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9 3. 갈림길에서는 돌아보라 =========================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가방을 추스르며 거리를 걸었다.
결국 어제 형은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라움 상단주님은 사망한 도나위처럼 호흡곤란 증세를 겪으며 공기중에서 질식해 죽을 뻔 했다. 누나가 마법 해제를 시도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마법이 아니었던 것이다. 형이 황급히 톨라츠 아저씨를 들어오게 해 치유술을 펼쳐 사망만은 막았지만, 라움 상단주는 의식불명에 빠졌다.
톨라츠 아저씨의 말에 의하면, 약물에 의한 효과는 이미 사라졌고, 신성력에 의한 회복 효과를 받고 있기 때문에 상단주님의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다고 한다. 그럼 언제쯤 일어나겠느냐고 물었더니 아저씨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한 일주일쯤?”이라고 했다. 아저씨의 감을 믿는 형은 상단의 2인자인 오그코 아저씨에게 ‘일주일 후에 출발하면 되겠다’라고 전해주었다.
덕분에 상단은, 그리고 상단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우리는 발이 묶이고 말았다.
“미치겠다...”
조급증이 생길 것만 같았다. 답답해 미치겠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당장이라도 제도로 달려가야 하는데.
지금까지 내가 형을 도왔던 것은, 내가 살아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차피 더 빨리 갈 수 있는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배를 타고 내려가야 하고, 그 과정에서 형을 도울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좋은 거니까. 제국 수사기사라는, 평생 만나보기도 힘든 직종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좋고. 그리고 솔직히 로그푸스 변경백 가, ‘제도의 방패’인 그들의 수장 가문의 아들과 친해진다는 것도 아주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발이 묶여버리니 정말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나도 안다. ‘냉정한 부분’이 해 주는 말이 아니라도 잘 안다. 아저씨는 내가 형을 돕건 돕지 않았건 당했을 거고, 도나위도 내가 돕건 돕지 않았건 죽었을 거고, 치유의 손도 나와 관계없이 유행했을 거다. 나 혼자 말을 달려서 레카 시로 어찌저찌 내려가는 것보다, 일주일 기다려서 상단과 함께 출발하는 것이 훨씬 빠르다. 말은 쉬어야 하지만 배는 내가 자도 계속 흘러가니까.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렇게 내 뜻과 관계없이 이 도시에 처박혀 있자니, 형을 도와 살인사건과 치유의 손에 대해 수사하는 것을 돕는 것이 보람있는 일이 아닌 무슨 탐정놀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형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한 숨도 못 자고 바쁘게 움직이는 형, 누나, 아저씨를 보고 있자니 내 불만은 사소해 보이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나 수사기사 하면서 이런 3중 트릭은 처음이다.”
잠깐 짬이 난 틈에 테이블에 주저앉아 잠시 쉬던 형은 푸념하듯 말했다.
“처음에 피 흘려놓은 거를 보면, 제대로 된 수사기사는 누구나 그 피가 주인의 피인지 확인해 보기 마련이야. 그 피가 그 사람의 피가 아니었다는 걸 아는 순간 마법적 원인에 대한 것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지. 그리고 실제로 공기 고정 마법이 쓰였잖아? 혹시나 해서 돌풍 같은 건가 해서 목 안에를 확인해봤고 말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형의 잔에 차를 더 채워주었다. 형은 다시 차로 입을 축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게 함정이었던 거야. 물을 마시면 발동하는 광물독이었던 거지. 마법사는 2중의 미끼였던 거고. 와. 완전히 당했어. 심지어 증상도 질식하는 증상이랑 똑같이 나타나. 독 냄새도 안 나고. 지금 무슨 독인지 알아보고는 있는데, 아까 내가 말했던 것 기억나 기리인? 광물독은 마시는 게 아니면 양이 충분하지 않아서 독성을 발휘하기 힘들다는 것. 그냥 맹물을 마시는 것으로 그런 증상이 나타난다는 게 가능한 건가? 하아...”
지쳐서일까? 에아임 로그푸스라는 사람을 안 이래 처음으로 형은 지쳐보였다. 평소에 보여주던 든든하고 자신감 있는 리더로서의 모습이 아닌, 자신에 대해 의문을 갖는, 보통 사람의 모습이었다. 안쓰럽고, 도와주고 싶었다.
“형. 아까 가져온 잔이랑 병이랑요.”
“응?”
