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4 3. 갈림길에서는 돌아보라 =========================
“자, 그럼 할 일은 정해졌군. 저녁 때까지 이곳저곳에 가서 이야기를 들어 보자. 대략 분담을 할까? 나는 상단 쪽으로 접근해 보려고 해.”
“상단이요?”
“응. 아, 시바낙 문제가 아니고. 나무 문제로.”
“나무면... 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약. 물. 여기에 나무가 왜 연관될까. 잠시 후 나는 입을 열었다.
“두 가지의 과정에 나무가 많이 들어가겠네요. 첫째, 나눠줄 물통. 뚜껑을 닫아서 줘야 할테고, 그걸 쇠로 하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갈테니까요. 둘째, 땔감. 만약 그 물을 제조하는데 불이 많이 들어간다면, 아무리 마법의 불길을 이용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얼마간의 장작이 필요하겠네요.”
“솔직히 너 우리 후배들보다 낫다. 척하면 척이네.”
칭찬을 받았을 때 너무 티나게 좋아하지 마라. 이건 내가 어린 시절부터 숱한 괴롭힘을 거치며 터득한 교훈이었다. 나는 그래서 그저 “에헤헤.” 하고 머리를 긁으며 웃을 따름이었다.
“상단 쪽에, 목재 가공 업자들을 좀 알아보고, 목재를 최근에 많이 사들이는 곳이 있는가 하는 걸 알아보려고 해. 가능하면 업자 행세를 하면서 그 쪽 정보도 캐 보고.”
“저는 신전과 치료소 쪽을 다녀 보겠습니다. 치료 환자들이 뭐라고 한 이야기가 있을테니 그걸 종합해 보죠. 더불어, 신관들이나 치료소 근무하는 후배들이 뭐라고 하는지도 알아 보겠습니다.”
“저는 미틱 마탑에 들러 볼게요. 그 쪽에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볼게요. 마법이 사용되었는지 여부도 알아보구요.”
음. 그럼 나는... 세 사람이 목적을 정해서 깊게 판다면, 나는 그걸 보완해주는 쪽으로 움직이는 게 좋지 않을까.
“도시 구경을 하면서, 몇몇 사람들에게 물어볼게요. ‘치유의 손’에 대해 일반적인 인상이 궁금하기도 하고요, 형들이 특정 직업군들의 반응을 궁금해하시니 저는 보통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알아보려고요. 아, 그리고, 지금 이 사태로 가장 피해를 입었을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어요.”
“누구...?”
“약제상들요.”
아, 하는 표정을 짓는 세 사람. 나는 설명했다.
“아저씨나 형이 아까 그러셨죠? ‘신전에서 돈 내고 치료받는 것보다 싸게 먹힐 거’라고요. 신전이나 신전이 세운 치료소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그 동안 어디 갔을까요. 아마 제가 어릴 적에 그랬던 것처럼 약 사다 먹고 버텼을 거에요. 그 약제상들은 지금 치유의 손 때문에 파리 날리고 있을 거 같은데요. 오다 보니까 약제상이 하나 있던데, 거기부터 가 보려구요.”
형은 나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한다, 기리인. 너무 빤하게 캐묻고 다니거나 하는 실수만 하지 않으면 될 것 같구나. 너라면 알아서 잘 할 것 같다만.”
그러면서 다시 형은 내 머리를 헤집었다. 나는 에헤헤, 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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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에 열쇠와 은화와 동화가 든 지갑만 쩔그렁거리는 채 아무 것도 들지 않고 길을 나섰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낮 시간은 정말 간만이었다. 학교 다닐 때는 학교를 가야 했고, 학교를 졸업하고는 마법 아카데미에 들어가 마법에 재미를 붙였고,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쯤 그 사고들을 겪고 나서는 개인의 무력을 어느 정도 키우기 위해 하루종일 달리기 같은 운동과 활쏘기 연습을 했다. 배를 타고 내려올 때는 아무 것도 하지 않긴 했지만 하루종일 가벼운 물결에 흔들리며 이동하는 것은 그 나름으로 피곤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는, 별 목적 없이 발길 가는 대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아, 발길 가는 대로는 아니다. 아까 큰 길에서 이 여관으로 들어왔던 길을 되짚어 가고 있으니까. 하지만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것을 느끼며 가벼운 셔츠와 바지 차림으로 걷는 길은 상상외로 기분좋았다. 이래서 사람들이 산책을 좋아하는 건가.
