 정신없는 대화가 자주 있었던 듯, 톨라츠 아저씨는 허허 하고 웃고 있었고, 에빌로 씨는 미미한 미소만 띠고 있었다.

“세 분 모두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형님이라고 불러.”

“아... 네. 에아임... 형님.”

“그렇지.”

아. 이쯤 되면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진다.

‘정보 확인.’

이름          : 에아임 로스 (본명 : 정보확인 레벨이 낮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나이          : 32세

HP           : 4800/4800

힘            : 96

민첩          : 92

지력          : 90

마나친화력    : 62

매력          : 85

지구력        : 99

특수          : 정의감 89

스킬          : 검술 A, ???, ??? (정보확인 레벨이 낮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나는 놀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본명이 아냐? 정보확인 레벨이 낮다고? 그때 싱글싱글하며 웃고 있던 에아임 씨, 아니 에아임 ‘형님’이 말했다.

“왜 놀랐을까?”

“네?”

“조금 전에 뭘 보고 흠칫 놀라는 거 같던데?”

내 마음 속에서 에아임 ‘형님’에 대한 경계도가 확 상승했다. 내가 표정 감추기의 달인은 아니지만 그 짧은 시간에 그걸 캐치하다니. 나는 그걸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으며 말했다.

“아, 배에... 복근이 보여서...”

형님은 자기의 배를 내려다보더니 하하하 웃었다.

“아! 이 복근 때문에 그러는가? 하하! 싱거운 친구로구만.”

싱겁기는 당신이 더 싱거운 것 같은데. 라움 상단주님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이봐, 에아임 군. 자네가 잘 하는 것 있잖나. 한 번 기리인 군에게도 해 보게.”

“그럼 그럴까요? 말 놓는다고 했으니 편하게 말할게. 기리인. 문제 푸는거 좋아하냐?”

“어떤 문제 말씀이신지?”

그때 처음으로 에빌로 씨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인상에 맞는, 조용조용하고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간단한 수수께끼나 생각을 요하는 퀴즈 같은 거.”

“좋아합니다.”

내 즉답에 에아임 형님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그럼 내가 내는 문제를 풀어봐. 어느 왕이 범죄를 저지른 신하 네 사람을 잡았어.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지만, 저들의 재능이 아까웠던 왕은 문제를 내서 한 사람이라도 맞추면 모두 살려주겠다고 했지. 왕은 한 사람을 벽 뒤로 보내고, 나머지 세 사람을 계단 위에 차례대로 세웠어. 그리고는 벽 너머의 사람에게 검은 모자를, 계단에 선 사람에게 차례대로 흰, 검은, 흰 모자를 줬어.”

머릿속에 계단과 벽이 그려진다.

“계단 위에 선 사람은 앞 사람은 볼 수 있지만 자기와 뒷사람은 볼 수 없지. 벽 너머도 볼 수 없고. 물론 고개를 돌리거나 답 이외에 다른 얘기를 하면 다 죽는 거고 말야. 왕은 ‘검은 모자가 두 개, 흰 모자가 두 개다. 자기의 모자 색깔을 정확히 맞춰라’라고 문제를 냈어. 그런데 이 신하 네 사람이 모두 살았다. 그럼, 누가 답을 맞췄을까?”

“계단 가운데 있는 검은 모자를 쓴 사람이요.”

숨도 쉬지 않고 나온 내 대답에 에아임 형님을 비롯해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놀랐다.

“정답은 정답인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에빌로 씨가 멍하니 말했고,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톨라츠 아저씨와 라움 상단주님도 고개를 끄덕였다. 에아임 형님은 약간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기리인.”

“네, 형님.”

형님 소리가 무지무지 어색하다.

