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8 3. 갈림길에서는 돌아보라 =========================
당연한 말이지만 미틱 시에도 자체 경찰력이 있고 해야 하는 업무가 있다. 아까 헨스 씨와 에아임 형의 대화에서 보았듯이 성의 지하는 감옥으로 쓴다. 그리고 감옥 곁에 경비대원들의 사무실이 있었다. 오늘처럼 시의 고위 공무원이 살해당하는 사태가 아니라면, 아마 오늘 사태도 이들이 맡아서 했으리라. 하지만 이들은 오늘 에아임 형의 들러리로 심문실을 내어줘야 하는 운명일 뿐이었다.
이들의 안내를 받아 지하로 내려가는 형을 따라 내려가면서 내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아까 그 컵은 뭘까. ‘이상한 물질’이 발라져 있다고? 그 ‘이상한 물질’은 뭘까? 형에게 이 사실을 얘기해 줘야 할까? 어떻게? 형이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게? 나는 너무 이것저것 떠오르는 머릿속이 짜증나서 머리를 휘휘 휘저었다.
이럴 때는 처음부터 정리해 보는 거다.
1. 라움 상단주는 미틱 시의 상공담당관 – 이름은 도나위라고 했었다 – 을 만나고 있었다.
2. 둘은 와인을 나눠마실 정도로 사이가 괜찮은 편이었다.
3. 와인이나 와인 병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 (나만 아는 일)
4. 와인잔에는 뭔가 묻어 있었다. (나만 아는 일, 그게 뭔지는 모른다.)
5. 둘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아직 모른다.
6. 갑자기 큰 소리와 비명소리가 났다.
7. 옆 방에서 일을 하던, 아까 와인도 갖다줬던(중요!) 상공부 막내 서기관이 놀라 달려왔다.
8. 문을 열어보니 라움 상단주는 새하얗게 질려 있고, 도나위는 이미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9. 막내 서기관의 현명한 조치로 현장이 보존되었고, 헨스 씨가 현장을 지휘했다.
10. 라움 상단주가 에아임 형이 수사기사이며 이 도시에 묵고 있다는 것을 말해왔다. (자신의 결백을 밝혀주기를 바라는 것일까? 형은 언제 상단주에게 자신이 수사기사임을 밝혔을까?)
11. 에아임 형과 에빌로 누나의 조사를 통해 그 피가 도나위의 피가 아니며 누군가가 테이블에 피를 토한 것처럼 깔아놓은 거라는 걸 알았다.
12. 조사를 통해 도나위가 광물독을 주입당한 것을 알았다.
13. 조사를 통해 방 안에서 ‘공기의 흐름을 멈추는’ 마법이 사용된 것을 알았다.
14. 형은 도나위의 얼굴을 보고 도나위가 질식사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15. 그리고 그 방 안에는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투명 마법을 시전한 마법사 한 명이 숨어 있었다.
16. 형은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이 마법사가 다른 곳으로 도망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입구를 지키는 병사를 증원하라는 명을 내려 입구로의 탈출을 봉쇄, 마법사가 뭔가 액션을 취하게 만들었다.
17. 그리고 그걸 쫓아가서 포승줄로 때려서 잡았다.
18. 그래서 이제 그 마법사, 에카프스를 심문할 거다.
뭐 이리 길어 제기랄.
아무튼 정리한 덕에 지금 상황은 알았다. 형은 특별한 상황이 생기지 않는 이상 에카프스라는 마법사를 살인범으로 체포할 거다. 뭐니뭐니해도 마법을 이용해 질식사를 시켰다는 점, 그리고 현장에서 투명화 마법을 쓰고 있던 것이 발각되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까.
그런데 자꾸만 풀리지 않은 의문이 남아있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다. 도나위의 왼쪽 팔에 나있던 광물독의 흔적. 컵에 묻은 ‘이상한 물질’. 테이블에 깔린 피.
그리고 무엇보다, 과연 이 살인 사건은 그냥 살인 사건일까? 형들은 시바낙의 유통 경로를 조사하고 있었다. 미틱 시는 지금 치유의 손이 대유행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부-상단-시바낙과 연계된 라움 상단주가 연계된 사건이 터졌다. 나는 이런 문제에 경험이 조금도 없지만, 말했듯이 나는 한 때 마법을 배우던 사람이다. 마법사로서 나는 조그만 사인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조그만 조짐들만 쫓아다녀서는 안 되지만, 조그만 조짐들을 무시해도 안 되는 법이다. 나중에 형에게 잘 얘기해 봐야겠다.
“어이.”
형이 앞에서 계단을 내려가던 헨스 씨를 부르자 헨스 씨가 공손하게 “말씀하십시오.”라고 했다.
“석궁(crossbow)이 있는가?”
