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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70화 (70/309)

00070 4. 누군가의 즐거움이 누군가에게는 슬픔 =========================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사라지자 우리는 그냥 가벼운 잡담 같은 것을 하며 식사를 마쳤다. 와인을 두세 잔씩 마시다보니 약간 알딸딸한 기분이 있었다. 바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먼저들 주무세요. 저는 갑판에서 바람 좀 쐬다가 들어갈게요.”

“그래. 강바람 차니까, 감기 안 걸리게 조심하고 너무 오래 맞지 마라.”

“네, 형. 누나, 아저씨. 좋은 밤 되세요.”

아까 세자르 씨와 비키 씨가 특1호실, 크주크 씨와 뮤리나 양이 특6호실을 쓰고 있다는 말을 듣고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특2호실부터 특5호실까지는 모두 우리가 쓰고 있었다. 내가 2호실, 에빌로 누나가 3호실, 형이 4호실, 톨라츠 아저씨가 5호실이었다. 두 명이 써도 넉넉한 특실은 혼자 쓰기에는 아주 넓었다. 이 넓은 특실 네 개를 각자 써도 되게 된 건 어디까지나 에아임 형이 그만큼 시장을 닦달해 준 덕이었다.

나는 형들이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갑판으로 나섰다. 미틱 시의 들판에서 본 달이 반달이었으니, 이제 달은 아래쪽에 약간의 은색으로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내일은 달 없는 밤이겠구나. 하늘에 별이 빽빽했고, 혹시나 모를 상황을 위해 등불을 돛대와 기수에 넉넉히 내걸었기 때문에 어둡지는 않았다. 주변에 뭐 보이는 건 없었지만, 뭐 어떠랴. 별만 봐도 충분한데.

나는 갑판에 붙박이로 설치된 의자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원래는 어두웠을 밤하늘을 밝은 흰 점들이 빽빽하게 메우고 있었다. 밤하늘 한가운데로 ‘저울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냉염전쟁에서 살아남은 신들이 결국 대립을 해소하지 못하고 전쟁을 벌이다가, 그 죄업에 분노한 트리클 신의 개입으로 트리클 신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신들이 사멸되었을 때. 분노한 트리클 신이 신들의 죄업을 평가하기 위해 사용한 저울대가 저것이라고 한다. 하늘에 그어진 은색의 긴 줄.

나는 어릴 적부터 밤하늘을 보는 게 그렇게 좋았다. 감기 걸린다고 어머니 아버지는 기겁을 하셨지만, 그래도 밤하늘을 보면, 내 답답하고 힘없는 몸을 벗어나 멀리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몸이 건강해진 지금에 와서도 밤하늘을 보면 그 생각이 든다. 수많은 저 별들을 향해 날아갈 수 있을것만 같은, 자유로운 기분.

“저...”

누군가 내 등 뒤에서 나를 불렀다. 멍하니, 명상에 가까운 상태에 잠겨 있던 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부른 것은, 다름아닌 비키 씨였다. 세자르 씨의 미스트레스. 아까의 드레스 차림에 하얀 담비털 목도리를 하고 있는 차림새 그대로였다.

“비키... 씨였죠?”

“네. 저...”

횃불과 마력석 등불의 불빛을 받은 그녀의 얼굴은 발그스레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발그스레한 빛으로 물든 그녀의 얼굴에는, 예의 그, 눈을 반쯤만 뜬, 왠지 고혹적이고 퇴폐적인 표정이 걸려 있었다.

“그이는 와인을 마시고 먼저 잠들어 버렸는데, 잠이 오지 않아서... 갑판에 나왔더니 혼자서는 쓸쓸할 것 같아서요. 괜찮다면 옆에 앉아도 될까 하고...”

아... 나는 가볍게 숨을 쉬었다. 여기서 ‘냉철’이 아니라도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는 그간 경험에 의해 잘 알고 있다. 호들갑을 떨며 호의를 베풀면 호구가 될 뿐이다. 그러니,

“뭐, 그렇게 하시죠.”

무관심한 듯, 상관없는 듯 대해야 한다. 잘 대해주는 건 잘 대해주는 대로. 하지만 관심있는 척, 남성이 여성에게 보이는 호의를 대하는 순간, 껍질만 남겨놓고 쏙 빨려먹을 수도 있다. 학생 때야 그냥 서로 어장관리네 나쁜 놈이네 하며 얼굴 붉히는 데서 끝나지만, 이제는 나는 어른이니까.

그녀는 내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훅 하고, 뭔지 모를 향수 냄새가 끼쳐왔다. 꽃 향기 사이에 숨겨져 있는 사향의 향. 아르토 누나가, 그 큰 눈을 하고 배시시 웃던 누나에게서 나던 사향의 향이 생각났다. 그 향기인지 냄새인지 모를 묘한 것보다는 훨씬 정제되고 세련된 향이었지만, 그러기에 오히려 아르토 누나의 그것보다 끌리지 않았다.

“...”

그녀는 아무 말이 없이,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히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 예쁘긴 예쁘네. 내가 그녀가 미스트레스라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뭐 어떻게 해보겠다는 건 아니었겠지만 뭐라도 얘기라도 해 보지 않았을까.

하지만 남의 여자이고, 게다가 그 남이라는 사람이 정부에게 흰 담비 목도리를 사 줄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상인이다. 수작부릴 마음도 없지만, 수작을 부리는 걸로 오해받는 것도 사양이다. 그리고, 나 혼자 있던 고즈넉하고 조용한 시간을 방해받은 것 같아서 기분도 좋지 않고 말이다.

