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4 3. 갈림길에서는 돌아보라 =========================
“시바낙(sibannac)은 허리까지 오는 크기의, 진한 녹색을 띠는 풀이에요. 원래는 약으로 썼었어요. 이 식물의 줄기와 잎에서 흘러나와 맺히는 하얀 진액을 쓰면 진통 효과가 크거든요.”
여관으로 돌아와 약간 늦었지만 저녁을 먹은 후, 우리는 어제 그랬듯 형의 방인 301호에 모였다. 편의를 위해, 아르토 씨는 에빌로 누나와 잠시 방을 같이 쓰기로 했다. 무이보스 아줌마는 손님이 늘어났는데 돈이 안 늘어난 것 더하기 아르토 씨에 대한 약간의 불만 때문에 썩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형의 주머니에서 금화가 더 나오자 그 불만은 사라졌다.
출발은 밤에 하기로 했다. 그 때까지 할 일이 없어, 모여서 나갈 채비를 하고 있던 차에, 형이 시바낙에 대해 자세히 알려달라고 아르토 씨에게 말하자 아르토씨가 설명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서 3백년 전쯤에 잠시 반짝 유행한 적이 있어요. 이 시바낙을 우려낸 물을 마시면 당장은 안 아프거든요. 일단 당장 안 아픈것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 너도나도 시바낙을 달인 물을 마셨죠. 그랬는데.”
생각보다, 아르토 씨는 이야기 재주가 있었다.
“그랬는데?”
“그 유행이 꿈인가 싶게, 시바낙의 유행은 몇 년 안가 급격하게 사라졌어요. 거기에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그녀는 손가락을 꼽으며 말을 시작했다.
“첫째로는 재배는 쉽지만 채취가 너무 어려워요. 시바낙의 잎과 줄기에는 벌레를 막기 위한 것 같은 솜털이 빽빽하게 달려 있어요. 이 솜털 때문에 시바낙을 키우는 사람들은 기침병, 피부병 같은 걸 많이 달고들 살죠. 그래서 시바낙의 대량 재배가 어려워져서, 우리같은 약제사들이 다루지 못하게 되었어요. 게다가, 줄기나 잎을 잘라서는 진액을 얻을 수 없고, 반드시 나와서 굳어버린 것만 따야 하는 점도 컸죠.”
형은 조용히, 허리에 차고 있던 롱 소드(long sword)를 꺼내 천으로 닦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베어버릴 것만 같은 날카로움을 유지하고 있는 그 검은 아무리 봐도 보검(寶劍)의 영역에 들어가는 검 같았다. 형이 겉으로 뿜어내고 있는 기세도 그 검에 못지않게 날카로웠다. 아르토 씨가 말을 이었다.
“둘째로는, 시바낙은 중독성이 있어요. 못 끊는 것만이라면야 문제가 없지만, 점점 많은 양을 필요로 하게 돼요. 문제는 그 양이 늘어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환각을 보거나, 감각에 너무 예민해지거나 혹은 그 반대로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하거나, 헤어나오지 못하거나 하는 온갖 부작용이 생기게 되죠. 득보다 실이 많은 약이었던 거에요. 그래서 급격하게 유행하지 않게 되었지요.”
“그 뒤로는 저도 압니다.”
에아임 형이 말을 받았다. 검을 닦는 손은 멈추지 않으며 형은 말을 이었다.
“몇십 년 전, 우연한 계기에 시바낙 진액을 모아 졸여 끓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가루를 약간만 맛보거나 코로 마시는 것만으로 엄청난 쾌락과 환각을 맛보게 되었죠. 특히 이 약을 복용한 상태에서 섹스를 하면 평생 잊을 수 없는 쾌감을 맛보게 된다고 하더군요. 당연히 중독성도 급격히 증가했고요.”
형은 더러운 것을 보는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도 귀족가들 사이에서 그 약이 유행을 타 난교 파티로 번진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당연히 뒤끝이 아주 안 좋았죠. 희대의 스캔들이 되었지만 간신히 약에 관한 소문만은 막아냈습니다. 그 후로 제국 수사기사들 사이에서 시바낙에 관한 첩보는 반역이나 이단의 다음 급으로 치는 중요한 첩보입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르토 씨가 우물쭈물대고 있었다. 눈치챈 건 나만인가.
“아르토 씨, 왜 그러세요?”
