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7 4. 누군가의 즐거움이 누군가에게는 슬픔 =========================
이봐, <시스템>.
‘띠링!’
<잘 지냈습니까?>
뭘 새삼스럽게. 맨날 다 봤으면서.
<나를 완전히 잊은 거 같아서 걱정 많이 했었습니다.>
설마 너, 삐진거야?
<삐졌냐는 질문을 당당히 할 수 있는 걸 보니 당신의 정체성은 남자가 틀림없군요.>
삐졌냐는 말에 신경쓰는 것도 남자밖에 없지. 아무튼, 조언을 좀 구해도 될까?
<시스템에 조언을 구하는 것은 언제나 현명한 행동입니다. 현명한 당신을 돕는 건 나로서도 기분 좋은 일입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좀, 친밀해진 것 같은데?
‘띠링!’
<당신의 생각이 맞을 겁니다. 정보 확인이 Lv. 2로 업그레이드되며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는 범위가 조금 더 늘어났습니다.>
음... 그래도 아직 네가 누구인지, 왜 나를 돕는지 같은 거는 얘기해주지 못하겠지?
<역시 현명하시군요.>
같은 시스템이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원래 시스템을 불러낸 용건을 생각했다. 지금 101권을 쓰려고 한다고.
<현명한 선택입니다. 100과 101은 많이 다릅니다. 의지력 면에서 당신이 절감했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미틱 시에서 끝까지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근본은 의지력에 있습니다.>
그래. 그런데 지금 나한테 100인 능력치가 세 개잖아. 지능, 민첩, 그리고 매력.
<이미 당신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음. 같은 생각인지 한 번 확인해보자. 일단 매력은 제외. 지금보다 더 귀찮은 일들이 많이 생길테니까.
<맞습니다. 당신이 매력을 100에서 101로 올리는 순간, 당신은 ‘대륙 최고 수준의 미남’에서 ‘역대 최고 수준의 미남’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매우 큽니다. 당신이 인생을 사는 데는 더 편할 수도 있겠지만, 높은 매력은 적을 만들게 됩니다.>
잘 알지. 그걸 피하는 게 외교술이고.
<101은 외교술로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저주에 가까운 수준의 매력이 될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영원한 유혹은 없지. 영원한 꿈도 없고. 언젠가는 깨어나게 마련이야. 그리고 깨어나면...
<당신을 부정하고 당신을 증오하게 될 겁니다. 사랑만큼 강력한 증오가 되겠지요.>
그래. 나도 동의해. 그럼 민첩과 지능인데... 혹시 내가 생각한 거 맞아? 민첩이라는 거. 근력이 받쳐주지 않는 민첩이라는 게 가능한 거야?
<역시, 당신이라면 짐작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당신의 근력은 평범한 사람보다 조금 높은 수준입니다. 그 근력으로 지금의 스피드로 움직이는 것도 약간 무리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101로 올리게 되면...>
맞아. 고통 없이 얻어지는 것 없고, 대가 없이 얻는 것 없지. 그럼 그 부하가 내 몸에 걸리게 될 것이라는 말이구나.
<맞습니다. 조화롭게 올리지 못한, 당신이 스스로 터득하지 않은 능력은 결국 당신을 갉아먹게 될 것입니다. 추천하지 않습니다.>
그럼 지능도 마찬가지인 거 아냐?
<몸의 부하는 근육과 뼈에 걸리게 되지만, 머리의 부하는 정신에 걸리게 됩니다. 그런데 당신의 의지력은 얼마였죠? 당신의 의지력에 대해 내가 해 줬던 말 기억납니까?>
그래. 내 의지력은 101. 역사상 가장 의지력과 참을성이 강했던 치르낙 대왕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이라고 했었지.
<당신의 의지력이라면 몸의 부하도 의지력으로 참을 수 있을 겁니다만, 그러다가 몸이 한계를 맞는 순간 무너지게 될 겁니다. 반면 정신의 부하는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지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시스템. 포인트 증가권과 101권을 사용하겠어.
<사용가능한 보너스 포인트는 8입니다. 상승시킬 능력치를 지정하여 주십시오.>
101권을 사용하여 내 지능을 101로 올리겠다. 남은 보너스 포인트 7은 모두 힘에 투자하겠어.
<지능에 1, 힘에 7. 확인합니다. 맞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기다리자 ‘띠링!’ 소리가 들렸다.
<캐릭터 정보가 변경되었습니다. 정보 확인을 통해 확인해 주십시오.>
‘정보 확인.’
<이름 : 기리인 모스
나이 : 18세
HP : 1600/1600
힘 : 87
민첩 : 100
지능 : 101
마나친화력 : 0
매력 : 100
지구력 : 80
특수 : 의지력 101 / 고급 언변 92 / 냉철 94
스킬 : 정보확인 Lv. 2, 마나 배치 Lv. 1>
‘띠링!’
<당신의 신체가 변화된 수치에 맞춰 재구성을 거치게 됩니다. 잠시간의 심한 고통과 기운없음이 예상됩니다. 예상 시간은 약 5분 30초입니다.>
뭐?!
