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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55화 (55/309)

00055 3. 갈림길에서는 돌아보라 =========================

형의 얼굴이 굳었다. 그냥 보통 굳은 표정을 지은 게 아니었다. 마치 홀드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생물이 아닌 무기질적인 얼굴. 바위가루가 떨어질 것만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기리인.”

한참동안 내 얼굴을 바라보던 형은, 마치 내가 어려서 잘 모르는 채로 말했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니?”

하지만 나는 형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린아이가 아니다. 나는 형을 설득시켜야 한다. 형을 설득시키지 못한다면 나는 양쪽으로 갈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네. 알아요.”

“안다고?”

“만약 이게 반역이라면, 북부 대영지의 반역이라면. 제가 그 분을 찾아가서 이야기하는 건 ‘당신들의 정보가 누출되었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거나 다름없는 거지요.”

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덧붙여 말했다.

“그뿐만 아니다. 만약 네가 정확히 마음을 못 정한 상황에서 그 쪽에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나와, 톨라츠, 그리고 에빌로는 모두 죽는 거야. 너는 나한테 그렇게 내 목숨까지 같이 걸으라고 하는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 제가 이기적인 요구를 하고 있다는 거 알아요. 너무 순진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이야기도 감수할게요. 하지만 잠깐만 먼저 제 얘기를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형은 무겁게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옆의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형.”

“응.”

“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고백을 하기에는 좀 어울리지 않는 시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니?”

피식. 서로 가볍게 웃어버렸다. 분위기를 가볍게 하기 위한 농담이라는 걸 서로 알았으니까. 농담이 통했는지 나는 약간은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었다.

“저는 형을 꽤 좋아해요. 제 평생 누군가를 ‘형’이라 부르며 따른 적이 거의 없어서일지도 모르죠. 형의 일을 도우려고 했던 것도, 그 날 배에서 관계가 파탄날 위험을 무릅쓰고 형을 도왔던 것도 그래서일 거에요. 그래서 저는 형을, 이번에도 돕고 싶어요.”

형은 말을 잃고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좀 쑥쓰러워서 손가락으로 구레나룻 부분을 비비 꼬며 말했다.

“사실 제 근거는 별 것 없어요. 제가 인물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북대공 전하나 요뢰브 백작님을 잘 아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제가 걸어보고 싶은 건 세 가지에요. 북대공 전하가 사심을 추구하시는 인물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에반스 요뢰브라는 사람은 자기 자식에게도 공명정대한 인물이었다는 것. 마지막으로 저는 요뢰브 백작님의 딸과 좀 일이 있었고, 그래서 백작님은 저에게 호의를 품고 있었다는 것.”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형은 내 얘기를 곰곰이 들어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기리인, 솔직하게 말하마. 나도 네가 꽤 마음에 든다. 갓 성인이 된 열여덟살 답지 않게 배짱도 있고, 판단력도 좋고, 공포스러운 활 솜씨도 갖고 있지. 무엇보다 너는 내 일을 자기 일처럼 도와주었다. 실제로 네가 없었더라면 나는 이 모든 일들의 진상을 지금처럼 쉽게 알지는 못했을 거야.”

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리고 사실 지금 우리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다. 과연 우리가, 상단주가 깨어날 며칠 후까지 아무런 일을 당하지 않고 여기 있을 수 있을까? 오늘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시청 관리들에게 알려야 했다. 네 말 대로라면 시청 관리들 중 저들과 내통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거야. 그렇다면, 우리의 정보가 그들에게 알려지는 것도 시간문제다. 그리고 저들의 병력은 오늘 우리가 본 것만 해도 2~300명 정도야. 만에 하나, 신전의 지원을 받는다 해도...”

“신전이요? 트리클 신전?”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톨라츠에게 만에 하나를 대비해 이야기해뒀지. 톨라츠가 잠시 다녀온 건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저 사람들을 막아낼 수 없어. 저들은 배에서 우리를 습격했던 어중이 떠중이와는 달라. 기사단장의 지휘를 받는 정규군이 오래 연습을 거친 거다.”

형은 옆의 침대에 털썩 주저앉더니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도망갈 수도, 여기 숨어있을 수도, 싸울 수도 없다. 일이 너무 빨리, 크게 진행되었어.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너에게라도 걸어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긴 하다.”

형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 수사기사가 되어서 이렇게 무기력한 상황에 빠지게 된 건 처음이군... 후우.”

그렇게 한숨을 길게 내쉰 형은, 갑자기, 손을 들어 양 뺨을 찰싹 하고 쳤다. 정신을 차리려는 듯 말이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나에게 뚜벅뚜벅 다가와서는 내 두 어깨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그래, 네 말을 들어줄 거라는 건 알겠다. 그럼 어떻게 설득할 건지 들어볼 수 있을까?”

“그건 말이죠...”

내 아직은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설명에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해 볼 만한 도박이긴 하다. 하지만 너 혼자 보낼 수는 없다.”

형은 내 양 어깨에 올린 손을 으스러트릴 듯 꽉 힘을 주어 잡으며 말했다.

“나도 너와 같이 가겠다. 나와 너, 두 사람이 함께 요뢰브 백작을 만나러 간다는 조건이다. 그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오늘의 모임은 없는 거다.”

---

우리는 아까 광장에서 에빌로 누나가 걸어두었던 추적(tracking) 마법의 자취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말이라도 구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지금 야밤에 말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다행히 거리는 5천 발걸음 안에 있어요.”

