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7 3. 갈림길에서는 돌아보라 =========================
그날 밤이었다. 상단주나 선장과 우리 사이의 긴장된 관계를 반영하듯 우리는 식사자리에 초대받지 못했다. 식사를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에아임 형이 그 식사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불을 못 써서 준비된 요리만 한다더니, 오늘 저녁은 스튜로군. 다들 손 대지 마. 식사에 손을 썼을 수도 있어.”
내가 에빌로 누나를 바라보자 누나는 내 눈길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듯 고개를 저었다.
“정화(cleanse)로 제거되지 않는 독도 있으니까.”
“독이 아니라 약인 경우도 있지요. 잠이 오는 약이라던가, 어지럽게 만드는 약이라던가.”
톨라츠 아저씨가 덧붙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커다란 배낭을 뒤지더니, 깊은 곳에서 손바닥만한 뭔가를 나눠줬다.
“기리인 군은 이런 거 처음 보겠군요. 받으세요. 육포입니다.”
아. 나는 육포를 받아들고, 잠시, 아버지 생각을 했다. 군대에서 보급품으로 나눠준 육포를, 아껴서, 품 속에 넣었다가, 가져다 주셨던 아버지...
“기리인, 왜 울어?”
“아, 아뇨... 아버지 생각이 나서...”
다가온 에빌로 누나가 나를 꼭 안아주었다. 나는 울지 않으려고 이를 꽉 악물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이런. 내 표정이 엉망이었나보다. 다들 확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육포를 크게 찢어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동작에 집중하면 슬픈 생각을 하지 않게 될 것 같아서였다. 에아임 형은 헛기침을 하더니,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었다. 화제를 돌리려는 듯, 톨라츠 아저씨가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행이라는 게 그렇죠. 흔히 새로운 세상을 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낭만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바람 맞으면서 자고 불 없이 이런 건량으로 때우고 이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저야 신의 사제니까 모든 걸 신께 의탁한 몸이지만, 우리 에아임 님은 수도에 아내와 아들도 있는데 참 고생이 많으시죠.”
“아이고. 나야 뭐, 몸뚱아리 하나는 건강한데. 우리 에빌로 양이 고생이 많지. 여자 몸으로.”
“평소에는 별로 신경 안 쓰시더니. 이럴 때만.”
조곤조곤하게 꽂아넣는 말 펀치. 세 사람은 평소보다 약간 더 밝게 웃고 떠들었다. 왜 그 마음을 모르겠는가. 내가 슬퍼할까봐,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 하는 걸 눈치채고는 밝은 분위기를 만들려는 건 줄 내가 왜 모르겠는가. 그 마음씀씀이가 고마웠다.
그 때였다.
‘띠링!’
<이 시간부로 시바낙 커넥션 퀘스트를 서브 퀘스트에서 메인 퀘스트(2)로 격상합니다.>
응? 나는 내가 눈 앞의 글자를 읽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약간 땅바닥 쪽으로 시선을 내리며 새로 떠오르는 창들을 보았다.
<메인 퀘스트(2) – 시바낙 커넥션 (2)>
<적의 습격이 1시간 내로 추정됩니다. 빠르게 준비를 갖추세요.>
<퀘스트 목표 : 살아남으세요>
<추가 목표 : 습격자 중 일부를 확보하여 증언을 들으세요>
“...형.”
“응? 왜 기리인?”
형의 목소리에는 아직 밝은 톤이 들어있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오늘 밤이 가장 위험한 거죠?”
“그렇지.”
“그럼 지금부터 나가서 갑판에서 대비를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내 말에 형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그래. 나가자. 톨라츠, 에빌로. 준비해요.”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배낭을 향해 달려갔다. 나는 어쩔까 하다가 아까 케이스에 넣었던 활을 꺼내들고, 화살통을 꺼냈다. 바크 선생님이 주신 화살이다. 아깝긴 하지만, 내 목숨보다 아깝지는 않다. 회수할 수 있으면 회수하면 되고. 하지만 화살을 구분해서 쏴야 하니 전통을 하나 더 챙긴다. 나는 마수목 화살대에 미늘촉을 열 개, 윌로우를 열 개, 그리고 도끼날 두 개를 끼워 집어넣고, 일반 보급형 화살도 서른 개를 채워넣었다. 3일 전 첫 습격사건이 있었을 때 미리 화살을 보급받아둬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온갖 핑계를 대며 안 줬겠지.
“기리인. 지금 상황이 좋은 편이 아니다. 그건 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부에도 적이 있을 수가 있죠.”
