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1 3. 갈림길에서는 돌아보라 =========================
“흥흥~ 흥흥흥~”
나는 되도 않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배낭에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일이면 이 도시를 떠난다. 계산해 봤더니 고작 5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동안 온갖 일에 휘말린 나머지 한 50일은 된 것 같은데 말이다. 어쨌든, 내일이면 다시 제도로 떠날 수 있다. 그러니 콧노래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
내일 우리가 타고 가기로 한 배는 쾌속 여객선이다. 배의 좌우에 수차(水車)가 달려 있고, 이 수차를 인력이 아닌 마력석 동력으로 돌리는 배라고 들었다. 당연히 크기도 어마어마하게 커서 우리가 타고 왔던 배의 두 배 정도 되고, 속도도 두 배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우리 북부 니아트 호수에서 미틱 시 까지의 거리와, 미틱 시에서 다음 기착지인 레카 시 까지의 거리가 비슷함에도, 레카 시 까지는 3일이면 도착한다고 한다.
이게 다, 빡친 에아임 형이 미틱 시장을 달달 볶은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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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무서웠어. 나 에아임씨와 다니는 게 몇 년쯤 됐는데, 그 몇 년 동안 한두번 밖에 보지 못한 모습이었어.”
그 날, 내가 형과 요뢰브 백작님 사이에 중재자 역할을 했던 그 날, 형은 돌아오자마자 신전에서 톨라츠 아저씨와 에빌로 누나를 데려나와서는, 나를 보고 ‘아르토 양을 집으로 데려다드려라’고 말하고는 곧바로 누구 한 명 걸리기만 해 봐라 라는 기세로 시청 쪽으로 멀어졌다. 지금 얘기하는 에빌로 누나의 얘기를 듣자하니 형은 시청을 완전히 뒤집어 엎은 모양이다.
“왜 그랬을까요?”
“왜 그랬긴? 범죄자 옹호 정도도 아니고 시장이 수하를 부려 범죄를 저지르고 그걸 은폐하려 든 거잖아. 와중에 우리 수사 기사의 눈을 가리려 들었고. 분노해야 마땅한 상황이지. 그리고, 이건 내 추측인데...”
“네?”
“기리인 너보다 늦게 알아챈 게 분한가봐.”
나는 왠지 멋쩍어져 손가락으로 볼을 긁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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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시장을 압박하는 한편, 사망한 상공담당관 도나위 씨와 우리 라움 상단주에게 와인을 가져다주며 독극물을 투여한 상공부 직원과, 당시 현장에서 은신 마법을 쓰고 있다가 잡힌 마법사를 취조했다. 아쉽게도 상공부 직원이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아 누가 그에게 ‘까마귀 머리’의 독 등을 가져다 주었는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뻔한 일이었기에 시장은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톨라츠 아저씨와 에빌로 누나를 여관에서 가끔씩 볼 수 있었던데 비해, 형은 거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형은 오늘 수사를 마무리하고, 상공부 직원과 마법사를 융파트 시로 보내 공작이 직접 처리하게 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 정식으로 서류작업을 하느라 형은 눈코뜰 새 없이 바빴다.
“어느 수사기사가 서류에 깔려 죽었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서류작업은 기사들의 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게 싫어서 상급 수사기사로 진급하지 않는다는 하급 수사기사들도 있으니까요.”
톨라츠 아저씨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런 톨라츠 아저씨도 이 지역 신전을 돌보고, ‘치유의 손’ 때문에 뒤숭숭한 분위기를 바로잡기 위해 눈코뜰 새 없이 바쁘게 다니고 있었다. 누나는 심문 때문에 형에게 자주 불려가고는 했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레 할 일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책을 보거나 명상을 통해 활 수련을 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여관에 한 사람은 있는 편이 좋았기 때문에 여관을 지키고 있다가, 정 심심해 미칠 것 같으면 포니만 약제상에 가곤 했다.
포니만 약제상은 가게를 정리하느라 바빴다. 요뢰브 백작님의 스카웃 제의를 받아들인 두 부녀는, 케브토 아저씨가 필수적인 것들을 먼저 꾸려서 떠나고, 아르토 누나가 집을 마저 정리해서 한 달쯤 후에 뒤따라갈 거라고 했다. 심심했던 나는 가서 짐 꾸리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
케브토 아저씨는, 그 귀한 마수의 심장을 아무런 댓가 없이 자신에게 내어준 나를 일종의 은인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르토 누나는... 모르겠다. 누나는 요즘 나를 보면 시선을 피하기 바빠서, 단편적인 말 말고는 얘기를 제대로 한 적이 없다. 왜 그러지. 그때 매달렸던 게 부끄러운가.