“저...”
아르토 씨는 잠시 주저하다가, 우리를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사실 저희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시바낙을 연구하고 계셨어요. 기리인 씨가 아까 낮에 저희 집에서 보셨던 온갖 복잡한 도구들은 사실 시바낙을 연구하기 위해 아버지가 갖춘 도구였어요.”
나는 괜찮다, 신경쓰지 않는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르토 씨는 말을 이었다.
“아버지꼐서 연구하셨던 건 두 가지였어요. 첫째, 시바낙에서 진액을 추출하는 방법이 있을까? 꼭 하얀 진액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그러지 않는 방법이 있을까? 둘째, 시바낙의 중독성을 없애는 방법이 있을까? 환각이나 감각에 작용하는 힘, 중독성을 없애고, 진통 효과만 유의미하게 남길 수 있다면, 아주 강력한 약이 되지 않을까? 신전의 치료나 힐링 포션 같은 비싼 약을 사지 못하는 사람에게 좋지 않을까... 하는 거였지요.”
우리는 잠시 말이 없이, 아르토 씨의 말을 생각해보고 있었다. 아르토 씨는 말을 이었다.
“오랜 기간동안 아버지는 그 연구에 몰두하셨지요. 제 어머니가 견디다 못해 어느날 떠나셨을 때도 아버지는 무척 상심하셨지만 그 연구를 버리지는 못하셨어요. 저는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약제사가 되었고, 포니만 약제상의 후계자가 되었죠. 아버님과는 달리 저는 사람들을 잘 대하지 못해서, 괴짜로 보이게 되었지만... 그래도 저는 아버님을 돕는 것이 즐거웠어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아르토 씨는, 어느새 손을 멈추고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우리 네 명을 확인한 후, 약간 더 수줍어하는 태도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와 일을 나누었어요. 아버지는 중독성을 제거하는 쪽을 연구하셨고, 저는 손쉽게 시바낙의 유효성분을 빼내는 쪽을 알아보기로 했죠. 하지만 이 도시에서 시바낙을 키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아버지는 1년에 두세 차례 약재를 구하러 가시면서 시바낙을 구해 가져오시곤 하셨어요.”
“아버지와 제가 일을 분담한 뒤부터 연구에는 속도가 붙기 시작했어요. 아버지도 곧 안전한 배합법을 발견하기 직전이었고, 저 역시도 시바낙을 추출하는 법을 발견하기 직전이었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시바낙을 대량으로 키우는 곳이 있다는 소문이 있다며 북부로 떠나신 후, 저는 연구의 결실을 얻었어요. 이제 어렵지 않게 시바낙 풀에서 시바낙의 진액만 안정적으로 뽑아낼 수 있게 되었어요.”
“그건... 큰 발견이지만, 동시에 아주 위험한 일이기도 하군요.”
톨라츠 아저씨의 말에 아르토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아마 트리클 신께서는 저희 두 사람을 부녀지간으로 짝지워 주셨나봐요. 아버지의 연구 결과와 제 연구 결과는 반드시 함께 이루어져야 하거든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토 씨의 연구 결과가 없으면, 시바낙 채취는 우리가 강을 통해 내려오면서 봤던 대로 농노들을 동원하는 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아르토 씨 아버지의 연구 결과가 없으면, 기껏 키운 시바낙은 마약이 될 뿐이다. 둘 다 함께 적용되어야지만, 업보도 없고, 부작용도 없는 안전하고 우수한 진통제가 이뤄진다.
“그럼 아르토 씨 생각은, 아버님이 저 사람들 사이에 붙잡혀 있다는 건가요?”
에빌로 누나가 조용히 물었다. 그러자 아르토 씨는 의외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붙잡혀 있는지까지는 모르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죠?”
“저는 아버지가 그 사람들과 자의로 같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해요.”
아버지가 공범일 수도 있다는 말...인가.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사실 아버지는 시청하고 사이가 아주 안 좋으세요. 시바낙을 구해오는 거, 연구 목적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허가를 안 해줘서 아버지는 십 년 넘게 위험한 곡예를 하셔야 했거든요. 그 말고도 사사건건 부딪힌 일도 많았구요... 아마 그 불만을 가진 일 때문에...”
“으음. 미틱 시청에 한 방 먹이고 싶다는 거군요.”
