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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73화 (73/309)

00073 4. 누군가의 즐거움이 누군가에게는 슬픔 =========================

“뭐야, 저 여자...”

뮤리나 누나가 투덜댔다. 형도 썩 밝은 표정만은 아니었다. 뭔가, 연습 본 것만 갖고 그러는 건 아닌 것 같고... 둘 중 하나이겠군. 어제 저녁에 크주크 형이 얘기했던, 남북간의 대립이 저 정도의 별 것 아닌 일에도 신경이 거슬릴 정도로 심한 것이거나, 아니면... 형하고 저 사람 간에 무슨 일이 있었거나. 어느 쪽이든, 지금 이 자리에서 물어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머릿속에 기억해 둬야겠다.

그 때, 아까 비키 씨가 사라진 곳에서 아침에 보았던 티르완 씨가 나와서, 가벼운 종을 치고 있었다. 땡강땡강.

“점심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어, 벌써 그렇게 되었나. 그는 우리 쪽을 향해 가볍게 목례해 보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뱃전에 여기저기 널린 화살을 줍기 시작한 뮤리나 누나를 도와 화살을 주워모아서 전통에 넣고, 시위를 풀어낸 후, 활과 화살을 아까의 큰 배낭 안에 넣었다.

“어, 고마워, 기리인. 드는 건 나랑 오빠가 할게.”

“응, 누나. 식당에서 봐. 형도요.”

크주크 형은 약간 지친 표정으로 별 말 없이 나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얼굴이 어두운 표정은 아니네. 아까 비키 씨 영향은 아닌가보다.

나는 먼저 에빌로 누나의 방문을 두드려 누나를 깨우고 준비하게 한 후, 톨라츠 아저씨와 에아임 형의 방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밥먹으러 가자고 말했다. 예의 무식한 방패를 한 손으로 들고 들었다 내렸다 하고 있던 아저씨도, 아까보다 더 많은 종이를 구겨버린 채 골머리를 앓고 있던 형도 내심 지겨웠던 듯 곧바로 정리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기리인, 너는 뭐했니?”

“아, 갑판에 있었어요. 크주크 형이랑 뮤리나 누나를 도와줬거든요.”

“크주크 ‘형’이라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부르게 됐어요.”

“기리인, 있다가 우리도 꼭 좀 소개시켜 줘야 해.”

크주크 형과 관련된 얘기만 나오면 눈빛이 변하는, 깔끔하게 세수까지 하고 나온 에빌로 누나. 나는 못 말린다고 생각하며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 후, 앞장서 걸어나왔다.

그러니까 그건 우연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다가, 열린 문 안쪽으로 6호실을 본 순간. 크주크 형이 방 안의 화장실에서 혼자,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뭔가를 입에 털어넣고 있는 장면을 본 것은 말이다. 걸으면서 방을 지나치는 그 짧은 순간 보인, 진짜로 본 거냐고 물어보면 확실하지는 않다고밖에 대답하지 못할 그 장면.

뭐지? 뭘 먹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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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식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맨 안쪽 자리로 가 앉았고, 뭐라 이야기를 할 틈도 없이 급사가 전채 요리를 날라오기 시작했다. 역시 그 빵 바구니와 과일 바구니는 빠지지 않았다. 날라져온 수프에 빵을 찢어 담그고 있는데, 식당 문이 열리더니 크주크 형과 뮤리나 누나가 들어왔다. 내가 손을 번쩍 들어보이자, 형과 누나도 손을 들어보이더니 웃으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저희야 물론 환영이지요. 앉으세요. 기리인, 뭐하니. 일어나서 뮤리나 양 의자도 빼드리고 해야지. 아이고 저걸 언제 가르치나...”

나는 황급히 일어나 뮤리나 누나에게 의자를 빼 주었고, 누나는 짐짓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빼 준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큭큭거리며 웃던 크주크 형은, 뮤리나 누나를 보며 “어이구, 레이디 뮤리나, 이런 누추한 자리에...”하고 놀리다가 정강이를 한 대 얻어맞았다. 걷어찬 누나가 더 아파하는 게 문제였지만.

“우리 기리인이랑 많이 친해지신 것 같네요.”

“아, 네! 오전에 제 훈련을 많이 도와줬습니다. 친절하고, 싹싹하고, 그리고 재미있는 친구더군요. 센스도 있고. 저 아무한테나 형이라고 부르라고 안 하는데, 저 친구한테는 저절로 그런 말이 나오더군요.”

“이 친구가 좀 그렇긴 하죠.”

