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64화 (64/309)

00064 3. 갈림길에서는 돌아보라 =========================

두 번의 정사 후 스르륵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깨어났을 때 바깥은 이미 한밤중이었다. 누나는 어느 새 돌아간 후였다. 서랍장 위에는 편지지 한 장이 곱게 접힌 채 놓여 있었다. 누나가 남기고 간 거겠지. 약간 쓸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것도 누나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웃으며 일어나, 벽에 걸린 초에 촛불을 붙였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기리인, 자냐?”

“어, 형. 아뇨. 들어오세요.”

들어온 형은 잠시 코를 찡그렸다.

“너 무슨 향수 뿌렸냐?”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에요 형.”

“어우. 이 향 뭐야. 환기좀 해라 임마. 사내놈 방에 꾸리꾸리한 냄새 안 나는 건 좋은데 향이 너무 독하잖아.”

다행이다. 누나가 나가면서 환기에 신경쓴 모양이다. 아마, 검은 병에 들었던 약을 조금 뿌렸겠지. 시트에 묻은 건 쉽게 지워지지 않으니까... 잠깐, 시트? ...하지만 형 앞에서 이걸 확인할 수는 없다.

“일은 정리 다 되셨어요? 내일 출발하는데 형 짐도 못 꾸린 건 아니에요?”

“뭐, 짐이야 대충 배 탈 정도로만 해 놓고 거기서 다시 꾸리면 되지. 그보다, 어때, 한 잔 안 할래? 아줌마한테 안주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기껏 미틱 시에 왔는데, 술 한잔도 못하고 떠나면 아쉽잖아? 그동안 밀린 얘기도 좀 하고.”

나쁘지 않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웃으며 말했다.

“역시. 너도 그 체격을 하고 술 싫어한다면 말이 안 되지. 내 방으로 와. 아저씨하고 에빌로도 같이 오기로 했다. 10분 있다가 와.”

“네, 형.”

형은 별 말 없이 방을 나섰다. 못 봤을까? 못 봤었으면 좋겠다. 나는 다른 촛대에 불을 붙이고 방을 살폈다.

침대 밑을 먼저 살펴본 건 내가 아직 완전히 사람을 못 믿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순진했었다는 걸 인정하는 걸까? 다행히 갑옷과 활, 화살은 그대로 있었다. 혹시나 해서 상자를 꺼내어 내용물까지 확인했지만 그대로였다.

그제야 나는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걷고 시트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아까 누나의 피와 우리 두 사람의 체액이 묻어있던 부분의 시트가 네모낳게 도려내어져 있었다. 아줌마한테 시트 값 물어줘야겠네, 하고 생각하며, 나는 서랍장으로 다가가, 편지를 살폈다.

접어진 편지지 아래에 도려내어진 시트가 곱게 접혀서 놓여있었다. 나는 누가 볼세라 접힌 시트를 배낭의 안쪽에 잘 집어넣은 후, 편지지를 펼쳤다.

[기리인.

지금 보니 너는 코까지 골며 깊이 잠들었네. 여자보다 남자가 섹스가 더 힘들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 걸까? 나는 잠든 척 했지만 가슴이 두근거려서 잠이 안 왔는데 말야.

깨워서 인사하지 못하는 걸 용서해 줘. 니가 나를 보며 누나 누나 하면서 천진난만하게 웃는 걸 볼 때마다 내 심장은 잠깐씩 일하는 걸 잊어버리곤 했었어. 지금 니 자는 얼굴 보고도 그래. 그런데 니가 깨어나서 “누나” 하면서 나를 안아주면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니 옆에 있으려고 그럴지도 몰라.

그래도, 기리인에게 잊지 못할 추억 하나를 남기고, 그 추억 하나를 가져간 걸로 만족할래. 설령 북부에 가서 다른 남자를 만나더라도 말야. 니가 ‘누나 누나’하면서 나를 부르던 그 모습을 떠올리면 다른 건 잊어버려도 될 것 같으니까. 그러니 너도 우리가 함께한 순간의 추억을 잘 간직해 줘.