<고통에 대비하십시오.>
으윽! 머릿속을 불의 갈퀴가 긁고 지나가는 느낌이다. 한 쪽 방향으로 끝까지 긁은 갈퀴는, 다시 반대 방향으로 긁고 지나간다. 아아아악! 밖으로 비명도 못 지르고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바닥에 웅크렸다. 이제 끝난 건가, 하고 생각하자마자 이번엔 머리 바닥, 그러니까 내 목구멍 쪽부터 머리 꼭대기 쪽으로 긁어올린다. 온 머리의 살점 하나하나가 불타는 느낌이다.
머리에 비하면 몸의 아픔은 아무 것도 아니다. 약간씩 근육이 커지고 옷이 갑갑해진다. 오래 달린 이후에 뻐근한 것처럼, 뭔가를 오래 든 이후에 뻐근한 것처럼 팔다리가 뻐근하다. 조금씩, 바지가, 셔츠가 끼는 기분이지만, 심하지는 않다. 그래.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 머리가! 머리가 정말 빠개질 것 같다! 누군가가, 내 머리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누군가가 조그마한 티 스푼을 가지고 내 머리를 휘저어 곤죽으로 만드는 느낌이다!
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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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 선실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기리인!”
나는 눈을 번쩍 떴다. 형의 목소리였다. 선실 밖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서서히 붉은 색에서 검은 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점심 먹고 강바람 조금 쐬다가 선실에 틀어박힌 것 같은데. 어느새 저녁때가 됐구나.
“나가요!”
형을 오래 기다리게 하면 뭐라고 할까봐 나는 그렇게 외치고는 일어섰다. 온 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면서 기절해 있었던 걸까. 하지만 몸도 마음도 완전히 가뿐해진 느낌이었다. 팔다리가 너무 가볍고, 힘이 넘친다. 머리는 평소보다 두 배 세 배 열 배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문에 걸린 거울을 본 후, 수건으로 땀을 대충 닦고, 문 밖으로 나갔다. 형은 문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셔츠와 바지의 단출한 차림. 하지만 웬지 범상치만은 않은 셔츠다. 고급스러워 보인다. 귀족이란 걸까.
“얌마, 니가 형을 챙기러 와야지, 형이 너를 챙기러 오면 되냐?”
“아, 미안해요 형. 잠시 자버렸어요.”
“어디 안 좋아? 식은땀 흘렸네?”
역시 형의 눈썰미도 일가를 이룬 사람 답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컨디션 좋아요. 벌써 식사시간인가요?”
“응. 식당으로 오래.”
나는 내 방에 자물쇠를 채운 후 형을 따라 복도 끝에 있는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갑판 아래 1층은 지금 내가 있었던 것 같은 선실이 2열로 10개씩 총 20개 있고, 그 아래에는 주방과 식당, 그리고 선원들의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가 본 적은 없지만 그 아래 층에는 교역품과 짐들이 들어차, 밸러스트(ballast, 무게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식사도 제공받지 않고 그냥 그 맨 아래층에서 잠만 자는 걸로 아주 싼 값에 배를 타는 사람들이 대략 2~30명 정도 있다고 한다.
갑자기 배가 무지무지 고파졌다. 이게 그 ‘신체 재구성’ 때문일까? 마치 격한 운동 후에 배가 고파진 것처럼 말이다. 배의 식당 문 틈으로 흘러나오는 맛있는 냄새를 맡아서인가? 나는 먼저 달려가 문을 열고는 마치 집사라도 된 것처럼 허리를 숙이며 안쪽으로 형을 안내했다. 형은 피식 웃더니 과장되게 거들먹거리는 걸음걸이로 안으로 들어갔다.
배의 식당은 특이했다. 벽에 불이 아닌 마력석을 이용해 빛나는 등들이 걸려 있었고, 가운데에는 튼튼해 보이는 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 다리는 바닥에 고정되어 있는 것 같았다. 배가 흔들리기 때문이겠지? 사람들은 삼삼오오 긴 테이블에 앉아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운데 쯤에 앉아 있던 톨라츠 아저씨와 에빌로 누나가 손을 들었다. 우리가 하는 걸 봤는지 웃는 표정이었다.
“기리인, 낮잠 잤나보네?”
“얼굴에서 보여요?”
나는 웃으며 누나와 아저씨의 반대편에 앉았다. 형은 “얌마, 할 거면 끝까지 해야지. 의자도 빼주고.” 라고 장난 섞어 투덜거리며 내 옆의 의자에 앉았다. 지금 보니, 바닥도 고무고, 의자다리에도 고무가 씌워져 있었다. 미끄러지지 않게 하려는 거겠지? 고무를 썼다는 건, 저 남쪽 밀림 영역까지 오간다는 걸까.
음. 잘 모르겠다. 지능이 101이 되었는데, 뭐가 달라진 거지?
‘띠링!’
<바로는 알 수 없을 겁니다. 원래 머리가 좋다는 건 바로 드러나지 않는 거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어지간한 궁금증을 앉아서 생각해보는 것만으로 바로 알 수 있을 겁니다. 세상에 당신을 괴롭힐 수수께끼는 별로 없을 겁니다.>
음...