“너무 빠르게 답이 나와서,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좀 설명을 해 줘야 하겠는데. 운에 의지해 찍은 게 아니라는 걸 말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먼저 벽 너머의 사람과 계단에서 맨 앞에 있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알 수 있는 게 없으니 빼야죠. 그리고 계단 맨 위에 있는 사람은 아무 답도 못 할 테고요.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면, 가운데 사람이 왜 뒷사람이 대답 못하는지 궁금해하다가, 자기 앞 사람과 모자색깔이 다르다는 걸 금방 알 수 있겠죠.”

에아임 형님을 빼고 나머지 모두가 오,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라움 상단주님이 말했다.

“나는 설명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는데, 어떻게 숨도 쉴 틈도 없이 답이 바로 나오지? 이야. 역시 우리 기리인군이야.”

문제가 쉬운 문제였으니까 그렇죠. 라고 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분위기가 차가워질게 뻔하니까. 요안나 선생님과 평소에 훈련을 많이 한 덕이죠.

“기리인 군,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게. 저 분이 저런 수수께끼를 자주 내고 맞추는 걸 즐기는 버릇이 있어서 그래.”

톨라츠 아저씨는 만난지 얼마 안 됐는데 참 푸근한 인상을 준다. 떡 벌어진 어깨와 우락부락한 팔근육과 등근육, 네모난 인상의 얼굴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항상 선하게 웃고 있는 표정 때문일까.

“그래도, 같은 수수께끼를 난 사람 중에는 제일 빨리 맞췄네요. 즉답이라니.”

에빌로 씨가 덧붙이자, 갑자기 에아임 형님이 “이이이익!” 이런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인정할 수 없다! 기리인! 너도 나에게 문제 하나를 내 봐라!”

그 톤이 진심이라기보다는 좀 연극풍의 웃긴 톤이라 화가 났다기 보다는 여가를 재미있게 보내자는 의도가 너무 명확해서, 당황한다거나 화가 난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친근하게 느껴졌다. 진짜 상인인가. 친화력이 너무 뛰어난데.

나는 목청을 잠시 가다듬은 후,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른 문제인, 요안나 선생님이 나에게 마지막으로 냈던 1, 2, 4, 6 말의 문제를 냈다.

수수께끼를 내면 이게 재미있다. 이야기를 들은 모든 사람들이 음... 하는 표정으로 턱이나 귀나 머리나 팔짱이나 암튼 뭔가를 잡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것. 가장 먼저, 라움 상단주님이 고개를 들었다.

“열네 시간 아닌가? 1, 2로 가는데 두시간, 1로 돌아오는데 1시간, 1, 6으로 가는데 6시간, 1로 돌아오는데 1시간, 1, 4로 가는데 4시간. 합쳐서 열네 시간.”

내가 고개를 젓기도 전에 에아임 형님이 먼저 말했다.

“아쉽지만 상단주님, 열세 시간에 가능합니다. 1, 2로 가고, 1로 돌아오고, 4, 6으로 가고, 2로 돌아와서 갈 때 1, 2로 가면 됩니다.”

내가 정답입니다, 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사람들이 아까 오오- 하며 나를 바라봤던 식으로 에아임 형님을 바라보았다. 형님은 과장되게 어깨를 치켜세우며 턱을 젖혀 의기양양함을 드러냈다. 하하. 재미있는 사람이네. 수수께끼를 좋아한다니 좋은 대화 혹은 승부의 상대가 되겠군.

============================ 작품 후기 ============================

주인공의 똑똑함이 잘 안 드러난다는 지적에 대해... 아무래도 주인공은 아직 스물도 안된 사람이니까요. 똑똑하지만, 경험도 지식도 아직은 부족하고,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는 부분도 많죠.

1, 2, 4, 6 문제라고 적힌 건 11화에 요안나가 기리인에게 낸 문제를 말합니다.

상식뽀각 님 수치 오류를 지적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스무스하게 수정했습니다.

genessis 님 쿠폰 감사합니다. 제가 아조시라는 건 또 어찌 아시고 ^^;;

제르디엘 님 늘 코멘트 감사합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선추코 주고 가시면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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