여행길의 평안과, 여행길 끝에서의 목적의 성취가 함께 하길. 나중에 언젠가 인생의 길이 겹치면 그 때 웃으면서 인사하자. 그때도 나를 지금과 같은 미소로 대해주며 “누나”라고 밝게 불러줬으면 좋겠어.

그럼, 안녕.   - 아르토 누나가.]

그 아래, 뭐라고 한 줄이 더 적혀 있었다.

[추신. 춘약 얘기는 거짓말이야. 그런 약은 위험해서 만들지도 않고, 애초에 사람에게 그런 기능을 하는 처방은 없어. 그저, 네가 오해하도록 사향 향이 나는 액체를 가져왔을 뿐.]

뭐라고?! 그럼... 얼굴 빨개진 것도, 쉽게 흥분한 것도, 춘약하고는 전혀 상관 없이 그냥 벌어진 거라는 말야? 누나는 그냥 나랑 하고 싶은 핑계가 필요했던 거고?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 귀여운 얼굴로 그런 계획을 짜다니.

나는 눈을 감고, 잠시 누나의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얼굴과 파란색 머리카락, 생각보다 큰 가슴과 탄탄한 다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빌었다. 누나, 고마워요. 잘 지내요. 나중에 꼭 만나요. 그때도 ‘누나’라고 부를게요.

---

“얼마나 마신 거야 그래?”

“맥주 배럴 하나, 위스키 배럴 하나...”

무이고스 아줌마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식당 테이블에 둘러앉은 우리 넷의 몰골을 바라보았다. 다들 눈 아래 검은 초승달이 반달이 될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었고, 머리는 새집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여자인 에빌로 누나 마저도 미처 빗지 못한 머리를 부스스하게 한 채 그냥 뒤로 묶고만 있었다. 땀에서도 술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당분간은 술도 쳐다보기도 싫을 것만 같다.

“아줌마, 해장할 거 뭐 대충 없어요?”

“아이고. 내가, 우리 기리인 군 얼굴 봐서 참는다. 내가. 기다려, 해장 수프 만들어 줄 테니까.”

“아니, 왜 내 얼굴이 아니고...”

형은 투덜댔지만 아줌마는 듣지도 않고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 머리가 지끈거린다. 몸이 건강해지기 전에는 술을 조금씩만 마셨는데, 건강해지고 나서는 별로 마실 기회가 없었다. 이렇게 과음한 거야 물론 생전 처음이고.

“당분간은 술 쳐다보기도 싫을 것 같아요.”

에빌로 누나도 머리가 아픈지 머리를 부여잡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톨라츠 아저씨만 약간 피곤해보일 뿐 예의 그 넉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이렇게 웃으면서 아침식사를 하고 떠날 수 있어서.”

그 말에 우리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사기사의 개인 무력이나 같은 팀원들의 실력은 손꼽히는 수준이다. 특히 단독 팀을 꾸릴 수 있는 3급 이상의 수사기사들은 혼자서 여남은 명 상대하는 건 일도 아니라고 할 정도다. 왜 그런 무력이 있어야 하는가 물으면, 그들은 그러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다고 대답한다. 권력자들을 자주 상대하기 때문에 죽음의 위기를 맞는 경우도 많고, 그래서 가급적 자신이 수사기사라는 걸 밝히지 않고 다닌다고 한다. 나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번처럼, 모든 일이 잘 풀려서 무사히 아침을 먹고 유유히 떠날 수 있는 건 수사기사로서는 최고급의 엔딩이라고 한다.

“이 녀석 때문이지 뭐.”

형은 왼팔을 뻗어 내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나는 형의 손길을 막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도 엉망인데 뭐. 누나와 아저씨는 그저 잔잔하게 웃을 뿐이었다.

“아, 맞다. 기리인.”

웃음기를 약간 지우며 손을 거둔 형은 나를 보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제도에 갈 거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형은 말했다.

“이번 사건에서 너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무력 충돌의 가능성을 막은 것, 살인 사건의 단서를 제공하고 적절한 방향의 분석을 제공한 것도 물론 공헌이지만, ‘고귀한 의무’를 지닌 나로서는 만에 하나 있을 수 있는 북부의 불만 요소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네가 마련해 줬다는 것을 가장 높이 사고 싶다.”

