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9 3. 갈림길에서는 돌아보라 =========================
“톨라츠, 에빌로! 따라와! 기리인은 만에 하나를 대비해 우리 엄호 부탁한다!”
에아임 형은 어느새 난간을 넘어 저쪽 배로 뛰어들고 있었다. 에아임 형이 무장을 수거하고, 에빌로 누나가 밧줄을 꺼내 저들의 손목을 뒤로 묶고, 톨라츠 아저씨가 그 묶인 놈들을 우리 배를 향해 던졌다. “윽!” “으윽!” 그 놈들이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인정사정 없는, 저 사람이 사제 서품을 받을 날이 머지 않았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그런 손길이었다. 아니, 다쳐도 치유해 줄 수 있기 때문에 그러는 걸까.
나는 화살을 활에 재었지만 시위는 당기지 않은 채, 선실에서 누군가가 습격해오지 않는가 계속 엄호했다. 갑판을 정리한 에아임 형과 톨라츠 아저씨가 윗 선실과 아랫 선실을 훑어보고, 선장으로 추정되는 누군가를 데리고 함께 우리 배로 건너오자, 그제야 나는 화살을 땅에 내려놓으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뭐였을까. 이건 <냉철 94>의 힘일까. 왜 나는 생전 처음으로, 사람이 죽는 것을, 그것도 아주 끔찍하게, 머리가 터지고 가슴이 조각나고 배가 뜯겨 죽는 것을 보고도 지극히 냉정하게 다음 수를 생각했을까. 머리 한 쪽 구석으로는 끔찍한 광경이다, 이런 광경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라고 생각했는데, 욕지기가 일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띠링!’
<메인 퀘스트(2) 클리어>
<지극히 열세인 전력을 활 한 자루로 뒤집어 엎어 스무명이 넘는 습격자들로부터 무사히 살아남았습니다.>
<추가 목표 달성! 습격자 중 5명을 확보하였습니다.>
<보상으로, 당신이 수거하지 못하고 배 밖으로 날아가버린 마수목 화살 다섯 발을 수거해 드렸습니다.>
<연계 퀘스트! 에빌로의 심문을 통해 저들에게서 정보를 캐내세요.>
어느새 내 발치에 마수목 화살 다섯 발이 놓여 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망루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나중에, 에빌로 누나에게 물어봐야지. 누나는 심리를 잘 안다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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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님. 아래 내려가서 선원들을 단속해 주세요. 선원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못 본 겁니다. 아시겠죠?”
내가 화살촉을 풀어 화살촉통에 넣고, 화살대를 갈무리하고, 활을 든 채로 사다리를 내려오자 형은 선장님 앞에서 저런 말을 하고 있었다. 선장님은 그런데, 형이 아니라,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괴물이라도 보는 눈길로 말이다. 선장님은, 나를 보고, 내가 들고 있는 활을 보고, 내 허리춤에 달린 전통을 보고, 다시 나를 보더니, 형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여보인 후 후다닥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럼, 하난 됐고...”
형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내 묶여있던 상단주님의 밧줄을 잘라내었다.
“칼로 자르지 말아요. 밧줄이 맨날 모자란 게 그거 때문이잖아요.”
“애초에 풀지 못하게 매듭을 묶는 게 누군데 그래.”
형과 누나는 이런 만담을 주고 받았다. 상단주님의 표정은 이미 모든 것을 잃은 표정에 가까웠다.
“북대공님의 배가... 북대공님의 병사가...”
“이보세요, 라움 상단주님.”
“아아... 난 망했어...”
찰싹, 찰싹. 형이 가볍게 상단주님의 뺨을 쳤다. 때리는 의미보다는 정신차려라는 의미가 큰 것 같았다.
“상단주님. 정신 차려요.”
“으, 으응?”
아직 멍한 상태의 라움 상단주님. 그러다가, 내 쪽을 돌아보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흐에에에에엑!”
마치 악마라도 보는 듯 기겁을 하고 놀라며, 땅으로 바닥을 밀며 내 쪽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리 떨어지려고 애썼다. 그러더니,
“사, 살려주게! 하자는 대로 다 할테니, 목숨만은 살려주게!”
그러면서 형의 뒤로 후다닥 돌아들어가, 마치 아이가 무서운 개 앞에서 아버지의 다리 뒤에 숨어 오들오들 떨듯, 나를 바라보며 덜덜 떨었다.
입맛이 무지무지 썼다. 나는 형의 얼굴을 보았다. 세 사람에게까지 나를 괴물 같이 보는 표정이 있었다면 내 기분은 정말 더러워졌을 것 같다. 하지만 형의 표정은 씁쓸하다는 감정밖에 없었다.
“기리인, 괜찮니?”
나는 웃어보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런대로 괜찮아요.”
“너는 쉬는 게 좋겠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인 거기도 하고, 너한테는 안 보여주고 싶은 거기도 하고 말이다. 에빌로, 기리인을 방으로 좀 데려가줘.”
에빌로 누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팔을 붙잡고 가볍게 선실 쪽으로 끌었다. 누나의 손길에는 아무런 힘이 없었지만 나는 마치 주인을 따라가는 강아지처럼 아무 반항 없이 누나의 뒤를 따라 상갑판 위 선실, 우리가 쓰던 방으로 들어갔다.
선실에 들어가서 내가 활을 케이스에 챙겨넣고 화살통을 두고, 침낭을 꺼내는 동안 누나는 자기 배낭이 아닌 톨라츠 아저씨의 배낭을 열고 뭔가 뒤지고 있었다. 그러더니 코르크 마개로 닫힌 자그마한 병을 꺼내어서는, 잔에 한두 방울 따르고, 물통을 기울여 물을 더해서는 가볍게 흔들어 섞었다. 누나는 그걸 나에게로 가져왔다.
