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32화 (32/309)

00032 2. 말할 수 있는 것, 말할 수 없는 것 =========================

결국 느릿느릿한 떼들의 물결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려서 우리가 출발한 건 아침을 먹고 차까지 마시고도 한 시간은 더 노닥거리고 나서였다. 우리가 타고 있던 기함을 필두로 총 세 대의 상단 소속 상선이 강을 향해 항해하기 시작했다. 아마 하늘에서 봤으면 장관이었을 것이다. 뗏목 수백개가 줄지어 넓은 니아트 강을 꽉 메우며 천천히 내려가고, 그 뒤를 상단 소속의 배 세 척이 따라가는 장대한 행렬이었을 테니까.

생각해 보니, 나는 태어나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우리 영지를 떠나는 것도 처음이었다. 여행의 첫 날에 어울리는 날씨였다. 아직은 2월이지만 봄이 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떼를 따라 가는 여행이라 선원 아저씨들도 전혀 바쁘지 않았다. 돛도 다 접어놓고 그저 물을 따라 흘러내려가는 중이었으니까. 망루 위에서 망을 보는 견시수와, 만에 하나를 대비해 타륜을 잡고 있는 항해사 아저씨 말고는 다들 움직임에 여유가 있었다.

“이거 여행의 처음이 너무 평온하군요.”

좌현 난간에 서서 넓게 강변을 따라 펼쳐진 경작지를 보고 있는데, 등 뒤로 톨라츠 아저씨가 다가와 말했다.

“톨라츠 님은 여행의 경험이 많으세요?”

“에아임 님은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저는 경칭입니까?”

약간 타박조로 말하는 톨라츠 님의 얼굴은 그러나 웃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당황하지 않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다고 ‘아저씨’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아저씨가 맞으니 그렇게 불러도 되긴 합니다만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별로로군요. 일단 아저씨라고 부르고 나중에 좀 더 친해지면 삼촌이라고 부르면 어떨까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허허, 웃은 톨라츠 아저씨는 – 일단 아저씨라고 부르자! - 내 곁에 서서 같은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행 경험이... 많지요. 스물 다섯 살 이래로 정착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네요. 남쪽의 밀림부터 이곳 북부의 차가운 겨울까지 안 다녀 본 적이 없는 것 같군요.”

착각일까. 갑자기 아저씨의 얼굴이 약간은 더 주름져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저씨의 표정은 지난 시간들이 아쉽다거나 하는 표정은 결코 아니었다.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고 회상하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나는 불현듯 어제 봤던 아저씨의 정보를 떠올렸다. 재능-눈썰미. 그래, 아저씨는 트리클 사제였지. 그럼 아저씨가 10년 넘게 지금처럼 정착하지 않고 대륙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데도 아무런 불만이 없는 건 교단의 일이라서 그런 건가.

트리클의 사제는 특이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일찍부터 사제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제로서의 권능과 신앙심은 갖고 있되 성직자로서 복무하는 것은 마흔부터다. 그 전까지는 사회에서 일반인들과 섞여, 치르낙 황제가 교단과 맺은 협약에 따라 관리나, 선생님, 영지의 경비대원, 병원 등에서 일하는 공복(公僕)이 된다. 이 과정에서 겪은 경험들이 설교나 봉사에 묻어나기에 제도에 대한 평은 좋은 편이다.

그리고 그를 위해 트리클 신은 사제들에게 치료의 권능과, 원하는 ‘재능’을 한 가지씩 준다.

“기리인 군은 여행이 처음이죠?”

“네. 저는 여행은 고사하고 북부 대요새의 성문을 나온 것도 오늘이 처음이에요.”

“그런 신비한 여행을 나왔는데 이렇게 평화로우니까 좀 실망하고 있는 건 아닌가요? 하하.”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이란 게 힘든 거라고 여러 분들에게 조언을 받고, 짐도 엄청 많이 꾸려왔는데... 첫 날이 이래서, 철없는 소리인지는 몰라도 약간 김이 빠지는 느낌이 있네요.”

톨라츠 아저씨는 여전히 푸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트리클 신의 천칭은 언제나 균형이 맞지요. 앞이 이렇게 평온하면 뒤부분에 불어올지 모를 풍랑을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

톨라츠 아저씨는 내가 그걸 안다는 걸 모르지만, 아저씨는 몇 년만 있으면 트리클 신의 사제가 되실 몸이다. 나는 약간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아저씨는 먼 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기리인 군은 영지를 나온 적이 없다고 했죠? 그럼 여정에 대해 설명을 들었어도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군요.”

“네, 며칠 후에 미틱 시에 가서 며칠 묵어갈 거고, 그 후에 레카로 내려가는 일정이라고...”

“그렇지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요. 니아트 강이 그렇게 내려가니까요. 미틱 시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

“들어는 봤어요. 니아트 강이 남 니아트와 서 니아트로 갈라지는 곳, 북부와 중부의 경계에 있는 교역도시라고...”