어제 술자리에서 하기에는 너무 진지한 얘기였을까. 어느새 나도 몸을 똑바로 한 채 듣고 있었다.

“나는 너의 공훈을 우리 수사기사단에 정식으로 보고할 생각이다.”

“네?”

그 제국 수사기사단에? 제국 모든 소년들의 모험담과 동경의 원천인 그 곳에? 나를?

“그 뿐만이 아냐. 황제 폐하께 직접 올라갈 보고서에 너의 공훈을 명시하고, 니가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직접 내리시는 상을 받을 수 있게끔 주선할 거다.”

“에엑?!”

너무 일이 커지잖아요! 하지만 형은 내 표정을 읽은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공훈에는 마땅한 포상이 따라야 한다. 공정한 신상필벌이야말로 황제 폐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이며 동시에 제국의 신민이 충성심을 가지는데 근본되는 것이다.”

“어, 어...”

정말 오랜만에 너무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형은 나를 보더니,

“음음. 그럼 공적인 발언은 여기까지 하고.”

다시 장난스럽게 말하며, 제국 2급 수사기사 에아임 로그푸스에서 친한 동네 형 에아임으로 돌아갔다.

“너, 제도에 가면 묵을 데 있니?”

“그럴 리가요. 가서 찾아봐야죠. 선생님 도움도 받고...”

“그럼 우리 집에서 하숙해라.”

“네?”

“말했지? 제도에 우리 집이 있다고. 여기 여관방만한 조그만 방이 있는데, 손님 방으로 비워두고 있거든. 그 방을 너한테 빌려줄게. 니가 제도에 있는 동안은 거기서 지내면 돼. 식사, 빨래, 청소 제공. 한달에 은화 한 닢. 어때?”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가격이군요?”

옆에서 웃으며 한 마디 참견하는 톨라츠 아저씨.

“너무 좋은 조건이고.. 아니, 형수님도 계시고 애기도 있을텐데...”

“로그푸스 가문은 은의를 잊지 않지. 그게 가훈이거든. 치르낙 대왕께 입은 은혜를 잊지 않고 아직도 변경백으로 있잖아. 그게 좀 답답할 때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나도 로그푸스 가문의 아들로서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베풀지 않으면 가르침을 어기는 거니까.”

그러더니 형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면서 내 눈을 뚫어져라 보며 말했다.

“기리인. 이 형님이 가문의 가르침을 어기게끔 두지는 않겠지?”

순간적으로 무시무시한 압박감에 나는 아무 말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형은 어느새 다시 하하호호 하는 표정으로 돌아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이제 남은 건 제도로 무사히 귀환하는 것 밖에 없겠네!”

그때 무이고스 아줌마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큰 사발 네 개를 가져오며 말했다.

“에아임 씨, 우리 기리인 괴롭혔어요?”

“언제 ‘우리 기리인’이 된 거에요?”

“그야 에아임 씨가 한밤중에 들어와서 꼭두새벽에 나가는 동안 기리인이 나랑 많이 놀아줬으니까 그러지. 자, 들어요. 해장하는데는 담백하고 뜨끈한 국물이 최고지.”

아줌마는 그릇과 수저를 차려주고는 주방으로 되돌아갔다. 형은 가만히 자기 앞에 놓인 사발을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기리인.”

“네, 형.”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네?”

형은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마누라 건드리면 죽는다.”

아이고, 참! 농담인 줄 알았기 때문에 우리 네 명은 곧 피식 웃고는 아침식사를 시작했다.

곡물가루가 들어갔는지 걸쭉한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 먹으며 나는 생각했다. 여행의 처음에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게 다행이라고. 그때, 갈림길에서 이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선택을 하지 않아서, 그리고 마찬가지로 내 고향을 배신하는 선택을 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 작품 후기 ============================

3챕터의 끝입니다.

오늘 밤에는 짧은 오마케(?!)가 한두편 올라올 예정입니다.

취향 타는 듣보잡 소설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말씀 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고 가시면 더욱 감사하며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