“뭔가요, 이게?”
“푹 자게 해 주는 약이야.”
나는 그걸 받아들고, 잠시 내려다보았다.
“저, 누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나중에. 지금은 자렴.”
갸날프지만 단호한 목소리는 나에게 저항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나는 물잔을 비운 후, 침낭 안으로 들어갔다. 누나는 내가 침낭 안에 잘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음은 있었던 일을 처리하는 시간이 필요해. 하지만 자는 동안 그 일을 하게 되면 그건 고스란히 꿈으로 나타날 거야. 이 약은 꿈꾸지 않는 깊은 잠을 꾸게 해 주는 약이야.”
그러더니 누나는 내 이마에 손가락을 대고 가볍게 주문을 읊었다. 아. 슬립(sleep) 주문이다. 즉각 내 눈꺼풀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되어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누나는 다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잠들렴. 자고 일어나서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하자꾸나.”
누나도 잘 자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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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나를 막아줄 것이 없는 허허벌판. 그 한가운데 나는 알몸으로 서 있다. 마법도 없고, 활도 없다. 아니, 땅을 내려다보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허허벌판이 아니다. 이 곳에는 아무 것도 없다. 하얀 색만이 가득한 공간. 내가 밟는 바닥은 있지만, 어디서부터가 바닥이고 벽이며 천장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온통 하얀 공간이다.
“여기는...”
나는 입을 열었다가, 생경한 감각에 바로 입을 닫았다. 울림이 없다. 내 목소리가 하얀 공간에 바로 잡아먹히는 그런 느낌. 언제부터 나는 이 공간에 있는 것일까.
“어디지, 라고 마저 말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 완전히 놀라 뒷걸음질쳤다.
나였다. 내가 서 있었다. 알몸은 아니었지만, 완전히 나와 같은 존재였다. 키도, 몸무게도, 가끔씩 거울을 통해 본 얼굴도. 그러고 보니 아까 들려온 목소리도 나와 비슷했다. (완전히 같지는 않다는 건 안다. 마법사로서 내가 듣는 내 목소리와 남이 듣는 내 목소리가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겉모습만 보기에는 나와 완전히 똑같았다. 나는 바보같이 물었다.
“...어디지?”
“시키는 대로 잘 하는군요.”
“너는 누구지? 왜 내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만약 내가 같은 질문을 한다면 뭐라 대답할 겁니까? 어느 쪽이 진짜이고 어느 쪽이 가짜인지 구분할 수 있습니까? 내가 당신이 가짜이고 내가 진짜 나라고 한다면 뭐라고 반박할 겁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야. 말투가 평소와 너무 같잖아. 놀리고 싶으면 그것까지 신경을 썼어야지.”
나는 다시 그 녀석 앞으로 다가가 섰다.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인데, 왜 내 모습을 하고 나타난 거야? ‘시스템’.”
“적당히 속아주는 척을 했으면 좋았을 뻔 했군요.”
쓴웃음을 짓는 내 얼굴과 내 모습을 한 ‘시스템’. 내가 웃으면 저런 모습이겠구나. ...내가 봐도 잘 생겼다.
“여기는 어디인 거야 그럼? 현실에는 없는 공간인가?”
“여기는 당신의 마음 속...이라고 이해하면 좋겠군요.”
놀라야 맞을 것 같은데, 왠지 몰라도 놀랍지가 않다. 그럴 것 같다, 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럼 지금 자는 중인거야?”
“에빌로 양이 준 약은 당신의 의식과 무의식을 떨어트려 놓는 약입니다. 의식이 쉬는 동안, 무의식은 오늘 있었던 일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당신에게 이야기할 것이 약간 있어서 약간 무리수를 뒀습니다.”
“무리수라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무리수는 제가 감당할 문제지 당신에게는 영향이 가지 않을 거니까요.”
‘시스템’은 팔짱을 끼더니 말했다.
“<냉철> 덕에 당신은 당신이 겪은 일을 한 걸음 떨어져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까 당신이 겪은 전투 때 당신이 끔찍하다, 고 생각한 것과 달리 전장의 상황과 다음 행동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덕입니다. 문제는...”
“문제는?”
“모든 사건은 그와 연결된 감정이 있습니다. 그 감정을 겪어내고, 버티는 과정에서 그 사건은 당신의 일부가 됩니다. 그 사건을 떠올릴 때면 그 감정이 떠오르게 되죠. 끔찍한 경험, 전투같은 것 뿐만이 아닙니다. 연애, 거래, 사업, 그 모든 것에서 감정은 사건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 감정을 다스리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 쪽으로 병이 나기도 합니다만.”
그러더니 ‘시스템’은 팔짱을 풀며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냉철>을 얻은 당신은 거기에서 한 걸음 떨어져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일을 처리할 수 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매우 많긴 합니다. 심지어 연애에서도 당신은 강자의 위치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여기에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당신은 자칫 잘못하면 모든 것을 남의 일 보는 것처럼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서였다.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시스템은 약간 밝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감정을 부정하거나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또한 당신의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십시오. <냉철>이 있기에 당신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 작품 후기 ============================
전공 1등이니 전장정리는 빼줘도 무방한거죠.
화이트프레페 님 // 회수는... 이렇게... ^^;; 모스라는 성은 moth를 생각하고 붙인 게 아닌 거인데 그렇게 됐네요 ㅋㅋㅋ
크리스펠로 님 // 이게 현대물이었으면 "캐리 ㅇㅈ?" 이라고 말했지 싶네요 ㅋㅋ
제르디엘 님 // 언제나 감사합니다. 힘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고 가시면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