“그래. 그게 문제다. 그래서 너를 지켜줄 수가 없어. 우리는 에빌로도 지켜야 한다. 게다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더더욱 말이다. 다행히 톨라츠가 아주 감각이 좋으니, 우리가 모르게 밑에서 수 쓰는 건 어떻게든 알아볼 수 있을 거야.”
형은 나를 창가로 데려가더니 가운데에 선 돛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할 거다. 너는 저 위에 올라가라. 아래에서 톨라츠가 에빌로를 지키고, 나는 사람들이 헛짓거리를 못 하게 감시하면서 사다리를 지킬 거다. 이 방법의 단점이 뭐인거 같냐?”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까 나도 비슷하게 생각해본 거였으니까.
“저 혼자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래. 에빌로 양이 너 보조는 해 줄거야. 바람 불게 해 주고, 빛 띄워 주고 이 정도겠지. 하지만 그거 말고, 목표 선정, 피해 확인 같은 거는 전부 너 혼자 알아서 해야 해.”
그렇게 말한 형은, 간략히 어떤 사람을 노려야 하는 지 말해주었다.
“첫 발에는 완벽한 타격이 가능할 거다. 가능하다면 지휘자를 노리면 좋겠지. 보면 알 거다. 지휘자란 사람들은 뒷짐지고 뒤에 서 있기를 좋아하니까. 진짜 지휘관이라면 저격에 대해 방비하고 있겠지만, 북대공 성격을 감안하면 이런 습격 자체를 썩 달가워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 그렇다면 그 쪽은 아닐 확률이 있다. 그러니 첫 발은 지휘자를 노려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손가락을 꼽으며 말을 이었다.
“당연히 너도 알겠지만 두 번째로는 조타수를 노려라. 배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니까. 세 번째로는 마법사를 노려야 한다. 아마 우리를 직접 죽이고 싶을 테니 불태우거나 하진 않겠지만 저 쪽의 궁수를 위해 라이트 마법을 걸어주거나 우리의 시야를 어지럽히거나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니까 말야. 네 번째는 궁수다. 이건 너 때문이다. 우리는 톨라츠의 방패를 믿으니까. 특히 너처럼 견시수 위치에 위치한 저격궁수가 있다면 먼저 해결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만약 배가 근접거리에 들어왔고, 갈고리나 널빤지를 든 놈이 있으면 그것부터 먼저 박살내야 한다.”
형은 그리고는 다시 내 양 어깨를 쥐며 말했다.
“궁수는 냉정해야 한다. 한 발이라도 맞으면 전투력이 급감하니까, 맞추는 것보다 맞지 않게 조심해라. 최악의 경우 선상전이 벌어지더라도 말이다. 높이 있다는 건 그만큼 유리한 거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아저씨와 누나가 “준비 끝났습니다.”라며 우리 곁에 와서 섰다. 아저씨는 예의 커다란 방패와, 근접전에 쓸 모양인지 조그만 방패와 메이스를 들고 있었다. 누나는 가벼운 하드 레더를 입고, 손 동작에 방해가 되지 않게 손목에 띠를 둘러 소맷자락을 묶고 있었다. 허리춤에는 묵직해 보이는 단검도 달려 있었다. 저게 전투에 임하는 마법사의 준비구나.
“횃불은?”
“많이 챙겨 놨습니다.”
아저씨는 옆을 가리켰다. 기름먹인 솜뭉치가 달린 횃불이 여남은 개 묶여 있었다.
“그래. 아직 적이 온다고 확정된 건 아니지만 나라면 오늘 올 거다. 내일 밤은 너무 위험부담이 크니까. 몇 명인지도 모르고, 어떤 전력인지도 모르지만, 모두, 살아남자.”
형은 그렇게 말하고는, “가자.” 라고 하면서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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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견시 근무를 서고 있던 견시수를 설득해 내려오게 한 후, 돛대 주변을 빙 둘러싸듯이 자리잡았다. 아저씨는 방패를 고물 쪽, 그러니까 우리가 내려온 북쪽을 향해 세우고 그 뒤에 섰고, 누나는 그 뒤에 앉아서 차분히 캐스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형은 칼을 뽑아든 채 지팡이를 짚듯 서서 이물 쪽을 향해 섰다.
잘 준비를 하던 선원들은 중무장한 우리의 모습에 깜짝 놀라 웅성대기 시작했다. 곧, 선실 안에서 라움 상단주가 뛰쳐나왔다.
“에, 에아임 군! 이게 무슨 짓인가?”
“무슨 짓이라뇨? 경비를 서는 중입니다만.”
