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6 3. 갈림길에서는 돌아보라 =========================
나는 잠시 당황했는데, 나머지 세 명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톨라츠 아저씨의 배낭에서 자그마한 손가방이 나왔고 – 자그마하다고 하지만 내가 든 종이 크기는 됐다. 아저씨의 배낭이 워낙에 컸으니까. - 에빌로 누나 역시 옆으로 매는 자그마한 손가방 하나를 찾아 맸다.
“기리인. 시간이 없다. 그 종이는 남이 볼 수 있으니 넣어라.”
나는 서둘러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잉크병을 닫았다. 어느새 다들 방을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살인 사건이 났을 때는 현장을 보존하는 게 우선이다. 가만히 두면 귀족가에서 청소를 해 버리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달려가야 해.”
살인이 났다, 는 말을 들은 순간 형은 완전히 변했다. 약간은 빈 곳이 있어보이던 친한 형 같던 사람에서, 냉철한 사고 기계로 변신한 것 같았다. 기계는, 마력만 공급해 주면,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간다. 필요할 때까지 돌아가고, 그 후에 쉰다. 형이 딱 그래 보였다. 필요한 것 이외에 모든 것은 잠시 뒤로 미뤄둔다.
우리는 황급히 1층으로 내려왔다. 형이 아저씨와 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에빌로 양, 톨라츠 씨에게 업히세요. 길은 내가 인도한다. 기리인, 너는 맨 뒤에서 따라와라.”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아저씨는 속보 정도의 속도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아저씨가 황급히 누나를 등에 업고 그 뒤를 따랐고, 내가 맨 뒤에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체력이 조루일 때의 예전 시절이었으면 아마 절대 따라가지 못했을 거다. 지구력을 80까지, 일반인보다 조금 높은 수준으로 올려둬서 참 다행이었다. 형은 계속, 전력질주까지는 아니지만 꽤 빠른 속도로, 골목을 이리저리 꺾어가며 달려가고 있었고, 톨라츠 아저씨는 그 괴력으로 누나를 업고도 별 무리 없이 뒤를 좇고 있었다. 나는 달리기가 힘들다기보다는 길을 잃을까봐 아저씨의 뒤를 좇는데 집중했다.
어느새 광장에 들어서자 저 멀리 불이 밝혀진 미틱 시청이 보였다. 시청이자 시장 관저를 겸한 이 시청은 성 치고는 대단히 괴이하게 생겼다. 보통 성이라면 케이크 모양을 연상한다. 넓은 1충, 그보다 약간 좁은 2층, 이런 식으로, 그리고 여러 목적으로 이용하는 첨탑들까지. 하지만 이 시청은 마치 넓은 2층짜리 건물만 쭉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치 케이크 위에 딸기 하나가 있는 것처럼 불빛이 밝혀진 것이 올려져 있었다. 아마 시장 관저겠지.
보통은 형이 이런 설명들을 미리 해 줬지만, 지금의 형에게는 그런 걸 기대하면 안 될 것 같다. 형은 경비병들이 경호하고 있는 내성의 문 앞에 와서야 달리던 것을 멈추었다. 아주 살짝 숨을 몰아쉬며 형은 말했다.
“제국 2급 수사기사 에아임 로그푸스다. 이 사람들은 내 수행원들이다. 문을 열어라.”
위엄마저 느껴지는 형의 말에 경비병들은 “넷!” 하며 즉각 창을 치우고 문을 열었다. 형을 필두로 하여 우리는 저벅저벅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성은 이미 시끌시끌했다. 뭐랄까. 정돈되지 않은 느낌. 불온한 수군거림이 뒤섞인 듯한 시끌시끌함이었다. 내성의 앞에는 문관으로 보이는,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여럿 서 있었다.
“제국 2급 수사기사 에아임 로그푸스다.”
형은 칼을 뽑아들지도 않았는데 칼을 뽑아든 이상의 위엄을 발휘하고 있었다. 나는 형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형은 이제 자신이 잘 모르는 관료조직을 수족처럼 부려야 한다. 그를 위해 형은 지금부터 위압적인 자세와 높은 관직을 이용해 관료조직을 장악하려고 하는 거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저희 영지에는 수사기사가 없는 상황인데, 이런 큰 일이 생겨서...”
이런저런 하소연을 하려 했던 그를 형은 눈빛으로 제압하며 물었다.
“자네는?”
“네?”
“누구냐고 묻는 거다.”
“아... 저는 미틱 시의 총무관 헨스라고 합니다.”
“자네가 지금 이 곳에서 가장 높은 관료인가? 시장님은?”
“시장님은 지금 주무시다 연락을 받고 내려오실 예정입니다. 그 전까지는 제가 책임자입니다.”
“좋다. 헨스. 신성하신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부여하신 수사 기사의 권위와 권능에 의지하여 명한다. 그대는 명을 받을 준비가 되었는가.”
헨스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대답했다.
“준비되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첫째, 우리를 현장으로 안내해라. 둘째, 현장에는 우리 이외의 어느 누구도 들어오거나, 물건을 건드리지 못하게 해라. 지금 현장의 격리는 되었는가.”
“건드리지 못하게 병사들을 보내어 지켜놨습니다.”
“좋아. 용의자는 어떻게 되어 있나?”
“믿을만한 병사들을 보내어, 독방에 가둔 후 지키고 있습니다.”
“혹시 그 방이 위험하거나 한 것은 아니겠지?”
“저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만...”
형은 즉시 톨라츠 아저씨를 돌아보았다.
“톨라츠. 가서 그 방을 살펴보고, 지시가 있을 때까지 그 방 문 앞을 지켜라.”
“명을 받듭니다.”