그때, 식당의 문이 열렸다. 세자르 씨와 비키 씨가 들어오고 있었다. 세자르 씨는 우리를 보더니 약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고, 그의 팔에 가볍게 손을 올려놓고 있던 비키 씨는 예의 그 반쯤 뜬 눈으로 읽을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보이자, 세자르 씨와 비키 씨 역시 정중하게 인사해왔다. 하지만 세자르 씨가 비키 씨를 위해 의자를 빼 준 곳은 우리 일행에서 두어 칸 떨어진 곳이었다. 같이 어울리지는 않겠다, 는 무언의 의사 표시였다. 약간 분위기가 썰렁해졌다는 걸 모두가 느끼고 있던 찰나, 타이밍 좋게 뮤리나 누나가 말했다.

“기리인, 그거 말씀 아직 안 드렸지?”

아차. 그러고보니.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반쪽짜리 금속판을 꺼내 우리 일행에게 보여주었다.

“뭐야, 그게?”

“크주크 형이 주셨어요. 이번 왕좌 방어전 보고 가라고...”

“뭐어?!”

에아임 형, 에빌로 누나, 톨라츠 아저씨가 모두 한 마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뭐, 뭐여. 요리를 나르던 급사나 방 안으로 들어오던 다른 손님들도 깜짝 놀랄 정도로 크게. 오죽하면 그 손님들이 우리 쪽이 아닌 주방 가까운 쪽에 자리를 했겠는가. 하지만 형, 누나, 아저씨는 그 쪽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내 손에 놓여진 반원 금속 조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톨라츠 씨, 저번에 가격이 얼마였는지 기억하세요?”

“여기 보세요. ‘링사이드’라고 적혀 있네요.”

“리, 링사이드 석이라고? 그건 기본이 10드로그에서 시작해!”

헐?! 경기 하나를 보기 위해 두 달치 생활비를 내야 한다는 말이야? 그럼 내가 들고 있는 이 금속 쪼가리가 10드로그 짜리라고? 아니, 아니지, 아니야. 그 정도가 아니라고.

“이거 다섯 명까지 되는 거라고 아까...”

그 순간 형과 누나와 아저씨의 턱은 빠진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쩍 벌어졌다. 내 턱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아니 저 미친 사람들이 훈련 잠깐 도와줬다고 50드로그 짜리 티켓을 덥석 안겨줘? 크주크 형이야 뭐 그럴 수 있다 쳐. 남자들은 그런 호기 잘 부리니까. 하지만 뮤리나 누나는 그런 거 안 따질 것 같이 굴면서... 우리는 그 표정 그대로 크주크 형과 뮤리나 누나를 바라보았고, 두 사람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 했다.

“너무 귀한 걸 주셨네요.”

“별 거 아닙니다. 줄 사람도 없고.”

줄 사람이 없다, 는 말에 나는 사태가 순식간에 이해되었다. 원래는 선수 부모님이나 가족을 위한 티켓인 거구나. 하지만 부모님은 돌아가셔서 미틱 시 묘지에 계시고, 다른 친척들은 없는 것 같고, 뮤리나 누나는 선수 관계자니 선수를 도와 근처에 있을 테고... 그런 거겠구나. 더 물어볼 수는 없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50드로그 정도 되는 티켓을...

“형, 그렇게 귀한 거인줄 알았으면...”

“됐어, 이미 줬는데 뭐. 그리고, 설마 한 번으로 입 씻으려는 건 아니지? 배에 타고 있는 동안은 훈련 계속 도와주는거 잊지 마라?”

부담을 덜어주려는 뜻이었을까. 짐짓 가볍게 웃으면서 형은 샐러드를 찍던 포크를 휘휘 휘둘렀다. 나는 아까처럼 주머니에 그냥 쑤셔박기는 너무 부담스러워서, 목에 줄로 매달고 있던 동전지갑 속에 그 티켓을 잘 보관했다.

그 때, 나는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비키 씨가 내 가슴 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은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말이다. 뭐, 뭐지. 내가 약간은 당황해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다시 스르륵 고개를 돌려 자신 앞에 놓이는 접시를 바라보았다. 비키 씨의 표정은 여전히 읽을 수가 없었다.

왠지는 정확하게 말할 수 없었지만, 비키 씨와 뭔가 사건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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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는 방에서 매일 해야 하는 운동을 하고, 머릿속으로 활쏘기 연습을 하며 명상을 하고, 대공 전하와 요뢰브 백작님, 바크 선생님, 그리고 리미에게 편지를 쓰며 보냈다. 저녁식사를 위해 모인 사람들 눈치를 보니, 오전에 하던 대로 시간을 보낸 모양이었다. 형은 눈이 충혈되어 있고, 아저씨는 꽤 피곤해 보였으며, 에빌로 누나는 아직도 졸려하고 있었다.

“누나는 그렇게 하고도 밤에 잠이 오세요?”

“말했잖니. 낮에 자는 거하고 밤에 자는 거하고는 다르다고.”

형이 웃으며 덧붙였다.

“에빌로는 잠을 몰아 자는 습관이 있어. 이럴 때처럼 안전할 때는 밑도끝도 없이 열 시간 스무 시간 자다가, 위기 상황에 처하면 역시 하루고 이틀이고 꼬박 눈을 뜨고 있기도 해.”

