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3 3. 갈림길에서는 돌아보라 =========================
한 사람만, 흰 로브 위에 빨간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후드를 벗지 않아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 사람이 연단 위에 오르자 나머지 하얀 옷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가만, 이렇게 먼데, 되려나?
‘정보 확인.’
<거리가 멀고 눈을 마주치지 않아 정보 확인에 실패했습니다.>
그럼 그렇지... 그런데 그 때 내 옆 자리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뭔가 하고 보니, 에엑?!
“아르토 씨, 뭐하세요?!”
아르토 씨가 발코니의 난간 사이로 코를 내밀고 엎드리다시피 하고 있었다.
“아, 무슨 향인지 궁금해서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나와 형의 눈빛이 마주치고, 서로 가볍게 고개를 흔들고는, 눈빛으로 합의를 봤다. 건드리지 말죠. 그래.
다시 한 번 공 소리가 크게 울리고, 공을 들고 있던 남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치유의 손’을 영접하러 오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와아-! 마치 달궈진 냄비에 물을 부은 것처럼, 향로를 든 사람들 안의 수많은 관중들이 들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귀가 멍멍할 정도의 환호성이었다. 벌써부터 눈물을 흘리는 몇몇 여자분들도 보였다.
이건 종교적인 법열(法悅)이 아닌가. 나는 톨라츠 아저씨를 돌아보았다. 아저씨는 어느 때보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 ‘치유의 스승’들은, 세상 어디에서도 줄 수 없는 자기만을 위한 치유를 찾아 이렇게 우리의 손을 잡은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와아아-! 한층 더 커진 소리에 이 집이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어우. 도저히 안 되겠어서 나는 양 검지손가락으로 귀를 막았다. 귀가 아프다. 환호가 가라앉을 때쯤, 나는 아까 고개를 아래로 처박고 꼼지락거리던 아르토 씨가 생각나 다시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엎드리다시피 해서 고개를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져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강아지냐.
그 남자는 더욱 목청껏 소리쳤다. 마법적인 도움이 있었던 건지, 그 남자의 소리는 5만 명이 내고 있는 소음 위로 널리 퍼졌다.
“오늘은 특별히, 저희 ‘치유의 스승’들을 인도하시고 가르침을 주신바 있는 대스승께서 여러분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관중들이 완전히 미쳐 날뛰며 환호하기 시작하고, 연단에 선, 빨간 띠를 두른 남자가 손을 들어 답례하는 그 순간.
관중들을 둘러싼, 향로를 들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향로 안에 팍 뿌렸다. 갑자기 향로 안에서 보라색이 섞인 불꽃이 팍 일어나며 확 하고 연기가 치솟았다. 보통의 연기라면 하늘로 날아올라가버렸을 그 연기는, 그러나 바람이 완전히 멎은 이 광장 공간 위로 흘러 깔리기 시작했다. 연단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흘러넘친 연기는, 점차 옅어지지만, 결코 사라지지는 않은 채, 묵직한 구름처럼 5만 명의 관중 위를 뒤덮기 시작했다. 저건 뭐지. 킁킁. 아르토 씨의 냄새맡는 소리가 더 커졌다.
그 때, 빨간 띠의 남자가 들고 있던 손을 조용히 내렸다. 때로는 말 없는 것이 소란스러운 것을 이길 때도 있다. 그 단순한 동작이 5만 명의 정적을 불러왔다. 누군가 이루그 동전 하나만 떨어트려도 모든 이가 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정적이 흐르는 그 공간에서, 빨간 띠의 남자, ‘치유의 대스승’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치유받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면서 그 남자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하얀 옷을 입은 모든 사람들이, 향로를 든 사람들까지도,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모든 관중들이 바쁘게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이느라 잠시 광장에 일대 소란이 빚어졌다.
킁킁거리던 아르토 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맡아봤는데... 보라색 불길... 진한 연기... 한 가지는 아닌 거 같은데...”
빨간 띠를 두른 남자는 조금씩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여러분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누구 하나 우리를 돌봐주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자기들 앞가림하기에 바쁩니다. 누구 하나 우리의 아픔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옳소!”
‘띠링!’