파란 문의 빵집을 지나, 교차로가 보이면, 왼쪽으로 꺾어서, 좀 더 나가면... 옳지. 큰 길가에 약제상이 보인다. <포니만 약제상>이라고 쓰인, 초록색으로 문틀과 기둥을 칠한 가게다. 길가에 면한 큰 유리창을 통해 안이 들여다보였다. 온갖 희귀해 보이는 약재와 동식물들이 병에 들어 있거나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으. 조명이 어두침침하고, 불빛이 일렁인다. 웬지 저 안에 들어가면 다른 세계로 넘어가서 다시 못 돌아올 것만 같은 느낌마저 든다. 으으.
뭐, 넘어가면, 넘어가는 거지! 하고 나는 힘차게 문을 열었다. 딸랑딸랑. 종 소리가 들리고, 파란색 머리카락에 동그란 눈을 가진, 하얀 가운 같은 걸 옷 위에 걸친 자그마한 여자가 카운터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어서 오세요~”
느릿느릿, 기운 없는 건 아닌데 묘하게 늘어지는 목소리. 그 큰 눈은 반쯤 감겼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나른한, 졸려하는 분위기의 여자였다. 마치, 잠에서 갓 깨어난 소녀를 보는 느낌. 귀엽다.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세요?”
“아...”
아차. 너무 오래 지켜보고 있었다. 실례를 저지를 뻔 했군. 나는 카운터 쪽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혹시 포션 류 있습니까?”
“힐링 포션같은 만능 포션은 치료소에 가셔야죠~”
짜증내는 것 까지는 아닌데 뭔가 미묘하게 장사에 대한 의지가 없다는 느낌인데...
“그럼 근육통을 줄여 줄 수 있는 약은 없을까요?”
“붙이는 걸로 드릴까요, 먹는 걸로 드릴까요?”
“먹는 걸로 부탁합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쪽 벽면을 차지하던 찬장으로 다가갔다. 키가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자그마하고 동글동글한 인상의 여자였다. 하지만 통통하다는 느낌까지는 아니었다. 가운에 가려졌지만, 가슴과 엉덩이는 빵빵한데 비해 배나 허리가 나왔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나도 참 징하다 싶어서. 얼마나 됐다고 여자 몸매 보고 평판질이냐.
‘띠링!’
<계속 해 보세요. 혹시 압니까. ‘심미안’ 같은 스킬이 생길지.>
닥쳐 좀.
그녀는 찬장 문을 열고는, 의자 하나를 가져와 낑낑대며 손을 뻗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나를 향해 돌아섰다.
“손님, 죄송한데, 손님이 좀 꺼내주시면 안될까요?”
에고. 나는 웃으며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죄송해요, 제가 키가...”라고 웅얼거리듯 말하며 돌아서다가, 의자 위에서 발을 헛디뎠다.
“꺄악!”
이게 무슨 야한 소설에 자주 나오는 장면도 아니고. 나는 넘어지려는 그녀를 어렵지 않게 받아내었다. 근력이 늘어난 게 참 다행이다 싶었다. 내 팔이 그녀의 허리를 붙들었고, 나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땅을 딛게끔 해 주었다. 오. 허리는 생각보다 잘록한걸.
“죄,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으세요?”
“네... 저는 괜찮...”
아까 눈에 어려 있던 졸려하는 것 같은 기색은 사라졌다.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모습은 다른 사람 같았다. 귀엽다.
“그래서 어떤 걸 꺼내면 되나요?”
“맨 위칸에... 오른쪽 상자에...”
나는 계속 그녀를 바라보면 그녀가 너무 민망해 할 것 같아서 얼른 의자에 올라가 그녀가 말한 상자를 보았다. 조그만 통들이 여럿 들어 있었다. 어차피 먹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어서 나는 세 개만 꺼낸 후 다시 상자를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얼마인가요?”
“한개당 2이루그만 주세요.”
진정했는지 목소리 떨리던 것이 없이 침착하게 서 있는 그녀.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동전을 꺼내 지불했다. 내게서 동전을 받아가는 그녀의 손길은 부드러웠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말린 약재들을 천장에 걸어놓은 것들이 보였다. 그 중에 익숙한 게 보였다.
“토이드네요?”
“어? 손님 약재를 좀 아세요?”
갑자기 그녀의 눈이 번쩍 떠졌다. 뭐, 뭐야. 이 여자 왜이리 변화무쌍해.
