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7 3. 갈림길에서는 돌아보라 =========================
우리가 서 있던 곳은, 길가에 뜬금없이 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곳이었다. 위치를 어디로 정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우리에게 아르토 누나가 “도시 동쪽 길을 따라가는 거라면 이정표는 여기가 제일 좋아요”라고 말해 준 곳이었다. 아니, 여기밖에 될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전부 농경지인데다 집도 다 비슷비슷해서 이런 거 말고는 어디 위치를 잡을 데가 없었다. 물론 도로 중간중간에 있는 위치석을 쓰는 방법도 있겠지만, 애초부터 이 나무를 그런 목적으로 썼는지 나무 아래에 벤치들이 여럿 있었다.
나와 형은 아르토 누나를 벤치에 앉히고, 마치 누나를 가리듯이 섰다. 무기는 뽑지 않았다. 지금부터 우리는 대화를 할 작정이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오늘 내가 부른 사람이 북부군 중에서도 정예 집단인 북부군 기사단의 단장이라는 걸 잊지 않았다. 검으로 마나를 뿜어낼 수 있는 사람과 대화가 가능한 거리에 접근한 이상, 무기는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였다.
말 두 마리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한 마리는 거대한 흑마, 한 마리는 황갈색의 보통 크기의 승용마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저 흑마를 본 적이 있다. 어디서냐고? 당연히, 저택의 마굿간이었지. 저택을 지나다가 몇 번 봤었지.
흑마를 타고 온 사람은, 훌쩍, 그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다. 철컹. 플레이트 메일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쇳덩어리를 입고 뛰어내린 셈인데 전혀 충격받지 않은 듯 그는 저벅저벅 우리 쪽을 향해 걸어왔다. 황갈색 말을 탄 사람이 황급히 말에서 내려 말을 의자 한 쪽에 매어두기 위해 바삐 말을 끌고가는 동안, 그 남자는 이 말은 도망따위 가지 않는다는 듯 저벅저벅 다가왔다. 나는 괜히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는, 한 걸음 그의 앞으로 나아가, 가볍게 한 쪽 무릎을 꿇었다.
“백작님을 뵙습니다.”
“일어나게, 기리인 군.”
내 기억에 있는 온화한 톤의 목소리. 하지만 그 때보다는 약간은 딱딱해진 목소리. 나는 그 목소리가 지시하는 대로 일어났다. 내 눈 앞에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망토까지 두른, 하지만 검은 뽑지 않고 있는, 에반스 요뢰브 백작님이 서 계셨다. 리미와 같은, 벌꿀색의 머리카락. 리미는 잘 있을까.
“반신반의했는데 정말 자네로군. 오랜만이야. 여행은 어떤가?”
여상스러운 백작님의 말투. 여전히 딸 친구를 대하는 듯한 그 말투. 정신차리자. 나는 지금 백작님과,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대공 전하와 협상을 하러 온 거다. 친구의, 그것도 여자 친구의 아버지를 보러 온 것이 아니다. 시스템, 좀 도와줘.
‘띠링!’
<냉철이 발동됩니다.>
그런데, 퀘스트가 발동할 타이밍인 것 같은데 왜 아직 아무 것도 없지?
<아직 당신은 퀘스트의 조건을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요뢰브 백작과 좀 더 얘기를 해 보세요.>
뭐지.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까? 어쨌든 시스템이 발동시켜 준 냉철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세차게 두근거리던 가슴이 살짝 가라앉았다.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나는 말했다.
“같이 오신 분은...”
“자네가 편지에 쓰지 않았나. 우리와 함께 있던, 케브토 포니만 씨일세.”
비쩍 마른, 머리가 희고 등이 약간 굽은 남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는 나나 형은 안중에도 없고, 우리 둘 사이로 꿰뚫는 시선을 보냈다. 원래는 그저 온화한 할아버지 인상일텐데,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자 상당히 매서운 느낌이었다.
“아르토.”
아르토 누나가, 비척거리며 우리 둘 사이로 나섰다.
“정말 아버지였군요.”
“너라면 알아챌 줄 알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설 줄은,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다.”
“죄송해요...”
왠지 위축된 것 같은 아르토 누나. 그만큼 무서운 아버지인가.
“기리인 군. 같이 온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지 않겠나.”
“네. 먼저 이 숙녀분은 아르토 포니만 씨입니다. 포니만 약제사에서 일하시고, 저 쪽에 계신 케브토 포니만 씨의 따님이십니다.”