<냉철이 발동합니다. 주변의 상황을 더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시스템의 도움일까. 나는 알 수 있었다. 저 관중들 사이에도 몇몇 사람들이 섞여있다. 저걸... 뭐라고 부르더라.
“바람잡이가 섞여 있군.”
그래, 바람잡이. 바람잡이가 있었다. 그 사람들이 먼저 “옳소!”하고 소리쳤고, 그러자 다시 사람들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우와아!” “옳소!” “맞다 맞아!”
“너무 뜨거워지는군요. 이러다 일 나겠는데요.”
걱정스러운 톨라츠 아저씨의 말투. 아저씨는 어느 때보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시 한 번, 화로를 든 사람들이 화로에 뭔가를 집어넣고, 다시 보라색 불꽃이 팍 일며 연기가 무겁게 깔린다. 갑자기 나는 어떤 생각 하나를 떠올렸다. 혹시.
“에빌로 누나.”
“응, 왜?”
누나의 목소리는 어느때처럼 차분하고 담담했다. 그 동안 어떤 경험을 겪었기에 이 정도의 평온함을 유지하는 걸까.
“지금 광장에 마법이 사용되고 있지 않을까요?”
“마법?”
되물은 것은 누나가 아닌 형이었다.
내가 에아임 로그푸스라는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손꼽히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스스로 제국 수사기사의 2급까지 올라간 엄마 친구 아들같은 사람인데도 권위의식이 없다는 점이다. 윗사람들이 자신의 실수를 지적받았을 때 찌질하게 변하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봤는데, 형은 그런 게 없었다. 지금도 형은 ‘니가 감히’ 같은 감정을 섞지 않고 말하고 있었다. 뭐랄까. 요안나 선생님이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면, 에아임 형은 처음 만나는 ‘이상적인 상사’이자 ‘존경할만한 형’이었다.
“공기의 흐름이 지나칠 정도로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보통 바람이 안 부는 상황과는 다르지 않아요? 바람이 안 불어도 연기는 점점 흩어져야 정상일 것 같은데요.”
형은 누나를 돌아보았고, 누나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며 광장 전체를 관찰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기리인의 관찰이 옳은 것 같아요. 광장 전체의 공기가 장악당해 있어요.”
“마법을 해제하는 건?”
“우리가 역추적당할 가능성이 커요. 이 정도 규모의 마법을 펼친다는 건 꽤 강력한 마법사가 있다는 거니까요.”
형은 손으로 자신의 턱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미틱 마탑의 개입을 입증해 주는 것이거나, 혹은... 그만한 강력한 마법사를 동원할 수 있는 세력이거나, 라는 얘기군... 어느 쪽이든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해 보기는 힘들겠어.”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광장은 손을 가까이 하면 데일 정도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시청도, 신전도 우리를 전부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서 치유의 근원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치유의 스승들이, 여러분이 그 길을 찾게끔 도와줄 것입니다! 믿습니까?”
천둥이 바로 근처에서 터진 것 같은 함성소리가 뒤따랐다.
“믿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눈물마저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 말을 끝으로 붉은 띠를 한 남자는 아무런 마무리 말 없이 단상을 내려가 버렸고, 아까 저 남자를 소개했던, 공(gong)을 든 남자가 다시 앞으로 나와 말했다.
“여러분! 드디어 여러분들이 원하시는 시간, ‘치유의 물’을 나눠드릴 시간입니다!”
“우와아아아아!”
사람들이 연단을 향해 밀고 나오는 것을 무대 앞에 서 있던 흰 옷을 입은 남자들이 막아내고 있었다. 무대 위에 선 남자가 사람들을 잠시 진정시키더니 말했다.
“여러분! 먼저 사과의 말씀부터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 ‘치유의 손’이 오늘 집회까지 온갖 노력을 했음에도 오늘 오신 모든 사람들에게 물을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나, 둘, 셋. 잠시 정적이 지난 후 불만의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터져나왔다. 그 남자는 사람들을 진정시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흥분한 군중은 양날의 검으로 작용할 수도 있죠.”
톨라츠 아저씨의 말이었다. 계속 걱정스럽게 광장을 바라보는 아저씨는, 마치, 여행자의 안전을 빌며 길에 세워둔 토템(totem)처럼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아저씨의 속마음은 어떨까.