유들유들하게 받아치는 에아임 형. 이거 상대를 열받게 만들기 딱 좋은데. 상단주가 큰 소리를 치자, 지하 선실에서 선원들이 여럿 올라오다가, 톨라츠 아저씨의 커다란 방패를 보고 흠칫 놀라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했다. 상단주는 크게 소리쳤다.
“경비면 경비지 이렇게 중무장을 하고 있을 이유가 있나! 선원들이 불안해한단 말일세.”
“대왕님도 그러셨지 않습니까? 준비된 자는 두려움이 없다고. 오히려 우리가 이렇게 단단히 준비하고 있다면, 설령 밤에 야습이 와도 문제없이 지킬 수 있을 테니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겠습니까?”
말인즉슨 맞지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적어도 선실에서 대기하게!”
“그렇게는 안 되겠군요.”
오직 돛대 꼭대기에 올라 있던 나만이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형은 마치 땅에 달라붙듯이 번개같이 달려가, 상단주의 뒤로 돌아가 오금을 걷어찼다. “으윽!” 상단주가 무릎을 꿇자 어느새 형은 칼을 그의 목에 들이댔다.
“이, 이게 무슨 짓인가!”
“조금만 참으십시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안전을 확보할 수단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이익!”
형은 서서히, 원래 있던 자리로 상단주를 끌고 갔다. 형이 감시하는 동안 누나가 허리춤에서 밧줄 – 수사기사가 쓰는 것 답게 두껍고 튼튼해 보였다 – 을 꺼내더니 상단주님을 돛대에 묶고, 손도 묶어 버렸다. 누나의 매듭짓는 솜씨는 내가 본 어느 사람들보다 뛰어났다. 직업적으로 단련되어서 그런가.
“선장님?”
형이 외치자 이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데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선장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배 탄 경험이 많으시오? 예의가 바르시군.”
“만약 제가 상단주가 아니라 선장님을 노렸다면 선원들이 단체로 들고 일어났겠죠.”
“그렇지. 선상반란이나 마찬가지니까.”
에아임 형은 상단주를 윽박지를 때와는 달리 설득하듯 말했다.
“선장님에게는 피해 가지 않게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협박당했다고 하시면 됩니다. 선장님이시니 배를 지키고 싶으실 것 아닙니까.”
“배를 못 모는 건 상관없지만, 나에겐 딸린 식구들이 있소.”
주변의 선원들을 돌아본 선장은 말했다.
“적극적으로 협조는 해 드리기 어렵소. 하지만 이놈들까지 칼밥으로 내 줄 수는 없지. 필요한 걸 말하시오.”
에아임 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라움 상단주는 소리쳤다.
“뭐? 이, 이, 이놈! 무슨 짓이냐! 대공 전하를 배신할 셈이냐!”
“당신만 조용히 한다면 배신이 안 될 것 같은데.”
“뭐라고?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
“상인이 은혜를 말하다니 그거 재미있군요. 에빌로, 재갈 부탁해.”
누나의 허리춤에는 온갖 게 다 달려있는 모양이다. 허리춤에서 가죽으로 된 재갈을 꺼낸 누나는 상단주에게 다가갔다. 상단주는 발악하듯 소리를 치며 고개를 이리저리 저었다. 그러자 형은 피식 웃더니, 들고 있던 칼날을 상단주의 가랑이 위로 가져가 바지춤을 툭 툭 건드렸다.
“손에 힘 빠지기 전에 벌리시죠.”
얌전히 입을 벌리는 상단주. 누나가 솜씨좋게 재갈을 채우자, 갑판 위는 어느새 선원들이 세운 횃불대들로 환해졌다.
============================ 작품 후기 ============================
한조 궁...이 아니고. 기리인과 에아임 일행의 활약은 다음 편에 본격적으로 나올 겁니다.
매일 조회수가 5~600 정도 되는데, 아직 전작에도 못 미치네요. 제목이 구린게 클까요?; 어떻게 하면 좀 더 사람들에게 널리 읽힐 수 있을까요? 그냥 제 글 수준이 거기까지라면야 제가 승복할수밖에 없지만 ㅠㅠㅠㅠㅠㅠ
(리리플)
화이트프레페 님 // 사실 그렇긴 하죠. 그런데 기리인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었을 거에요. 자기까지 살인멸구 당할 수도 있으니까 일단은 살고 나서 봐야죠. 이 챕터 전개를 잘 지켜봐주세요 ㅎㅎ
이문세 님 // 진짜로 그것도 넣고 싶어지는데요 ㅎㅎ 저 배에 겐지를 배치하면... 죄송합니다.;
제르디엘 님 // 전 사실 오버워치를 단 한판도 안 해봤...ㅋㅋ
읽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고 가시면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