아르토 누나는 ‘백작님’이라는 말을 들었는지, 공손하게 손 모아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이 쪽은, 에아임 로그푸스 씨입니다. 말씀드렸던 제국 수사기사입니다.”
‘로그푸스’라는 성을 들은 백작님의 눈은 크게 떠졌다.
“로그푸스 변경백가인가? 가만있자. 현 변경백이신 린베크 로그푸스 님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지 아마... 혹시 그 쪽이?”
“저희 아버님과 면식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제가 불민하게도 그 분의 넷째 아들 됩니다.”
“호오, 그렇군. 이거 이런 상황에 뜻하지 않게도 인맥을 넓히게 되었군. 만나서 반갑소.”
“반갑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치 우호적이지만은 않은 태도를 용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가 할 부탁을 미리 해 주니 오히려 내가 감사할 일인 것 같군.”
너무나 매끄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이것이 귀족가의 사교술인 건가.
‘띠링!’
<당신은 세련된 외교술의 편린을 목격하였습니다. 반복하여 경험을 쌓을 경우 당신의 ‘언변’ 스탯이 발전하며 외교술 항목이 부가항목으로 생성되게 됩니다.>
<외교술의 편린 – 1/3>
으음. 기쁜 일이지만, 지금은 이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여기서 백작님에게, 혹은 형에게 주도권이 넘어가게 되면 내가 원하는 결말은 오지 않을 거다. 나는 지금이 타이밍이다 싶어 나섰다.
“백작님을 여기서 뵙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원래 인생이란 것이 놀람의 연속이지. 나도 이 중부 평야에서, 갑자기 날아들어 천막을 뒤흔든 화살에 우리 가문의 인장이 찍힌 편지가 묶여 있다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는가?”
“그야, 그런 것이라도 없으면 제 말을 믿어주시지 않으셨겠지요. 조용히 나와달라는 제 말을 들어주시지도 않으셨을 거구요.”
백작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일단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어보고자 하는 의도인 것 같았다.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 아까 계속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면 좋을지 고민했던 이야기의 서두를 꺼냈다. 이 이야기는 요뢰브 백작님 뿐만 아니라 형에게도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백작님. 그리고, 형.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정치 같은 것은 잘 모릅니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 어느 쪽을 응당 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 나름의 생각마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한 때 마법사를 지망했었고, 모든 여건이 맞으면 다시 마법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마법사적인 사고방식으로 보려고 하는 면이 있죠. 마법사들은 늘 자기보다 큰 세상, 마나에 안겨 있기 때문에 세상 모든 것에서 한 발짝 떨어져, 모든 것을 관계로만 파악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괴팍한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도 하죠.”
괴팍한 마법사, 라는 말에 형과 백작님의 고개가 모두 끄덕여졌다. 좋아. 일단은 내가 분위기를 쥐고 가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에 미틱 시 주변에서 제가 겪게 된 모든 일은 저에게는 ‘관계의 충돌’이었습니다. 저는 북부 영지에서 나고 자란 사람입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긴 했지만, 제가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은 분명 가짜가 아닌 진짜입니다. 그런 북부의 대공님과 그 충성스러운 가신들이 어떤 일을 펼치고자 한다면, 제가 적극 나서서 도와야 하는 것이 응당 도리일 것입니다.”
형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고, 반대로 백작님의 얼굴이 점차 밝아져갔다. 이 아저씨들 참 단순하네.
“하지만 동시에 저는 제국의 신민이며, 또한 모든 제국의 신민이 그러하듯, 트리클 신을 섬기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트리클 신께서는 늘 당장은 표시가 나지 않아도 악행이든 선행이든 내가 앉아있는 천칭의 반대편 접시에 올라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선을 위해 쓰이는 것이라도 그 과정에서 악행으로 더럽혀지게 되면 그것은 선하다고는 보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밝아졌던 백작님의 표정이 점차 굳어갔고, 형의 혈색은 점차 원상태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거 익숙지 않은 장황한 말을 하려니 영 혀가 꼬이는 느낌이다. 포니만 부녀는 저 어린 녀석이 두 거물을 상대로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하는 호기심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헛기침을 했다.