간신히 사람들의 불만을 약간 진정시킨 무대 위의 남자는 다시 크게 외쳤다.
“여러분! 저희 치유의 손은 장사치가 아닙니다! 이 ‘치유의 물’을 저희가 돈을 받고 파는 것이 아니라는 것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희는 이 나무통! 나무통을 만들 돈조차 모자라, 나무통을 채 다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저희가 치유의 힘을 불어넣어야 할 이 물도, 자금이 부족해 채우지 못했습니다!”
“결국 금전 요구로 가는군. 톨라츠. 이단심문 대상이 아닌가?”
아저씨는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아직은 아닙니다. ‘이적(異蹟)’이 나오지 않았어요. 이것이 나오지 않는 이상, 사회단체의 강연이라고 우겨버리면 그만입니다.”
극도로 신중한, 아마 이 미틱 시에서 가장 힘이 장사일 이단심문관, 톨라츠 아저씨는 여전히 근심스러운 눈으로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때였다.
“알았어요.”
아직까지 강아지처럼 최대한 아래쪽으로 코를 박으려고 애쓰던 아르토 씨가 땅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 연기는 두 가지의 연기가 결합된 연기에요. 우선 처음 향로에 들어있던 건, 말 그대로 향이 약간 들어간, 티클라두스 나무의 숯이에요.”
형은 고개를 홱 아르토 씨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티클라두스? 그건 집에서도 흔히 쓰는 숯이 아닙니까? 연기가 맵지 않아서...”
아르토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무대 위의 남자의 열변은 그치지 않았다.
“다음 모임이 있을 4일 후! 4일 후에 최대한 많은 ‘치유의 물’을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에게 ‘치유의 물’을 드리기 위해서, 오늘 하루만! 오늘 하루만 ‘치유의 손’에 기부금이 많은 분들부터 차례로 ‘치유의 물’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하루만입니다!”
“보라색이 섞인 불꽃이 나는 약재는 흔하지 않아요. 그 중에서 저 사람들이 쓸 만한 약재라면, 아마, 에아그뉘 나무의 잎을 말린 걸 거에요. 에아그뉘 나무의 잎을 달여 마시면 호흡기를 안정시키지만, 그걸 태워 마시게 되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죠.”
“흥분시킨다고요?”
“네. 에아그뉘 잎의 연기에, 바람잡이에, 아까 그 사람의 연설에... 아마 사람들이 안 넘어가는 게 이상할 거에요.”
그 말 그대로였다. 무대 아래에 있던 사람들은 안내에 따라 차례차례 줄을 서서, 자발적으로, 멀리서 보기에도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를 통 안에 넣고, 물을 받아가고 있었다. ‘치유의 스승’들의 권유에 따라 질서를 지키고는 있지만, 통을 받아가려는 사람들의 손길은 마치 며칠동안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사람의 그것처럼 절박해 보였다.
그 때, 왜였을까. 내 머리는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뭐지. 찜찜한 기분. 나는 그 기분에 따라 시선을 약간 왼쪽으로 옮겼다. 저 멀리에서, 붉은 띠가 둘러진 로브를 입은 남자가,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고 있었다...
“어억...!”
“기리인, 왜 그러죠?”
톨라츠 아저씨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저 멀리를 가리켰다. 내 손가락 방향을 보던 형들 일행은 “아, 저렇게 생겼구나. 무대 뒤라서 안심했나보다.” 이런 얘기들을 주고 받았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평온하게 얘기할 수 없었다.
저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이란 말이다. 알기만 할까. 이야기도 몇 번 나눠봤고 저녁식사 자리에도 두어 번 초대받았지. 그 딸과는 아카데미를 같이 다니기도 했었고.
벌꿀색의 머리카락. 단정한 콧수염. 강인하고 근엄한 표정. 지금 이런 것도 임무의 일환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강철같은 자세의...
“요뢰브... 백작님...”
리미의,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섹스한 여자의, 아버지. 북부군 기사단의 기사단장이며 북부군의 2인자. 그 사람이, '치유의 대스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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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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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트를 많이 받고 싶습니다. 못쓴다 뭘 고쳐야 되겠다 이런 의견이라도 좋으니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