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8 4. 누군가의 즐거움이 누군가에게는 슬픔 =========================
두 사람은 우리에게서 한 칸 떨어진 곳에 앉았다. 남자가 여자를 위해 의자를 빼 주고, 빙 돌아 반대쪽으로 갔다. 그 커다란 근육질의 덩치가 재빠르고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온 몸에 힘이 가득 차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얼굴에 맺힌 가벼운 미소마저도 자신감으로 읽힌다. 척 보기에도 강해 보인다. 사람의 눈길에도 익숙한 것 같다. 우리가 보건 안 보건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있다.
갑자기 다른 사람들의 표정이 궁금해져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에빌로 누나...는... 어라. 얼굴이 발그레해졌네? 저런 취향이었나? 톨라츠 아저씨는 보통의 그 푸근한 미소이고... 형은, 형마저도 크주크를 약간의 호승심과 호기심을 담아 바라보고 있었다.
“와. 크주크랑 같은 배를 탔었네.”
누나의 목소리는 약간 톤이 올라가 있었다.
“유명한 사람이에요?”
형과 누나가 나를 돌아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리인은 모르겠구나? 레카 시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이야.”
“그래요?”
알지만, 모르는 척 해야지. 가만히 있으면 설명해 주겠지. 형은 마침 급사가 나눠 준 포크를 들고 마치 검을 휘두르듯 허공에 휘두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레카 시는 좀 특이한 위치에 있어. 따지자면 거기도 중부 공작령이거든? 그런데 하필이면 거기가 강 건너편에 있네? 게다가 레카 시는 항구도시이기도 하지만, 제도로 이어지는 ‘황제의 길’의 출발점이기도 하거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으로 지리 시간에 배우는 이야기이지만, 그 얘기를 지적하면 형의 이야기 맥이 끊긴다는 정도는 안다. 그리고 형이 저 기본 상식 같은 얘기를 모를 리 없으니 그걸 토대로 뭔가 다른 얘기를 하려 하는 거겠거니, 했다. 아니나다를까 형의 이야기는 다른 쪽으로 꺾였다.
“그래서 레카 시는 제도의 영향도, 공작령의 영향도 받아. 양 쪽의 영향을 받는다는 건 양 쪽의 영향을 모두 안 받는다는 얘기도 되지. 그런 세월이 오래 되면서 제도와 공작령이 서로 줄다리기를 한 결과, 레카 시는 일종의 자유도시가 되었어.”
“미틱 시보다 더요?”
“미틱 시 시장은 그래도 융파트 공작이 임명하거든. 그런데 레카 시는 자체적으로 선출해.”
“자체적으로 시장을 뽑는다구요? 와... 그게 가능해요?”
“그게 가능할 정도로 규모가 크다는 얘기지. 귀족들과 상인들 대표로 이루어진 의회에서 시장을 뽑는데, 맨날 제도파와 융파트파로 나뉘어서 쌈박질하고 난리야. 음, 암튼. 그런 도시다 보니 분위기가 좀 많이 자유스러워.”
“형이 자유스럽다고 하는 게 꼭 좋은 뉘앙스로만은 안 들리네요.”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수사기사들한테는 요주의 지역 중 하나야. 범죄조직, 살인, 마약, 절도, 강도, 사기, 불법적인 사업... 뭐, 그런 분위기라서 여흥 산업이 발달하기도 했지만.”
“여흥...이요? 여가를 즐긴다는 건가요?”
“그래. 북부에서 자란 너라면 잘 이해를 못 할 수도 있겠구나. 레카 시에서 꼭 보고 가라고 하는 것들이 몇 개 있는데, 연극이나 오페라 같은 극장 관람, 시장 구경, 그리고 격투장 관람이다. 레카 시민들 뿐만 아니라, 전 대륙에서 이것들을 보기 위해 몰려들지.”
새삼 내가 세상에 대해 잘 모르는 것들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북부가 대단히 재미없는 곳이라는 것도. 여행을 나오지 않았다면, 아니, 형들과 이렇게 다니는 것이 아니라 대공가의 사람들과 제도로 갔다면 이런 건 구경하지 못한 채로 제도에 들어갔겠지.