형은 피곤한 듯 얼굴을 두 손으로 비볐다. 아무리 강철같은 체력과 의지력의 제국 수사기사라도 밤을 새는 건 힘든 건 힘든 거구나. 나도 졸리지만, 그래도 아직은 버틸 만 했다. 아니면 내 <의지력 101> 때문일까.
“어차피 지금 마탑에는 맡길 수 없잖아요? 마법사가 연루되었으니까.”
“그렇긴 하지...”
“그 ‘치유의 손’ 물 한통만 어디서 구할 수 있으면, 그거랑 이거랑 같이 좀 알아봐 달라고 의뢰하면 어떨까 싶어서요.”
물론 내 말도 맞는 말이거니와... 시스템도 그렇게 퀘스트를 줬고 말이지.
<메인 퀘스트(2) - 시바낙 커넥션(4) 업데이트>
<‘치유의 물’과 함께 어젯밤에 확보한 잔과 병을 함께 아르토 씨에게 가져다 주세요.>
<주의! 상대는 영업을 해야 하는 자영업자입니다. 이렇게 시간이 길게 걸리는 분석을 그냥은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네가 어제 알아봤다는 그 약제사한테?”
“네. 그나마 지금 상황에서 약제사 정도가 걸어볼 만한 데 아닐까요? 마탑이 안 되니까.”
형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종이 한 장을 가져오게 해서는 뭐라뭐라 쓰고는 목에서 끈에 걸린 인장을 꺼내 찍었다.
“자. 이걸 가져가라. 공식적으로 수사를 의뢰하는 거다. 나중에 미틱 시청에서 하루 평균 매출에 상당하는 금액을 보상받을 수 있게끔 해 준다고도 했다.”
‘띠링!’
<주의할 점이 해결되었습니다. 에아임 씨의 경험 덕입니다.>
“그럼 형, 다녀올게요.”
형은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피곤한 얼굴에다 대고 형 일을 돕다가 이렇게 됐다고 할 수는 도저히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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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새서인지 머리는 약간 멍하고 배는 고픈지 안 고픈지도 몰랐다. 성을 나서서, 중앙 광장을 이리저리 지나다니는 형형색색의 다양한 옷을 입은 사람들조차 어제보다 다소 빛이 바랜 느낌이었다. 노점상에서 파는 이런저런 먹거리들도 별로 당기지가 않았다.
“자! 오늘 저녁 6시! 해가 질 때에 이 곳 광장에서! 치유의 손 모임이 열립니다! 오셔서 치유의 물도 받아가시고, 좋은 말씀도 듣고 가세요! 몸과 마음이 모두 치유될 수 있는 시간을 경험해 보세요! 치유의 스승들이 직접 나옵니다!”
길거리에서 누군가가 종이를 나눠주며 크게 외치고 있었다. 파란색 로브를 단정하게 입은 그 사람은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사람들에게 꾸벅꾸벅 인사해 가며 종이를 나눠주고 있었다. 워낙 웃는 얼굴인데다가, 지금 인기를 끄는 ‘치유의 손’이다 보니 사람들도 웃으며 그에게 인사하고 종이를 받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치유의 스승들’이라고?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나를 보더니 웃으며 인사했다. 나도 마주 웃으며 인사했고, 그가 주는 종이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 도시에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인데, 오늘 한 번 이 모임에 나와보려고 하는데요.”
“아, 그러세요?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좋은 말씀 많이 듣고 가실 수 있을 거에요!”
그 사람은 정말 환하게 웃어보였다. 뭐랄까, 진짜로 좋아하고 진짜로 감명받아서 스스로 이 행동을 하고 있다는... 어... 그래, 그런 ‘열정’이 느껴졌다. 항상 냉정하기를 덕목으로 삼는 마법사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태도이다. 하물며 <냉철 94>인 나에게는 더더욱 그렇겠지. 나는 그 사람에게 웃어보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꼭 와야 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드네요. 그런데 이 치유의 스승님이라는 분들은 어떤 분들이세요?”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그 사람은 대답했다.
“마음까지 어루만져주시는 좋은 분들이세요! 사실 트리클의 날에 신전에 가서 설교를 들을 때는 그냥 ‘조화와 균형’, ‘선한 행동으로 천칭을 가볍게 하기’ 이런 얘기만 하지, 위로가 되는 얘기는 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이 분들은 실제로 위로가 되는 이야기를 해 주시거든요! 어쩜 그렇게 자기한테 맞는 이야기를 쏙쏙 해 주시는지!”