톨라츠 아저씨가 생각에 잠겨들며 한 마디 남겼다. 그 때였다.
“기리인.”
형이 나를 불렀다.
“네, 형.”
“형이랑 뭐 좀 사러 가자. 1층에 다녀올게요. 준비들 하고 계세요.”
그렇게 말하며 형은 내 팔을 잡고 나갔다. 무슨 일일까, 하고 방 밖을 나섰는데, 형은 나를 재빨리 열려있던 내 방쪽으로 당기고는, 문을 닫았다.
“무, 무슨 일이세요, 형?”
“솔직하게 말해라. 다른 사람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인다.”
나는 침착하게 생각했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띠링!’
<냉철이 발동되었습니다.>
<그러나 상대의 간파가 더 높습니다. 냉철이 간파당합니다.>
뭐, 뭐라고?!
형은 차분하게, 마치 그저 내 얘기를 들어보고만 싶다는 듯 말을 꺼냈다.
“아까, 그 사람을 봤을 때 말이야. 니가 어억 하고 놀라는 바람에 나는 니 얼굴을 돌아봤거든. 아마 남들보다 좀 빠르게 돌아봤을 거야. 그런데, 너의 표정은 분명 단순한 감탄이나 놀람이 아니라 경악이었어. 그리고 그 뒤로, 식사 자리나, 아까 방에서도 한 마디가 없었지.”
눈치챘나.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 충격이었기 때문이었다. 전혀 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무(武)만 갈고 닦을 것 같은 사람이, 아슬아슬하게 사이비를 면한 단체의 수장이라니.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너는 그 사람을 알아. 그래서, 그 사람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나타나서 놀란 거야. 내 말이 맞니?”
아무래도, 형에게는 얘기해야겠구나. 여기서 숨겼다가는 당장 형의 신뢰를 잃게 된다.
“형. 사실 거기서 본 사람은, 빨간 띠를 두른 로브를 입고 있던 사람은, 북부군 기사단의 단장, 북대공 전하에게 충성을 바치는 훌륭한 기사인 에반스 요뢰브 님이에요.”
“뭐?!”
형은 간신히 큰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다행이다. 큰 소리 깼으면 나만 작살났을텐데.
“우리가 추적마법을 건 게, 그럼 요뢰브 경이란 말야?”
“네. 그 벌꿀색의 머리와 단정한 같은 빛의 콧수염은 흔하지 않으니까요. 몇 번, 요뢰브 경과 그 따님과 함께 식사를 한 적도 있고요.”
형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점점 일이 커지고 있다는 말 기억하니? 지금 네 말이 맞다면, 우리는 북대공 전하의 의사를 정면으로 훼방놓고 있는 것과 같아, 기리인. 그리고, 북대공이 이런 식으로 자금을 끌어모은다면, 그것은 수사기사가 알아내어야 할 제 1의 죄, 황제 폐하에 대한 반역의 의도일 수도 있어. 자칫 잘못 대처하면 제국 북부군과 제국군이 내전을 벌일 수도 있다는 말이지.”
꼴깍. 마른 침이 넘어갔다.
“나야 북대공 전하랑 친하게 못 지낸다 한들 거리낄 게 없어. 하지만 기리인, 너는 다르잖니? 북대공 전하가 네 은인이잖아.”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형은 내 머뭇거림을 망설임으로 읽었던 듯 말했다.
“네 마음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오늘 밤 일에 동행하지 않아도 좋다. 이미 나에게 많은 정보를 주었으니 내가 처리할 수 있을 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형. 대신 제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세요.”
“뭔데?”
“처음에 형들에게, ‘두 가지를 공존할 수 있는 길이 있는지 찾아봐 달라’고 부탁했었죠.”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침을 한번 더 꿀꺽 삼키고는, 자꾸만 말라가는 입 안을 의식하며, 형에게 말했다.
“그 길에 대해 저 쪽과 얘기해 보고 싶어요. 그러니, 그 사람들을 찾아가는 건 같이 하지만, 가서 제가 요뢰브 백작님과 먼저 이야기를 해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 작품 후기 ============================
아이고. 졸리네요.
역시 일요일 연재가 제일 힘듭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앞 편 뒤쪽에 한 문장 더 추가해 놨습니다. 이젠 누군지 기억하실 거에요 ㅎㅎ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고 가시는 분들께 정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