어쨌든, 오늘은 아저씨와 누나에게 가지 못한다고 말을 해 뒀다. 오후에 내일 출발을 위해 짐을 꾸리기로 했기 때문이다. 짐도 짐이지만, 이번 미틱 시에서의 사건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이 무엇인지 한 번 정리하고 싶었다.
나는 배낭을 열고 그 안에 들어 있던 금화 꾸러미를 바라보았다. 시스템은 고지식하게도, 어음이나 교환권 같은 게 아닌 진짜 드로그 금화 100닢을 50닢씩 두 꾸러미로 꿰어 배낭 안에 넣어두었다. 그래서 내 배낭은 마수의 심장이 들어있던 상자가 빠졌음에도 무게도 부피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다행히 아직 동전도 있고, 당장 크게 돈이 들어갈 일이 없어 금화 100닢은 대공 전하께서 출발 때 라루트 님을 통해 주신 60닢과 함께 배낭 제일 깊숙한 곳에 집어넣었다.
그 다음은 편지다. 구겨지지 않게 잘 넣어둔 편지를 나는 다시 꺼내들었다. 이 편지를 어제 받은 일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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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이었다. 형들을 기다리다가 먼저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인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형인가, 하고 문을 열었더니,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체구가 작은 남자는 위턱이 돌출해서인지 전체적으로 쥐의 인상을 하고 있었다.
“기리인 모스?”
“그렇습니다만?”
내 이름을 아는 이가 누구지, 하고 언제든 뒤로 뛸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남자는 옆에서 뭔가 무거운 것이 든 상자를 끌어오더니 방 안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는 품 안에서 편지를 한 장 꺼내 그 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말했다.
“백작님께서 보내셨다.”
“백작님께서...?”
“자세한 건 여기 적혀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아무런 인사도 없이 조용히 발을 돌려 떠났다. 그제야 나는 그 남자가 계단을 올라왔을 게 뻔한데 계단이나 나무 복도를 디디는 삐걱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잠시 으스스함을 느꼈다. 저 남자가 나를 죽이려 들었으면 크게 당했겠는데.
뭐, 암튼 그건 그거고. 대체 뭘 보내신 걸까, 하고 그 남자가 밀어 넣고 간 상자를 방 한가운데로 끌고 왔다. 무겁다면 무겁고 가볍다면 가벼운 상자. 나는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회색의 갑옷이 놓여 있었다. 전신 갑옷이 아니라, 상체만 가려주는 플레이트 메일이었다. 회색의 갑옷 위에는 무지개색의 광택이 맴돌고 있었다. 뭐? 무지개색? 설마...
‘정보 확인.’
<물품 정보>
<브레스트 아머 – 아티팩트. 랭크 : A+>
<합금 정보 : 미스릴 50%, 철 40%, 코크스 및 마법 재료 10%>
<정보 : 북대공가에 가보 중 하나로 내려오는, 가벼운 움직임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갑옷입니다. 미스릴 비율이 높아 매우 가벼우면서도 단단하며, 마나를 사용하는 사람의 경우 체외 마나 흐름의 속도를 높여주는 기능도 있습니다.>
<크기 분석 결과 당신의 체형이라면 잘 맞을 것 같습니다.>
뭐... 안 그래도 갑옷이 필요해서, 내일 한 번 가보려고 했던 참인데 어떻게 이런 귀한 걸... 그때 나는 옆에 침대 위에 던져뒀던 편지를 꺼냈다. 밀랍으로 봉인된 편지에는 대공가가 아닌 백작가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나는 봉인을 뜯고 편지를 꺼내 펼쳤다.
[기리인 모스 군 보게.
대공 전하께 있었던 일을 모두 말씀드렸네. 대공 전하께서는 매우 기뻐하셨다네. 자네에게 북부의 사람들이 두 번이나 구원받았다며, 적절한 보답을 하지 않으면 트리클 신의 천칭이 당신께 불리하게 기울어질 거라면서, 내게 자네에게 무엇이 있으면 좋을지 생각해보게 하셨네. 그 때 자네가 갑옷을 입고 있지 않던 생각이 나는군. 그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이 갑옷을 내오게 하셨다네. 내가 보기에도 엄청난 물건인 것 같군. 쉽게 말해, 이 갑옷은 대공 전하의 그대에 대한 선물이네. 부담 갖지 말고 사용하고 다니게.