“이 자리에 굳이, 저 무리들 중 제일 고귀하실 백작님을 초빙한 것, 그리고 이 사태를 가장 우려할 제국 수사기사인 에아임 형님을 초빙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저는 북부인으로서 북부인의, 북대공 전하와 요뢰브 백작님의 선의를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수사기사로서 그 동안 트리클 신의 천칭을 바로잡으며 정의를 실현해 온 형의 선의 또한 믿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흘깃 보고, 다시 나를 보았다. 나는 마른 입술을 혀로 잠시 축인 후 다시 말했다.
“그래서 저는, 제 깜냥이 허락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사태의 가장 중심에 서서 양쪽 이해 관계에 끼인 자로서, 양 쪽의 중재자가 되고자 합니다. 백작님에게는 백작님의, 그리고 백작님 뒤에 서계실 북대공 전하의 정의와 사정이 있으실 것이고, 형에게는 황제 폐하의 지엄한 법과 정의가 있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두 정의가 완전히 평행선을 달린다고는 아직 믿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둘 사이에 끼인 자로서, 오늘 이 자리에서만, 천칭의 축이 되고자 합니다.”
후우. 분수에 맞지 않는 긴 연설을 하고 나자 얼굴이 후끈거리는 느낌이었다. 혹시나 형이나 백작님이 비웃으면 어쩌나, 아마 그러면 나는 다시는 이런 자리에 나설 멘탈이 생기지 않을 거다, 하고 있었는데, 백작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아는 기리인 모스 군이라면 선한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다. 내 딸에게 대하던 너의 눈빛이나 태도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공평한 중재를 부탁한다.”
그러더니 백작님은 나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내가 당황하여 맞인사를 하고 나자, 이번에는 에아임 형이 말했다.
“얌마. 이런 생각이 있었으면 처음부터 얘기를 하지 그랬냐. 괜히 너 양쪽 사이에 껴서 고민하는 줄 알고 걱정했잖아.”
그러더니 형은 씩 웃으며 말했다.
“잘 부탁한다. 너라면, 좋은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거다.”
‘띠링!’
<메인 퀘스트(2) - 시바낙 커넥션(climax!)>
<드디어 시바낙 밭으로부터 출발한 이야기가 절정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당신은 그 중에서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는 가장 어려운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제 퀘스트의 성공과 실패가 나뉘는 순간입니다.>
<퀘스트 성공 조건>
<1. 북부 영지와 제국 양쪽이 모두 만족하는 해결책을 이끌어 내세요.>
<2.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의 무력 충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3. 1, 2를 통해 ‘치유의 손’의 철수를 이끌어내세요.>
<퀘스트 보상 : 금화 100드로그 / 보너스 능력치 5 / 능력치 부여 기회 / 그 외, 북부 영지와 로그푸스 가문, 제국 수사기사단 등으로부터의 보상이 추가로 주어집니다>
우, 우와. 갑자기 너무 큰 기회, 즉, 너무 큰 위기가 닥친 것 같은데.
‘띠링!’
<메인 퀘스트(2) - 서브 퀘스트 : 대화가 필요해>
<포니만 부녀는 이번 사태의 핵심적인 인물들입니다.>
<포니만 부녀를 화해시키는 것이 메인 퀘스트의 성패에 직결될 것입니다.>
<퀘스트 보상 : 보너스 능력치 2 / 포니만 부녀로부터 추가적인 보상이 주어집니다.>
좋아. 이 정도로 퍼준다는데, 여기서 실패하면 나는 고작 그 정도의 인물일 뿐이다. 내 지능과 언변, 냉철을 모두 쏟아부어서라도 이 일을 꼭 성공시키고야 말겠어.
============================ 작품 후기 ============================
결국 약간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지능과 언변을 몰아준 캐릭터는 어떻게 대처할까? 하고 하루종일 생각해봤는데...
지금 기리인처럼 '말로 때우려 든다!'가 답이 아닐까 싶습니다 ^^;
이제 세 치 혀로, 3챕터를 정리하고, 두 집단간 갈등을 조절해야 합니다.
과연 기리인이, 아니 제가 그걸 잘 쓸 수 있을까요?;; 많이 응원 부탁드립니다 ㅠㅠ
읽어주시는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고 가시면 더욱 감사히 더욱 열심히 쓰겠습니다.
(리리플)
화이트프레페 님 // 다음 챕터에는 꼭 동나이대의 여캐를 등장시켜야겠군요;;; 기리인 나이에 연하를 만나서 '씬'이 나오면 그건 범죄인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