“잠을 다람쥐처럼 저장해두는 건가요...?”

찌릿. 에빌로 누나가 눈을 날카롭게 뜨는 바람에 나는 뒷말은 삼키고 말았다.

저녁식사 자리에는 세자르 씨 일행도, 크주크 형 일행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와 시간대가 엇갈린 걸까. 뭐, 그 사람들이 없어도 아저씨와 누나와 형은 워낙 오래 된 사이다보니 익숙하게 떠들고 웃으며 저녁식사를 마쳤다. 나는 형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급사에게서 럼(rum) 한 병과, 저녁으로 나온 빵의 쪼가리를 튀긴 것을 한 봉지 받아 갑판으로 나섰다. 갑판에는 티르완 아저씨가 앉아 있었다.

“이거, 귀한 술을 그냥 얻어마셔도 될까요?”

“대신 제가 못 가본 곳 이야기 많이 들려주세요. 저도 방에 가만히 있다가 그냥 잠드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재미있을 거 같아요.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세요.”

“아하하, 그럴까, 그럼.”

우리 둘은 건배를 하고, 한 모금 들이켰다. 으악! 이거 세다! 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불길 같은 느낌에 얼굴을 찌푸리자 티르완 아저씨는 껄껄 웃었다.

“기리인, 이런 술은 처음이구나?”

나는 아직 얼굴을 펴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우. 내 식도와 위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속에서 그림이 그려지는 느낌이야. 아저씨는 웃으며, 자기 잔에 있던 럼주를 한 입에 털어넣었다.

“나도 뱃놈이 다 됐나보다. 나도 너처럼 이런 술 마시면 얼굴 찌푸려질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맥주 같은 말랑한 술로는 취하지도 않아.”

아저씨는 잔잔히 웃으며, 빵껍질 튀김을 하나 집어 깨물었다. 표정이 슬퍼보이지는 않았지만, 뭐랄까. 음. 미미한 미련 같은 게 남겨져 있는, 돌아가서 되돌리기에는 너무 소소한 미련이지만 그렇다고 없다고 치부할 수만은 없는 미련 같은게 있는 느낌?

“기리인. 제도로 가는 길이라고 했지?”

“네. 같이 온 형들이랑 레카 시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제도로 갈 거에요.”

“그래... 그러면 이번 여행에서는 대륙 남쪽으로 가 보는 일은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이 배가 어디까지 다닐 수 있는 지 아니?”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니아트 강은 레카 시 부분에서 확 넓어지며 유속이 느려진다. 도도하게 흐르던 강은 남부에 이르러 여러 지류로 갈라지며 바다로 빠져나가는데...

“마음만 먹으면 바다까지 갈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아저씨는 씩 웃으며 말했다.

“갈 수야 있지. 하지만 이 배는 밑바닥이 평평한 편이잖아. 강에서는 유속을 크게 거스를 필요가 없는데다가, 필요하다면 옆의 수레바퀴를 마력으로 돌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바다에서는 그런 배로는 해안선에 붙어 다녀야 해.”

“그래요?”

“먼 바다를 다니는 배들, 어선 말고 큰 배들 말이다. 그런 배들은 정말 멋지게 생겼지. 날렵하고, 매끈하고, 그래. 바람이고 파도고 다 뚫고 나가버릴 것처럼 말야.”

아저씨가 그리는 것은 그런 바다인 건가. 아저씨는 그믐이라 달이 없어 별만이 가득하게 떠오른 밤하늘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며, 잔을 홀짝였다.

============================ 작품 후기 ============================

전작도 그렇고 이번 작품도 그렇지만, 저는 명쾌한 악역을 만드는 게 늘 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악당이 나오고 그 악당을 다 때려부수는 시원한 전개 저도 참 좋아합니다만, 음... 저는 뒤통수는 결정적인 순간에 더 이상 상대가 저항하기 힘들 때 후려쳐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라 그런지, 멍청한 악당이 자멸하는 구도는 그리기가 쉽지 않더군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개가 느려지고, 취향 타는 글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어제 갑자기 확 늘어난 조회수와 선작, 추천에 비해 오늘은 예전 수준인 걸 보니 제 전개 스타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아, 물론 악당도 나오고, 사이다도 나오고 다 할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사이다는 더운 날 마셔야 제 맛 아니겠습니까. ^^;

이번 챕터의 줄거리는 아마 다들 예상하실 수 있을 통속적인 전개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Oldies but Goodies도 가끔씩은 좋잖아요?

(리코멘)

디마프 님 // 감사합니다. 힘내서 열심히 쓰겠습니다.

두부세모 님 // 글쎄요, 오늘 저녁을 기다려주세요 ;)

melontea 님 // 누군가를 기분좋게 했다니 제 선행 점수가 +1점 되었겠군요 ㅎㅎ 코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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