<기억력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억하고자 하는 사소한 것들을 어지간해선 잊기 힘들 겁니다.>
그럼 내 수준이 어느 정도 되는 거야?
<매력 수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야기했던 게 기억나지 않습니까? 101은 대략 역대 최고 수준입니다. 당신은 이티클레 대륙의 역사에 남을 정도의 지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런 건가. 남들한테 자랑할 수 없다는 게 좀 아쉽네... 맛있는 냄새가 난다. 후왁 하는 소리가 나 주방을 보니, 주방 안에서 흰 모자를 쓴 주방장이 뭔가를 붓고 큰 팬에서 불을 확 일으키고 있었다. 공기 중에서 묘하게 치즈의 고소한 냄새가 난다... 음. 나는 갑자기 배가 더 고파지는 걸 느꼈다.
그 때, 식당 문이 열리며 두 명의 남녀가 들어왔다. 남자는 톨라츠 아저씨 정도 되어 보이는 거한이었다. 온 몸에 근육이 꽉꽉 들어차 있는 것 같았다. 셔츠 위로도 그 근육이 다 드러나 있었다. 드러난 얼굴에는 흉터가 몇 개 있었지만, 전체적인 인상이 험악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 옆의 여자는, 음...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병사들을 상대하는 작부(酌婦)들이 저럴 거 같다. 복장이 야하다거나 하는 건 아닌데 좀 퇴폐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전체적으로 체격이 있는 편이라 그런가. 짙은 빨강색의 드레스를 입었는데, 달라붙지 않는 드레스인데도 튼실한 엉덩이의 곡선이 잘 드러나 있었다. 인상도 약간 날카롭고. 하지만 여자 쪽도 꽤 탄력있는 몸을 갖고 있었다.
“오빠. 맛있는 냄새 난다.”
저 둘은 친오누이일까? 여자가 남자에게 달라붙거나 애교부리지 않는 게 그런 분위기인데. 궁금하다.
<정보 확인 Lv. 2의 위력을 한 번 사용해 보십시오.>
아, 그래. ‘정보 확인.’
이름 : 크주크 가하
나이 : 26
HP : 5600/5600
힘 : 98
민첩 : 89
지력 : 77
마나친화력 : 59
매력 : 78
지구력 : 95
특수 : 내구력 88
스킬 : 맨손격투 S, 검투 A0>
<레카 시의 검투장에서 활동하는 검투사입니다. 검투로도 유명하지만 손과 발을 이용하는 맨손격투의 최강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내구력은 부상을 입었을 때 이를 견디는 힘을 말합니다. 당신이 알기 쉬운 말로 바꾸면 ‘맷집’이 되겠습니다.>
오오. 톨라츠 아저씨랑 힘이 비슷하네. 스물 여섯이면 한참 짱짱할 때인데 최강자라. 아르토 누나 이후로 S 능력치는 오랜만이네. 그럼... ‘정보 확인.’
이름 : 뮤리나 가하
나이 : 22
HP : 1400/1400
힘 : 67
민첩 : 75
지력 : 83
마나친화력 : 63
매력 : 86
지구력 : 69
특수 :
스킬 : 응급처치 A->
<크주크의 동생이자 파트너, 매니저입니다.>
오. 그러니까 친남매구나. 확실히 정보 확인 레벨이 올라가니까 꽤 볼 수 있는 게 많아지네?
<시스템이 줄 수 있는 보상 중에 최고 수준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네, 네, 네.
============================ 작품 후기 ============================
4챕터 시작하겠습니다.
4챕터는 일종의 군상극으로 진행하려 합니다.
관찰자 기리인이 온갖 형태의 인생을 보며 성장하는 식으로요.
어제 많은 분들이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고 가시면 더욱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리리플)
우옹우옹 님, subbidese 님 // 제가 BL 내성이 좀 낮아서 그 쪽은 다음 기회에나...ㅎㅎ;;; 리플 정말 감사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스킬은 좀 무리고 ㅎㅎ; 여장 장면은 꼭 넣을 겁니다.
폐도찡 님 // 많은 리플 감사드립니다. (닉네임 칠 때 조심하게 되네요 ^^;;;)
(66편) 역시 저의 딥 다크는 다른 분들에게는 그저 회색일 뿐...ㄷㄷㄷㄷㄷㄷ
(20편) 그렇죠? 제목이 구리죠? ㅠㅠ 너무 자주 바꿔서 이제는 어쩔까 주저중입니다 ㅠㅠ
(22편) 그건 나중에 나올 수도 있는 내용이니까 ㅎㅎ
(23편) 어, 주인공이 들고 다니는 활은 컴파운드 보우(compound bow)입니다. 구글에 쳐보시면 사진이 나와요. 활 같이 안 생긴, 도르래가 달린 활입니다. 석궁하고는 약간 다릅니다. 일종의 오버 테크놀러지인데, 소설이니까요 ㅎㅎ
(25편) 이 겜은 싱글게임이라 아마 다른 주인공 캐릭터는 가끔 나오는 외전으로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