더불어 내 개인적으로 감사를 전하고 싶네. 자네 덕택에 임무를 실패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공 전하의 큰 치하를 받을 수 있었다네. 자네가 고향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 곳 북부 대요새가 마음에 들고, 여기 사는 사람들이 마음에 드네. 그 사람들을 지켜준 자네의 공적에 대해 감사를 표하네.
그 보답이라기는 뭐하지만, 제도에 가면 노니유크라는 사람을 찾아보게. 황궁 수비대원으로 근무하고 있을 거야. 그 사람에게 에반스 요뢰브가 안부 전했다고 하고, 이 편지를 보여주게. 그 사람에게서 도움 받을 일이 반드시 있을걸세.
자네의 여행이 합당한 결실을 맺기를 기원하네.
에반스 요뢰브
추신. 자크가 안부 전해달라고 하는군.
추신의 추신. 어렵지 않다면, 간혹 리미에게 서신 좀 보내줄 수 있을까?]
나는 편지를 내려놓고 갑옷을 입었다. 갑옷은 어깨 위 승모근 부위에 경첩이 달려 있고, 옆구리 부위에 채움쇠가 있는 구조였다. 채움쇠를 열고 옷을 입듯 갑옷을 머리 위에서 쓴 후, 채움쇠를 채웠다.
우와. 아티팩트로 불리는 이유가 있다.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갑옷을 입고 여러 동작을 해 보았다. 아침에 하는 팔굽혀펴기 등의 동작도 해 보고, 제자리 뛰기도 해 보고, 마지막으로 활을 쏘는 동작을 해 보았다. 갑옷은 그 모든 동작에 전혀 부담이 되지 않았다. 약간의 여유가 있어 상체를 구부리는 동작도 어느 정도는 가능했다.
“이런 보물을...”
‘띠링!’
<메인 퀘스트(2) 시바낙 커넥션의, 북대공으로부터의 클리어 보상을 수령하였습니다.>
<메인 퀘스트(2) 시바낙 커넥션의, 요뢰브 백작으로부터의 클리어 보상을 수령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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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어제의 일이었다. 나는 편지를 접어 봉투 안에 되돌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대공 전하의 의도가 뭔지 알 것 같아서였다. 나에게 마음의 부채를 지워, 언젠가 북부로 돌아오게끔 하고 싶으신 거겠지. 적어도 그 확률이라도 높여 놓으려고. 나에게는 너무 머나먼 미래의 일인데, 그것까지 생각하고 움직이는 대공 전하의 호의가 나는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안 입을 건 아니지만.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뭐 안 되면 고향에 대공 전하가 돌아가시고 나서 가면 되지. 나는 단순히 생각하기로 하고, 짐들을 정리해 다시 배낭에 잘 넣고, 갑옷은 침대 아래의 활과 화살통이 들어있는 공간에 밀어넣었다.
그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똑 보다는 콩콩, 에 가까운 가벼운 소리였다. 누구지?
"누구세요?"
"기리인... 들어가도 되니?"
방문 앞에서 문을 두드린 사람은 다름아닌 아르토 누나였다.
============================ 작품 후기 ============================
많은 분들이 예상하셨겠지만 내일 정오에는 아르토와의 씬이 나올 예정입니다.
선생님 만나기 전까지 당분간 연상 히로인은 나오기 힘들지 않나 생각합니다 ㅎㅎ;
그래도... 한 챕터에 한 명씩은 공략하고 가는 게...
아, 오늘 1편에 subbidese 님께서 "맨날 허리만 돌리는 '천재'라는 멍청한 바보 주인공에 질린 분들에게 추천합니다"라고 써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이 글을 쓸 때 꼭 듣고 싶었던 말이었습니다. 글 쓰는 보람을 느낄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60편에 코멘 달아주신 화이트프레페 님 감사합니다. 머리가 터질 때까지 열심히 머리 굴려 보겠습니다 ^^;;;
듣보잡 취향타는 소설 읽어주시는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고 가시면 더욱 감사히 더욱 열심히 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