톨라츠 아저씨는 정중하게 말한 후, 헨스 씨에게 말해 라움 상단주님이 감금되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늦지 않게 아저씨에게서 아저씨가 들고 있던 가방을 넘겨받은 나와 누나는 형의 옆에 시립하듯 섰고, 형은 우리를 일별한 후 헨스 씨에게 말했다.
“현장은 어디인가?”
“상공담당관실입니다.”
“안내하라. 최초 발견자는 누구인가.”
“서류를 가지고 온 상공부의 하급 관리입니다.”
“현장을 살펴본 후 그 관리를 심문할 것이다. 대기시키도록.”
헨스 씨는 완전히 기세에서 밀려 쩔쩔대며, 그리하겠다는 답변을 남겼다. 우리는 헨스 씨를 따라 1층의 복도를 걸어 어느 문 앞에 이르렀다. 문 앞에는 이미 장창을 든 병사 둘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더니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헨스 씨는 허둥대며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열었다.
방 안에서는 피 냄새와 술의 냄새, 그리고 뭐라 말할 수 없는 묘한 냄새가 뒤섞여 복잡한 냄새가 났다. 넓지 않은 사무실에는 책상과, 테이블과 의자, 온갖 책과 서류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책상에는 서류와 깃털펜, 잉크병, 압지, 팔에 끼는 토시, 안경 등이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었고, 의자 뒤에도 온갖 서류가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에는 머리가 까진 장년의 아저씨 한 명이 쓰러져 있었다. 피를 토한 듯, 얼굴을 바닥으로 하고 쓰러진 그 사람의 입가 주변에는 피가 잔뜩 나와서 테이블 윗면까지 묻어 있었다. 이 사람이 피해자인가. 이미 절명한 듯 얼굴이 새하얗게 된 채 굳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술잔이 엎어져 있었고, 그 건너편에 멀쩡한 술잔 하나가 있었다. 그 곁에는 와인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와인병은 반쯤 차 있는 것 같았다.
“기리인, 장갑을 꺼내줘.”
형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톨라츠 아저씨가 넘겨주었던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여러 도구가 잘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한 쪽에 잘 정리된 갈색의 가죽장갑을 꺼내어 형에게 넘겼다. 형은 그걸 받아 끼면서 “너도 껴라.”라고 말했고, 나는 한 짝 더 있던 장갑을 꼈다. 직접 손이 닿으면 안 되어서 그러는 건가.
“독살인가?”
형은 중얼거리며 와인병을 집어들었다. 손으로 조심스럽게 손부채질을 해서 냄새를 맡더니 형은 말했다.
“냄새로 알 수 있는 독극물은 아니군. 하긴 그런 독극물이라면 공중에서 냄새가 있었겠지.”
그러면서 형은 옆에 굴러다니던 코르크 마개를 들어 와인병을 다시 밀봉하더니, 갑자기 쓰러진 사람의 가까이에 코를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그러더니 형은 에빌로 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몬드 냄새나 시큼한 냄새 같은 건 없지?”
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인체의 구조에 대해 아니?”
“약간은요.”
“사람이 이렇게 피를 토하는 게 어디서 나왔을까?”
“어느 장기에서 나왔을까 하는 거죠? 결국은 호흡기나 소화기 둘 중 한 군데 아니에요?”
“그렇지. 물론 다른데서 출혈이 난 게 나오기도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고려할 곳은 두 군데 뿐이야. 코냐, 입이냐. 그런데 뭐로 보든 이상하단 말야. 기리인, 가방 위쪽 자그마한 주머니에 보면 가는 나무막대 끝에 솜을 감아놓은 게 있다. 몇 개 갖다줘.”
나는 그 막대들을 들고 형에게 다가갔다. 형은 내 손에서 하나씩 막대를 받아들더니, 솜을 그 사람의 코 안에 집어넣어서 슥 닦았다.
“이거 봐, 기리인.”
나는 형의 말대로 솜을 살펴보았다. 콧물 같은 끈적거리는 것이 묻어있긴 했지만 피의 흔적은 없었다.
“아직 피가 말라붙기는 이른 거 같은데, 그럼 코로 나온 건 아니라는 말이네요.”
“그렇지. 그런데 만약 위에서 식도를 거쳐 나왔다면 피에 토사물이 섞여있어야 한단 말이야. 기리인, 토해 본 적 있지?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알겠니?”
“네. 약간 시큼한 냄새가 같이 나야죠. 그럼 이 피는 입을 거치고 나오지 않았다는...?”
“그렇게 보기에는 피 색깔이 어둡지가 않아. 흐음... 에빌로 양. 조금 의심스러운 상황인데, 상사 테스트를 한 번 해 봐야겠어.”
에빌로 누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가방에서 자그마한 나이프를 하나 꺼내어 망자의 손가락 하나를 푹 찔렀다 뺐다. 그 끝에 묻어있던 피를 본 누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가 나무막대 하나를 누나에게 넘겨주자 누나는 테이블 위에 묻은 피를 막대 끝의 솜에 적시더니, 두 피를 접촉시키고는 주문을 외웠다. 펑! 가벼운 폭음과 함께 누나의 두 손이 확 하고 떨어졌다.
“둘은 다른 피에요.”
형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 작품 후기 ============================
중세의 CSI...?!
너무 복잡한 트릭이나 디테일한 것들을 쓰지는 않을 겁니다. 걱정마세요 ^^;;
상사 테스트는 다아시 경 시리즈의 오마쥬입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쿠폰, 코멘트 주고 가시면 더욱 정진해서 열심히 쓰겠습니다.
(리리플) 모두 코멘트 감사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기리인이 귀엽다 귀엽다 하는 걸 보면 그럴지도요? ㅎㅎ;
깡씨앨리스 님 // 자세한 트릭은 조금 더 기다려 주세요 ^^;
c ㅏ 님 // 과연 상단주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