그러더니 그 사람은 “꼭 오셔야 해요! 있다가 뵐게요!”라고 외치고는,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오늘 저녁 여섯시!”라고 외치며 종이를 나눠주고 있었다. 나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며 종이를 들여다 보았다. 별 다른 내용은 없었다. 모임의 시간과 장소, 그리고 ‘치유의 스승’들 이야기 뿐.
‘띠링!’
<메인 퀘스트(2) - 시바낙 커넥션(5)>
<치유의 손 모임에 참석하세요.>
<왜 이들이 이렇게 넓은 지지를 얻는지 알아보세요.>
<성공 시 연계 퀘스트로 이어집니다.>
안 그래도 가 볼 작정이다. 형들은 자리를 떠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으니 말이다. 나는 냉철해져야 한다고, 조급해하면 안 된다고, 지금 내가 서두른다고 제도에 더 빨리 가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러니 여기에서 충실히 시간을 보내며 형들과 친해지고 또 공을 쌓는 것이 나중에 제도에 도착했을 때 더 유리할 거라고 자신을 타이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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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르토 씨가 보였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동그란 안경까지 썼고 키가 크지 않다 보니 확실히 작고 귀엽다는 인상이었다. ...몇 살이나 되었을까?
‘정보 확인.’
이름 : 아르토 포니만
나이 : 29
HP : 1204/1209
힘 : 65
민첩 : 69
지력 : 91
마나친화력 : 65
매력 : 88
지구력 : 72
특수 : 몰입 87
스킬 : 제약 A0, 약물분석 S>
29?! 요안나 선생님보다 나이가 많다고? 내 또래라고 해도 믿겠는데?! 그리고 약물분석이 S라고? 와... 어쩐지 포니만 약제사라면 누구나 알 거라고 하더니... 그럴만한 근거가 있는 거였구나. 저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럴만 하지.
아르토 씨는 문 소리에 고개를 들고는,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어디서 뵈었던... 분이시죠?”
아 이 사람이. 장난하시나.
“어제 낮에 왔었잖아요.”
“아... 성함이...”
여전히 잘 기억이 안 난다는 듯한 표정. 약간 짜증나거나 언짢아야 정상일 것 같은데, 묘하게도,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어려 보이는 얼굴의 장점인가?
“기리인 모스입니다. 왜, 그 ‘치유의 물’ 분석 얘기를...”
그러자 아르토 씨의 표정이 환해졌다.
“아! 아! 맞아요! 치유의 물 가져다 주시기로 하셨었죠! 죄송해요 제가 사람을 잘 못 알아봐서 사실 단골 손님들한테도 몇 번이나 이름 물어보시는 통에 아예 포기한 분들도 부지기수고...”
또 이분 이러시네. 당황하면 말이 빨라지는 건가?
============================ 작품 후기 ============================
음... 화이트프레페 님 말씀과 c ㅏ 님 말씀 듣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일단 제가 처음 생각했던 건, 이 게임의 제목이 DEPTH이고, 수많은 뎁쓰에 따라 다른 장면을 보여줄 수 있으니, 다양한 게임의 양상을 녹여내면 재미있겠다 - 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챕터에서는 역전재판이나 단간론파, 혹은 여러 어드벤처 게임 같은 탐색과 수사, 그리고 국지전이 어우러진 챕터가 있다면, 다음 챕터에서는 연애 시뮬레이션처럼 알콩달콩한 얘기(그리고 떡씬)가 많이 나오고, 또 다른 챕터에서는 대규모 전투가 나오고... 이렇게 호흡을 길게 가져가면서 제가 구상한 메인 스토리를 풀어내는 게 목표였거든요.
제가 전개를 충분히 흡인력 있게 가져가지 못해서, 에아임 일행이 민폐스럽게 보이고, 주인공이 탐정놀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나 합니다. 본질을 놓치지 않으면서 곁가지를 쳐내고, 좀 더 빨리 본류를 다시 탈 수 있게끔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사실 날짜로 따지면 주인공은 북부 요새에서 출발한지 8일 정도밖에 안 됐다는... ^^;; 이제 상단주 깨어날 때까지는 여기 있어야죠. 사건도 해결하고, 여캐도 공략하고, 로그푸스 가문의 지지도 얻고, 겸사겸사.
읽어주시는 여러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1씩 2씩 올라가는 조회수 보는 재미로 씁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고 가시면 더욱 더욱 열심히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