“석궁 말씀입니까? 갑자기 왜...”
형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마법사를 심문하는데 석궁 같은 무기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형이 가볍게 짜증을 내자 헨스 씨의 얼굴빛이 바래지며 “곧 가져오겠습니다!” 라고 하며 앞서 달려갔다. 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지하는 어두운 편이었다. 벽에 횃불들이 유일한 조명이었다. 옛날 얘기를 들을 때 상상했던 ‘지하 감옥’의 이미지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곳이었다. 어둡고, 습하고, 왠지 으슬으슬하고. 그나마 계단에서 가까운 쪽은 사무실로 쓰는 쪽인지 횃불이 많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저 먼 쪽, 횃불이 많이 없는 쪽은 정말 으스스한 느낌이었다. 오래전에 이 안에서 생을 마감한 유령이라도 하나 튀어나오면 어울리겠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간간이 걸린 횃불에 비치는 철창의 금속성 반사광 때문에 더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
나만 이 장소를 생경해하는지, 형들은 아무런 위화감 없이 미틱 시청의 관리들을 따라 걸어갔다. 오른쪽으로 돌자 ‘심문실’이라는 팻말이 적힌 방이 둘 보였고, 왼쪽의 문 앞에는 톨라츠 아저씨가 뒷짐을 지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인기척을 느낀 아저씨가 이 쪽을 돌아보았다. 지루하게 서 있기만 하는 일이 힘들만도 한데, 아저씨의 표정은 여전히 푸근했다.
“오셨습니까.”
“별 일 없어요?”
형의 말투는 다시 평이하게 돌아와 있었다. 이제는 급할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인 걸까?
“네. 5분에 한 번씩 창을 통해 안을 보고 있습니다.”
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리를 안내한 관리를 향해 말했다.
“다른 쪽 방은 비어있겠지? 그 방에 마법사를 감금하라. 입에 묶은 재갈과 손에 묶은 포승을 풀어서는 안 될 것이다.”
“넷!”
형이 뿜어내는 위압감 덕분인지 그들은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형은 그 뒷모습을 보더니, 말했다.
“석궁이 올 때까지는 저 마법사를 심문할 수 없으니, 먼저 상단주의 이야기를 들어봐야겠군. 톨라츠. 미안하지만 문을 좀 더 지켜줘. 상단주도 위험할 가능성이 있거든.”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이자, 형은 나와 누나에게 손짓하더니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어두침침했다. 다소 길쭉한 방을 절반으로 커튼이 가르고 있었다. 우리 쪽의 절반에 라움 상단주님이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에 팔을 괴고 초조한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가,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순식간에 환한 표정을 지었다.
“로그푸스 경!”
“나는 그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없는 자다. 이름을 불러라.”
형은 차갑게 말했다. 가문에서 절연당한 건 아니겠지만, 장남이 아니니 ‘경’을 공식적으로는 사용하지 못한다는 걸까. 그러고 보니 수사기사들은 현직에 있을 때는 대우는 귀족에 준해 받지만 은퇴하고 나면 작위가 없어 고생하는 경우가 있다던가. 형의 차가운 말에 라움 상단주님은 당황했다.
“어, 그, 저, 죄, 죄송합니다, 에, 에아임 경...”
“에아임 님.”
“에, 에아임 님, 가, 감사합니다. 이렇게 와 주셔서...”
“착각하지 마라. 너를 도와주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범죄자에 대한 공정한 판결이 내려지기를 원하시는 지극히 존귀하신 황제 폐하의 명을 실천하기 위하여 온 것이다. 네놈이 죄가 없다면 자연스럽게 나가게 될 터.”
어우. 서릿발이 날리네, 서릿발이 날려. 라움 상단주님의 표정은 우리가 들어온 것을 알기 전의 새하얀 표정으로 돌아갔다. 형은 상단주가 앉은 테이블 앞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누나는 형의 옆 자리에 가서 앉았고, 나는 내가 무슨 역할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입구 가까이에 책상이 하나 있기에 거기 가서 앉아서는, 들고 있던 가방에서 종이와 펜을 꺼냈다. 누나가 내 쪽을 돌아보더니 살풋 웃으며 빛덩어리 하나를 만들어내어 내 책상 위에 있던 촛대 쪽으로 날렸다. 나는 누나에게 감사의 의미로 짧게 눈짓했다.
“라움 상단주. 먼저 당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말해주겠다. 당신은 살인 혐의를 완전히 벗은 것이 아니다.”
“네? 그, 그게 무슨...”
“물론 실제 실행범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아주 의심스러운 장면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현장에는 아직 해명되지 않은 증거들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내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형도 아직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구나.
“먼저 손을 좀 보여주실까. 손을 씻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네, 물론입니다. 그럴 틈이 없어서...”