“가보면 놀라게 될 거에요. 나는 제도에도 가 봤지만, 제도보다 훨씬 번잡하고, 제도보다 훨씬... 음. 좋게 말해서 활기차다고 할까요.”

“그거 웬지 소란스럽고 시끌벅적하다는 얘기로 들리네요.”

“하하, 들켰나요. 그럼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이야기를 하나 해 줄게요.”

“이야기요?”

아저씨는 웃고 있었지만, 아저씨의 웃음은 약간 줄어있었다.

“기리인 군, 학교에서 북부 대영지에 대해 배웠죠? 북부의 주요 산물이 뭔지 아나요?”

“어, 대수림의 목재, 북부 대평원에서 자라는 일부 내한성 곡물과 약초, 그리고...”

“물론 대수림의 목재는 유명하죠. 대륙에서도 고급으로 쳐주는, 곧고, 단단하고, 향도 좋죠. 하지만 기리인 군, 이걸 생각해 보세요. 밀을 파는게 비쌀까요? 밀가루를 파는게 비쌀까요? 아니면 그걸로 요리를 만들어서 파는 게 비쌀까요?”

“요리가 비싸겠죠. 그럼 아저씨가 하시고 싶은 말씀은...”

“그래요. 나무를 잘라 파는 건 그렇게 돈이 잘 안 돼요. 그걸 잘라서 목재를 만들어서 팔거나, 가구 같은걸 만들어서 파는 게 훨씬 돈이 많이 돼요. 그런데 북부에서는 그게 안 되고 있죠.”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이야기들이다. 이런게 어른이고, 이런게 어른들의 이야기인가. 나는 어른스러운 이야기를 한다는 뿌듯함 반에, 처음 접하는 영역의 이야기에 느끼는 부담 반을 느끼며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이렇게 말할 사람들도 있을 거에요. 처음 북대공령이 세워질 때 치르낙 3세에게 지원을 받기로 했던 것 아니냐, 식량이며 철이나 구리 같은 금속이며 이런 것들을 지원받으니 그런 무역같은 건 별 필요 없는 것 아니냐고.”

지금 막 그 얘기를 떠올린 나는 말 안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여전히 덤덤한 표정으로 북부 평원과 고요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리인 군. 왜 제도나 중부 공작령, 로그푸스 변경백령에서 북부 대공령을 지원하고 있는지 아나요?”

“왠지는 몰라도 ‘그게 계약이었으니까’ 내지는 ‘북부가 제국을 지켜주고 있으니까’ 같은 모범적인 답변을 하면 어린애 소리 한다고 말씀하실 것 같네요. 혹시, 목줄이나 고삐 같은 건가요.”

“그렇죠. 이해가 빠르네요.”

“아저씨. 애 데리고 별 이상한 소리를 다 하시네요.”

등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다. 에아임 형이 셔츠에 바지 차림의 편한 차림으로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랐지만 톨라츠 아저씨는 평온한 어투로 대답했다.

“오셨습니까, 에아임 씨. 그냥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하던 중이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치고는 너무 꿈도 희망도 없는 이야기 같은데?”

피식거리던 에아임 형은 “뭐, 그게 현실이긴 하지.” 라고 말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기리인. 톨라츠 씨가 왜 이 이야기를 했는지 알겠니?”

“뭔가 북부가 스스로 먹고 살 길을 다른 쪽에서 찾고 있다는 말을 하시려는 것 같았습니다.”

두 사람은 흠칫 하고 놀랐다.

“음... 톨라츠 아저씨. 얘한테 뭐 말할때는 조심해야겠는데요. 하지 않은 이야기까지 읽어내는 걸 보면.”

“그러게 말입니다. 놀랐습니다. 기리인군.”

갑자기 에아임 형이 내 어깨 위에 팔을 툭 올려왔다. 으윽.

“내가 왜 여기로 왔게?”

“글쎄요?”

“밥 먹으라고 부르더라. 가자. 선장님이 방으로 부르셨어. 그거 아냐? 배에서는 선장님이 가장 우선이야. 상단주님이라고 해도 한 수 접어줘야 하시지. 물론, 상단주님도 참석하는 식사자리가 되겠지만.”

그리고 형은 내 어깨 위에 팔을 걸친 채로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가버렸다. 당연히 나는 형의 억센 팔에 질질 끌려갔다.

“어, 어, 어.”

“배의 속도를 보면 점심 먹고 오후쯤에 대수림이 끝날 거다. 그때 우현 쪽을 보면 톨라츠 아저씨가 뭘 말하고 싶었는지 보일 거야.”

아무 일 아니라는 듯한 에아임 형의 말투에 나는 그래, 있다 보면 되겠지 뭐, 하고 생각했다. 그 전에.

“어, 어, 형! 넘어지겠어요! 제 발로 갈게요!”

============================ 작품 후기 ============================

곧 다음 편이 이어집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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