“저 남자의 이름은 크주크 가하. ‘가하의 한 방’이라는 관용구가 있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야. 격투장, 그 중에서도 맨손과 맨발을 사용하는 격투기 대회에서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한 사람이다. 얼굴도 제법 준수하게 생겼고, 해서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유명인이야.”
하긴, 그런 부와 명예를 함께 거머쥔 유명인이니 비싼 선실에 탔겠지.
“보기에도 강해 보이네요.”
“그렇지? 나한테 무슨 짓을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무서운 느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빌로 누나는 처음 보는 표정, 약간 달아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저 크주크라는 남자의 팬인건가? 아니면 저런 강한 남자 취향인 건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손님? 죄송합니다만...”
그제야 우리는 말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급사가 접시를 손에 든 채 형의 뒤에서 약간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설명하며 포크를 흔드는 형의 서슬에 당황해 버린 표정이었다.
“아, 미안해요.”
형이 팔을 멈추자 급사는 요리가 담긴 접시를 하나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우리 가운데에 빵 바구니와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급사는 말했다.
“선장님께서 미틱 시장님에게 신신당부를 받으셨다면서 최고의 대접을 해 드리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혹시 필요한 것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만 해 주십시오.”
아, 이거. 괜히 신경쓰이네. 나와 누나와 아저씨는 형을 바라보았고, 형은 머리를 두어 번 긁더니, 급사에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내가 나중에 선장님에게 사례하지요.”
급사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우리 셋은 즉각 형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물었다.
“에아임 씨. 시장님한테 대체 뭐라고 하신 거에요?”
“그러게 말입니다. 방도 따로따로 내 주고, 식사때 과일바구니까지 주고. 이건 좀 대접이 과한데요?”
“대체 얼마나 탈탈 털었으면...”
“아, 그래서, 먹기 싫어? 그럼 나 혼자 가져간다?”
“아 형, 애들처럼 또 왜 그러세요.”
“먹기 싫다고 한 적은 없어요.”
“받은 선물을 함께 나누는 것은 신의 은총이 깃드는 일입니다.”
푸훗.
옆 쪽에서 소리가 났다. 우리가 그런 촌극을 펼치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크주크와 뮤리나 가하 남매는 우리를 왜 보냐는 투로 뚱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 이 쪽이 아닌가?
“아, 실례했습니다.”
반대쪽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우리가 오기 전부터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던 두 사람의 남녀가 앉아있었다. 남자 쪽에서 손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워낙 네 분들께서 재미있게 말씀을 하셔서, 실례인 줄은 알지만 자꾸 듣다 보니 웃고 말았군요. 실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실례랄 것까지 있나요. 오히려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자리에서 타인의 이목을 고려치 않고 큰 소리로 이야기한 저희의 불찰이지요.”
흰 셔츠와 검은 재킷, 회색 바지. 아무리 봐도 저건 양모다. 비쌀 텐데. 전체적으로 부티가 줄줄 흐르는 모습을 한 남자였다. 대략 한 40대 정도는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살집이 있는 남자는 머리카락도, 잘 손질된 콧수염도 반들반들거렸다. 영 미끌거릴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남자의 건너편에 앉은 여자 역시도, 몸에 달라붙는 파란 드레스 위에 흰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목도리를 걸치고 있었다. 어... 저건. 담비 가죽인데. 와. 잡기 무지무지 힘들어서 무게만큼의 드로그 금화값이 나가고 가죽에 상처가 없으면 그 세 배는 나간다는 그 담비? 돈이 정말 많은가 보다. 여자의 나이는 대략, 뮤리나 가하 양 정도는 되어 보였다. 음. 기묘한 조합이다.
“사과하는 의미에서 제가 와인을 한 잔 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더니 그 사람은 근처에 서 있는 급사를 향해 손가락을 튕겨보였고, 급사는 그 남자가 뭐라 하기도 전에 한 쪽에 있던 와인 거치대로 다가가더니 와인을 하나 가져와 그 남자에게 보여주었다. 그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급사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오프너를 꺼내 코르크 마개를 빼고, 어느 새 다른 급사들이 와서 놓아 준 유리잔에 약간 따라 그 남자에게 내밀었다. 그 남자가 향을 맡더니 말했다.
“BR산인가?”
“네. 언제나 찾으시는 걸로 준비해 드렸습니다.”