그러면서 상단주는 두 손을 탁자 위에 펼쳐보였다. 직접 손을 잡고 앞뒤로 돌려보고 팔꿈치까지 걷게 해 보며 살펴보던 형은 말했다.
“기리인, 손에는 묻은 것이 없다고 적어라.”
그러더니 형은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분하게 얘기해봐라.”
에빌로 누나의 팔이 약간 움직였다. 마법을 거는 모양이었다. 저게 그 심문 마법인 걸까. 상단주님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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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도나위 씨와는 안면이 있었습니다. 미틱 시를 올 때마다 거래세를 납부해야 하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 요청을 해야 할 것이 있어서 여러 번 만나다 보니 친해지게 되었죠. 가끔 이렇게 늦은 밤에 만나게 되면 와인을 같이 한 잔씩 하면서 이야기하기도 했었습니다. 도나위 씨가 와인을 좋아하거든요.
그래 오늘도 거래세를 납부할 겸 겸사겸사 와서, 도나위 씨 아래에서 일하는 부하직원이 가져다 준 와인을 마시면서 얘기하고 있었지요. 분위기 좋았습니다. 서로 농담도 하고 아이들 얘기, 마누라 얘기 하면서 웃고 있었는데,
제가 그러다가 도나위 씨 왼팔을 툭 건드렸습니다.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웃다가 보면 가볍게 손바닥으로 툭툭 토닥이는 정도 말입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도나위 씨의 얼굴이 확 변하더니 불같이 화를 내는 겁니다. 어디를 건드리느냐고요.
깜짝 놀라 아무튼 진정하라, 하고 도나위 씨의 앞팔을 잡았지요. 그랬더니 제 손을 홱 뿌리치더니 저를 밀쳤습니다. 제가 우당탕 하고 벽 쪽으로 밀려났지요. 여기, 팔에 보이십니까? 도나위 씨가 저를 밀쳐낼 때 긁힌 자국입니다. 너무 놀라 어쨌든 저 사람을 진정시켜야 다음 얘기가 되겠다 싶어 진정하라고 하고 있는데,
갑자기 도나위 씨가 마치 물에 빠져 죽는 사람처럼, 네, 숨막혀하는 겁니다. 목을 붙잡고 비틀대다가 그대로 탁자 위로 쿵, 하고 쓰러졌지요. 저도 모르게 으악 하고 비명을 질렀더니, 아까 와인을 가져다 줬던 부하직원이 들어와서 현장을 보더니 바로 달려나갔습니다. 그 뒤의 일은 아시는 대로입니다. 네? 탁자 위요? 저는 도나위 씨한테 밀쳐져서 바닥에 주저앉아 있어서 탁자 위는 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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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형은 그렇게 말했다. 에빌로 누나가 형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진술에 거짓된 부분이 없다는 뜻이겠지.
“저, 에아임 님, 죄송한데, 물 한잔만 마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까부터 너무 목이 타서...”
“잠시 기다려라. 지금 상황이 이러니 별 수 없다. 에빌로, 미안하지만 물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누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상단주에게 말했다.
“고개를 들고 입을 벌리세요.”
상단주님이 그렇게 하자, 에빌로 누나는 손가락 하나를 상단주님의 입 위에 두고는 주문을 외웠다.
“물체 창조(create object), 흐르는 물(flowing water).”
곧 누나의 손가락 끝에서 작은 물줄기 하나가 졸졸졸 생겨나 상단주님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상단주님은 정말 목이 말랐는지, 꼴깍 꼴깍 꼴깍 하고 잘 받아마시더니, “하아~” 하고 만족스러운 한숨을 쉬며 입을 훔쳤다.
그러더니 갑자기, “어억!” 하며 목을 붙잡았다.
“뭐, 뭐야! 이봐, 라움, 라움!”
“으그으으허으으극!”
숨막히는 표정을 짓고 있는 라움 상단주. 형은 재빨리 상단주를 바닥에 눕히고, 옷깃을 풀어헤쳤지만, 이미 상단주의 얼굴은 붉다 못해 푸르러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밤 연재는 정상적으로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애초에 주제가 좀 매니악했든지 제목이 안티였든지 아니면 제 글재주가 이정도였든지,
어쨌든 성장세에 한계가 오고 나니 들떴던 머릿속이 차가워지는 느낌입니다.
어쨌든 제가 읽기에도 남들에게 내놓기에도 재미있는 내용 쓰기 위해 더 노력하겠습니다.
그거 말고는 지금은 다른 게 할 게 없으니까요. ^^ㅠㅠ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부탁드립니다. 받으면 글 쓰는데 큰 힘이 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진짜 그게 문제일까요? ㅠㅠ 다 때려치우고 제도로 바로 보내버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