“사실 저희가 약재들을 모아서 약을 만들어 팔긴 하지만 저희 일을 알아봐 주시는 분은 거의 없고 맨날 약이 잘 안듣는다 왜 이리 비싸냐 이런 얘기들만 듣는데 약재를 알아보시는 분이 정말 오랜만이네요!”
좀 쉼표도 넣어가면서 말씀하시는 게...
“저희가 사실 약재도 맨날 좋은 거 구하려고 노력도 많이 하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좋은 방법으로 좋은 약을 만들까 정말 고민 많이 하고 노력도 많이 하는데 그래서 지금도 아버지가 약재 구하러 북대공령 가셨다가 오셔야 하는데 오시기로 한 날짜보다 며칠 늦어서 지금 엄청 걱정하고 있는데...”
“저, 좀 진정하시면서 말씀하시죠.”
그러니 숨이 가쁘지. 그녀는 핫 하고 정신이 번쩍 난 표정을 짓더니, 아까 내가 넘어지려는 걸 받아줬을 때보다 더 얼굴이 붉어지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죄, 죄송해요... 제가 약 만드는 얘기만 나오면...”
“괜찮습니다. 오히려 약을 정말 열심히 만드신다는 생각이 들어서 믿고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하하, 하고 웃어보이자, 그녀는 여전히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분위기 좋은 거 같으니 좀 물어볼까.
“아버님이 약제사세요?”
“네... 제 자랑 같지만, <포니만 약제사> 하면 이 미틱 시에서 제일 유명한 약제사였어요. 아버지하고 저하고 같이 꾸려가는데, 아버지가 약재 구하러 북부나 중남부 쪽으로 한두달씩 다녀오시면 저 혼자 가게를 봐요.”
“혼자서 이것저것 하려면 힘드시겠어요.”
“전에는 그랬는데, 요즘은 손님이 줄어서 할 만 해요. 할 만한 게 좋은 건 아니지만...”
빙고!
“손님이 줄었어요?”
“손님은 여행자신가봐요? 요즘 미틱 시 분위기를 잘 모르시는구나... 미틱 시는 요새 ‘치유의 손’ 때문에 정신이 없어요. 거기서 나눠주는 치유의 물 마시고 다들 아픈 게 없어졌다고들 난리라... 사람들이 안 아프니 자연스럽게 약제상은 파리나 쫓고 있을 수밖에요.”
“그래요? 그 물 효과 좋나보네?”
살짝 떠 본 말인데, 그녀는, 내 기대대로, 발끈했다.
“그런 게 몸에 좋은 거일 리가 없잖아요. 사람이나 아픈 곳 구분도 안 하고 막 주는 약이 어디 있어요. 솔직히 제가 가게만 비울 수 있으면 그 물 구해다가 어떤 건지 알아내서 정체를 밝히고 싶은데...”
오? 그럼 이렇게 해 볼까?
“그럼, 제가 내일 그 모임에 가게 되면 한 병 구해다 드릴테니까, 어떤 건지 한 번 연구해 보실래요?”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 여자분 진짜 분위기 전환이 빠르네.
“좋아요! 우리 포니만 약제사의 이름을 걸고, 꼭 밝혀 드릴게요.”
‘띠링!’
<메인 퀘스트(2) 업데이트 – 시바낙 커넥션(4)>
<‘치유의 손’에서 나눠주는 물을 받아다가 이 여자분에게 주어 분석을 의뢰하세요.>
<연계 퀘스트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름도 안 물어보고 일 의뢰해도 되는 겁니까?>
윽. 그러게.
============================ 작품 후기 ============================
새 여캐의 등장입니다.
3챕터가 생각보다 길어질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좀 나눠야 하나 하는 고민도 들고요.
어제는 막 조회수가 쭉쭉 올라가서 1000을 넘기더니
어젯밤에는 10에서 못박혀 있기를 한시간을 해서 우울하게 만들다가...
참 이게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네요.
읽어주시는 여러분, 재미있으세요?
(리리플)
화이트프레페 님 // 맨 처음 프롤로그에서 얘기했던 것들을 녹여내려는 일환이랄까요 ㅎㅎ
c ㅏ 님 // 역대급이라뇨^^; 과분한 칭찬 정말 감사합니다. 우울해서 글 쓸 맛이 안 나고 있던 참이었는데 님의 댓글을 보고 많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제르디엘 님 // 언제나 함께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