BR이라는 말을 듣자 나는 북부 대요새를 떠나오기 전 리미와 가졌던 하룻밤이 떠올랐다. 그 날 마셨던 포도주도 BR 포도원에서 나온 포도주였었는데... 리미는 잘 지내려나. 요뢰브 백작님 말대로, 레카에 도착하면 편지를 한 통 보내봐야겠다.
“이걸 저 분들께 한 잔씩 올리게.”
급사가 다가와 우리 앞에 놓인 잔에 조심스럽게 와인을 채웠다. 그런데 급사는 우리 네 명에게만 채울 뿐, 우리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앉아있던 가하 남매는 보지 못한 척 했다. 물론 우리 일행에게만 ‘사죄’의 의미를 담은 거긴 하지만, 크주크가 유명인이라면 같이 따라주면서 이야기할 법도 하지 않나? 가하 남매도 그걸 눈치챈 듯 약간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나만 신경쓰는 건가?
“내 소개를 하죠. 나는 레카를 기반으로 무역을 하고 있는 세자르 가니니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쪽은 내 정부(mistress) 비키이고. 늘상 다니는 길이라 새로운 것도 없고 지루하던 차에 재미있는 일행분들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실수가 있었다면 이 와인과 함께 잊어주시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군요.”
우리는 형을 바라보았고, 형은 우리의 대표 격으로 말했다.
“저는 제도에서 일하는 에아임 로스라고 합니다. 이렇게 새롭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세자르 씨. 이 쪽은, 저의 일을 도와주고 있는 톨라츠, 에빌로, 그리고 기리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 우리를 보더니 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새로운 만남을 기념하며.”
우리는 그의 신호에 따라 잔을 들어올렸다. 나는 그 때, 리미가 보여줬던 대로, 공기를 마시고,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켜고, 입 안에서 굴리고, 삼켰다. 그 때 마셨던 것과는 또 맛이 다르다.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스테이크에 잘 어울리는, 떫으면서도 농후한... 그리고, 끄트머리 맛이 약간 달다. 마치...
“산딸기...?”
그 말을 들은 세자르 씨가 표정이 환해지며 말했다.
“기리인이라고 했던가? 자네 감각이 꽤 훌륭하군. BR 401년산은 끄트머리에 마치 산딸기의 맛 같은 단 맛과 신 맛이 맴도는 것이 특징이라고들 하지. 이거, 좋은 와인을 딴 보람이 있는데?”
나는 칭찬에 감사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세자르 씨는 껄껄거리며, 별다른 말은 더 하지 않고 자신의 앞에 놓인 와인잔을 비웠고, 급사가 대기하고 있다가 그 잔을 채워주었다. 세자르의 미스트레스라는 비키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오히려 그 표정 없는 게 더 표정이 있었다. 내가 아까, 뮤리나를 퇴폐적이라고 했던가? 비키에 비하면 정숙하기 이를데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온 몸으로 관능미를 뿜어내고 있었다. 훤히 드러난 어깨와 가슴골 때문인가. 아니다. 표정 때문이다. 저 반쯤 뜬 눈, 약간 벌어진 입술. 사람을 외모로만 평가해서는 안되겠지만 ‘미스트레스’라는 말이 이해가 되려고 한다.
우리가 잔을 비우기를 기다렸던지 형은 급사에게 손가락을 튕겨보였다. 급사가 다가오자 형은 귀에 뭐라뭐라 했고, 급사가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아까처럼 와인 거치대에서 와인을 하나 가져왔다. 형은 따지도 않고 레이블만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고, 급사는 곧 와인을 따서 따라주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에게, 세자르와 비키에게, 그리고... 급사는 다시 움직여서는 가하 남매의 잔에도 와인을 채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제 쪽에서 한 잔 내겠습니다. 귀한 술을 내주신 세자르 씨와 그의 미스트레스 비키 양에게, 그리고 함께 한 것도 인연인데, 크주크 가하 씨와 뮤리나 가하 양에게도 한 잔 올리지요. 기분 나쁘시지 않다면 함께 한 잔 하실까요.”
============================ 작품 후기 ============================
먹을 걸로 생기는 원한이 원래 가장 무서운 법이라죠.
취향 타는 소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정말 깊이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고 가시면 더욱 열심히 더욱 재미있게 달리겠습니다.
(리리플)
화이트프레페 님, subbidese님 // 그 내용은 반드시! 오마케에 넣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흥미있거든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