에빌로 누나가 말했고, 톨라츠 아저씨는 그 얘기를 듣고 말했다.

“대략 한 시간 반 정도 걸리겠군요.”

그렇게 우리는 그 마법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에빌로 누나의 뒤를 따라, 야경꾼의 소리 말고는 소리도 불빛도 잠들어버린 밤의 도시의 큰 길을 따라, 우리는 동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등에 바크 선생님이 주신 활을 메고, 허리춤에는 전통 두 개를 차고 있었고, 왼쪽 허리춤에는 혹시 모르니 숏 소드(short sword)를 차고 있었다. 숏 소드의 익숙지 않은 무게가 영 걸음걸이를 불편하게 했다.

“기리인, 너 내일 짬내서 꼭 갑옷부터 맞춰라. 내가 불안해서 안 되겠다.”

맨 뒤에서 걸어오던 에아임 형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스스로도 생각하던 바였다. 아무리 내가 궁수라지만 이렇게 맨몸으로 다니자니 너무 불안하다. 빠르게 움직여야 하니 안 되면 가죽 갑옷이라도 챙겨 입어야겠다.

길을 따라 동쪽으로 걸으니 성문이 나타났다. 에아임 형이 에빌로 누나를 보고, 누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형은 나서서 병사들에게 뭐라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곧 병사들은 아무 말 없이 성문에 달린 쪽문을 열어주었고, 우리는 쪽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갔다.

밤에는 반쪽의 달이 걸려 있었다. 아래쪽 절반이었다. 곧 점점 가늘어져 은색의 칼날로 변해, 밤의 자락을 자르고 사라지겠지. 반달이 뜬 밤은 그렇게 어둡지는 않았다. 에빌로 누나의 걸음걸이도 그렇게 빠르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 다섯 명은 조용히 길을 걸어갔다.

그 때였다. 내 옆에 있던 아르토 씨가 조용히 말했다.

“저...”

“네?”

“따라올 수 있게 허락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렇게 조용하게 말하는 아르토 씨는 익숙하지 않은 밤길과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긴장 때문에 약간 떨고 있었다. 나는 아르토 씨가 안쓰러웠다. 갑자기 원하지 않는 모험의 자리에 던져진, 나 같은 신세라는 생각이 약간은 들기도 했다. 나는 아르토 씨의 한 쪽 팔을 가볍게 잡아주었다.

“진정하세요.”

“아... 네... 감사...”

점점 더 기어들어가는 아르토 씨의 말소리. 이거 역효과인가.

“걱정하지 마세요. 아르토 씨는 우리 중 이 쪽 지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잖습니까. 그리고 저 사람들 사이에 관계자가 있을 가능성이 큰 사람이고요. 무엇보다, 만약 독이나 마약에 관련된 사태가 벌어지면 아르토 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르토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씩이나마, 내가 잡아주고 있는 팔 안의 떨림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았다. 아르토 씨는 머뭇머뭇하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기리인 씨는...”

“네.”

“어...”

또 잠시 머뭇머뭇.

“몇 살이에요?”

간신히 ‘네?’라고 대답하기 직전에 내 혀를 잡아챌 수 있었다. 지금 뜬금없이 이건 왜 물어본 거지.

“올해 성년이 되었습니다.”

“네에?”

화들짝 놀라는 아르토 씨. 너무 놀라서 떨리는 것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말도 안 돼... 그럼 나이 차이가...”

“아르토 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시길래요?”

알지만 안 물어볼 수는 없지.

“스... 스물 아홉이에요...”

숙녀의 나이를 묻는 게 얼마나 실례인지는 잘 알지만, 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누나라고 불러도 돼요?”

계속 아르토 씨 아르토 씨 하는게 너무 혀가 꼬이는 것 같단 말이지.

“...그래요...”

“아, 누나도 말 편하게 하세요. 기리인, 뭐뭐 했어, 이렇게요.”

“...”

갑자기 앞뒤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톨라츠 아저씨와 에아임 형이 동시에 휘파람을 분 것이었다. 무슨 신호인가 싶어 긴장하며 고개를 팍 들었더니, 두 사람은 나를 참 대단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 왜요?”

“아니. 너 참 능숙하다, 싶어서.”

“동감입니다.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럽군요.”

“뭐, 뭐가 말이에요?”

“저게 다 얼굴이 먹어주니까 가능한 거겠지?”

“그럴 겁니다. 저야 상관없지만 에아임 씨는 많이 부럽겠는데요?”

이 사람들이. 아르토 누나는 슬그머니 내가 잡고 있던 팔을 빼내어갔다. 명백히 부끄러워하고 있는 누나. 스물아홉 먹은 사람같지 않게, 귀엽다. 정말.

============================ 작품 후기 ============================

좀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이제 3챕터가 클라이막스에 들어갑니다.

확실히 다수의 취향과는 거리가 있는 부분을 연재하니 조회수가 줄어드네요.

그래도 꾸준히 읽어주시는 분들이 있어 아직 실망하기는 이르다고 맘먹었습니다.

그냥 듣보잡 글 중 하나인데도 꾸준히 읽어주시는 여러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코멘트, 선작, 추천 남겨주시면 정말정말 더욱 감사드리며 열심히 쓰겠습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늘 감사합니다. 이러다 리미가 계획과는 달리 비련의 여주인공 이런 거 되는 게 아닌가 하고 조심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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