잠깐만 있다가, ‘피한다’는 인상 안 줄 정도로 잠깐만 있다가 들어가야지.

“...”

한참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나야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말을 하지 않는 거지만 그녀는 왜 말이 없을까. 그런 생각에 오른쪽을 돌아보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숨죽여 흐느끼는 것도 아니고, 통곡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표정이 많이 변한 것도 아니다. 그녀는 아주 약간 슬픈 표정을 지은 채,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물이 횃불과 마력석 등을 받아, 그녀의 눈물을 토파즈(topaz)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띠링!’

<냉철이 발동합니다.>

냉철 덕에 나는 섣부른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것도, 그리고 웃어버리는 것도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내 눈길을 눈치챈 그녀는 조용히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내었다. 그러더니, 조용히 일어나,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선실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뭐지...

‘정보 확인.’

<이름          : 비키 뢰이너

나이          : 24

HP           : 914/914

힘            : 66

민첩          : 67

지력          : 84

마나친화력    : 59

매력          : 92

지구력        : 66

특수          :

스킬          : 연기력 A0>

<‘잠자는 꽃’이라는 별명을 지닌, 레카 시의 유명인이었습니다. 현재는 세자르의 미스트레스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녀를 두고 ‘그 향기에 취하지 말라, 잠들어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리니’라는 싯구절이 있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연기력도 A0이고 말이지. 지금 눈물마저도 온전히 믿어서는 안된다는 말 아닌가.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여자들을 대한 경험이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여자들은 모를 존재다, 라는 생각만 든다.

모르겠다. 별이나 조금 더 보다가 들어가야겠다.

---

다음 날 아침, 아침식사를 대충 마치고 갑판으로 올라가보니 갑판은 어제보다 엄청 시끌시끌했다. 많은 사람들이 갑판 의자에 앉아있거나, 난간에 기대 있거나, 배를 따라 날아오고 있는 새들을 가리키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다 어디에 있었지?

“저, 실례합니다.”

나는 한쪽 구석에 서있던, 줄무늬 복장의 선원 아저씨에게 물었다.

“네, 무슨 일이신지?”

거친 말이 돌아올줄 알고 긴장했는데 의외로 싹싹하게 대응하는 아저씨였다. 나는 내심 다행이다 생각하며 물었다.

“저 분들은 어디서...?”

그는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손님은 특실 손님이시군요?”

“네?”

“특실에 계시는 분들이 그런 질문을 자주 하시고는 하거든요.”

그는 바깥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맨 아래층에 단체 객실이 있는 거 알고 계시죠?”

“아... 그 분들이 올라오는 시간이에요?”

“네. 아무리 그 분들에게 모포 한 장 말고 아무 배려도 안 해준다고 해도 그 아래 선실에서 요강에 담긴 똥오줌 냄새까지 맡아가며 하루종일 있는 건 인간적으로 할 짓이 아니죠. 청소도 해야 하고.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두 번, 특실 손님들이 식사하실 때 저 사람들을 바깥 바람을 좀 쐬게 해 줍니다.”

아아... 그런 거구나. 얘기만 듣기에는 힘들게 사시는 분들, 넉넉지 못한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별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옷들도 깨끗했고, 꾀죄죄해 보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무엇보다, 표정들이 너무 밝았다.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오가고 있었다.

“손님, 레카 시는 처음이시죠?”

“...티가 나나요?”

“하하. 죄송합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용서하시길.”

“기분 안 나빴어요. 그냥 내가 모르는 세상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여행이란 좋은 거죠. 이 배를 타니 강을 따라 안 가본 곳 없이 다녔는데, 정해진 곳 없이 돌아다니는 삶이 고되도 남들이 못 보는 걸 보고 다닌다는 건 좋을 때가 많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그는 약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티르완이라고 불러주세요.”

“저는 기리인입니다. 혹시 나중에 시간 되시면 여행 다니셨던 이야기 좀 들려주실 수 있으세요?”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쁘지 않죠. 맛있는 술 한 병이 있다면 더 좋구요. 지금은 일해야 하니, 나중에 저녁때나 보도록 할까요?”

계속 싱글거리며 대답하던 그는 다시 시선을 갑판쪽으로 돌렸다. 나는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뱃전 쪽으로 다가갔다. 말 건 사람이 친절한 사람이라 다행이다.

“기리인.”

에아임 형이 뒤에서 말을 걸었다.

“네, 형.”

“술이 필요하면 식당에 가서 급사한테 말하면 된다. 선원들이 좋아하는 건 와인보다는 좀 더 진한 럼(rum) 같은 거니까. 니가 그냥 먹기에는 독할 수도 있는데, 어리니까 괜찮을거야.”

형은 내 머리를 헤집더니 나를 지나쳐 갑판 쪽으로 걸어갔다. 음. 칭찬받은 거라고 봐도 될까?

============================ 작품 후기 ============================

조금 늦었네요. 일요일은 어쩔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비축분도 없고...;;

루즈하거나 재미없어진다고 느끼시면 언제든 말해주세요.

취향 타는 소설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더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을때까지 더 열심히 더 재미있게 써 보겠습니다.

(리코멘)

화이트프레페 님 // 근데 크주크 무서워서 함부로 작업 걸었다가는... UFC 김동현 선수 보니까 동생이 남자들이 오빠 무서워서 못 다가온다던데 ㅋㅋ

eastarea 님 // 60개에 달하는 코멘트와 추천 달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응원해 주시는 만큼 정말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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