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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75화 (75/309)

00075 4. 누군가의 즐거움이 누군가에게는 슬픔 =========================

“비키 씨... 여긴 어쩐 일로...”

“기리인 군에게 반해서 왔다...면요?”

그녀의 여유 넘치는, 나지막한 말. 아마 내가 조금만 멍청했거나 조금만 경험이 없었어도 저거에 넘어갔을 거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야밤에 찾아와서 하시는 농담으로는 좀 부적절한 것 같군요.”

이제 내 눈은 어둠에 적응해서인지 약한 빛으로도 그녀의 얼굴을 분간할 수 있었다. 비키 씨는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짓다가, 역시 피식 웃어버렸다.

“그 날 갑판에서 알아봤지만,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군요. 실례가 아니라면,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올해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숨을 확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열 아홉이라구요? 세상에. 그런 사람이 크주크랑 그렇게 단시간에 친해질 수 있다고? 타고 났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겠네.”

은근슬쩍 말 놓기냐... 하지만 지금은 그걸 말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저, 비키 씨. 왜 여기 찾아오셨는지 아직 말씀 안 하셨어요.”

“확실히 열아홉 답지 않군요. 이런 상황에서 그런 얘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적어도 기리인 군보다 열 살은 더 먹었을 텐데.”

생각보다 쉽지 않은 상대다. 저 낮고 약간은 끈적거리는 느낌이 나는 말투로, 대화의 주도권을 찾아오려는 내 방금의 시도를 바로 툭 쳐냈다. 평소라면 이런 타입의 대화를 즐기는 편이다. 요안나 선생님과 자주 이런 식의 대화를 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말씀해 주시지 않을 거라면, 제가 나가겠습니다.”

나는 이불을 허리에 두른 채 몸을 일으켰다.

“만약 당신이 그런다면 나는 소리를 지르겠어요.”

내 쪽을 똑바로 바라보며 갑자기 단단해진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어쭈.

“그렇게 나오실 겁니까?”

어쩔 거냐는 듯, 고개를 약간 삐딱하게 기울여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 나는 웃으며, 바지를 집어들었다.

“한 번 해 보시죠. 어떻게 되는가.”

“배에서의 범죄 행위는 선장과 선원들에게 처벌권이 있다는 거, 알려나 몰라요?

보통 사람들 같으면 그 협박에 넘어갔겠지.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같이 다니는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서 말이다.

“선원들이 몰려오면 저는 제 일행을 깨울 겁니다. 보장하지요. 선원들이 여기에 대해 조사하겠다고 나서는 순간, 저희 일행이 되돌려보낼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저희 일행 중에는 마법사도 있지요. 그 마법사의 주특기 중 하나가 흔적을 확인하는 마법이라고 하던데요.”

“...거짓말.”

내가 이겼군.

“못 믿으시겠으면 한 번 해 보십시오. 그 마법사가 실제 행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입증해  주면 제 결백을 입증할 수 있겠군요. 아, 세자르 씨에 대한 해명도 준비하셔야겠네요. 그것까지 저희가 해 드리기는 힘들겠습니다.”

나는 바지와 셔츠를 집어들고 그녀에게서 돌아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대놓고 속옷차림의 앞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그 때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좋아요. 미안해요. 용건을 말할게요.”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아, 물론 안다. 여자에게 아득바득 이기려 들었다가는 나중에 낭패보는 경우가 많다는 거.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콧대를 한 번 꺾어놓지 않으면 저 쪽의 의도대로 휘둘릴 수도 있으니까, 한 번은 끊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학생 때부터, 나에게 어설프게 밀당질을 하던 선배들에게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지 여러 번 확인시켜 준 경력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나는 침대 머리맡에 놓인 마력석 등을 켰다. 호박빛의 불빛이 한쪽 구석을 은은하게 약하게 밝혔다. 그리고는 옷을 입지 않고 옆에 둔 채, 이불로 속옷 한 장만 입은 하반신을 가린 채로 침대에 앉았다. 비키 씨는 나를 바라보며, 뭐라 말할 듯 머뭇거리다가 주저하다가를 수 차례 반복하더니, 결국 결심했는지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그 들썩거리는 동작이 비키 씨의 내 손 안을 채우고도 약간은 삐져나올 정도의 크기인 가슴을 가볍게 들썩거리게 했다. 스물 넷, 아직 한창 때의 가슴은 늘어져 출렁이는 것이 아닌 탱탱함을 유지한 채 앞으로 뻗어나와 있었다. 아. 불을 밝히지 말 걸. 불을 밝히니 비키 씨의 퇴폐적인 듯 고혹적인 분위기가 확 하고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엿들으려던 건 아니지만, 아까 크주크의 왕좌 방어전 표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입술을 깨물다가 말했다.

“가격을 불러요. 그 표를 사겠어요.”

아직도 자존심을 지키려는 듯 고고한 태도를 유지하는 그녀였다. 저런건 또 내가 용납 못하지. 내 성격이 더러운 면이 있거든. 부탁하는 주제에 일말의 자존심이나마 지키려는 태도를 내가 그냥 둘 것 같아? 협상을 하고 싶으면, 자기 감정은 뒤로 미룰 줄 알아야지.

“팔겠다고 하지도 않았는데요.”

“팔아요. 당신은 그 표의 가치가 얼마였는지도 몰랐잖아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럴 수가 없겠네요. 첫째로는 이 표가 내 표이기는 하지만 이걸 내 마음대로 처분했다가는 우리 일행들이 너무나 실망할 겁니다. 아까 반응 보셨잖아요. 둘째로, 크주크 형은 만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은 나를 아끼고 믿어서 이 표를 주었습니다. 내가 이 표로 금전의 이득을 취한다면 형과의 사이는 영원히 틀어지게 되겠죠.”

짧은 시간에 논리를 짜냈는데 내가 생각해도 설득력이 강한 논리들이 줄줄 흘러나왔다. 이봐, 시스템. 혹시 ‘고급 언변’ 수치와 지금 내가 저런 말을 뚝딱 해낼 수 있는 것과 연관이 있냐?

‘띠링!’

<고급 언변과 냉철의 조합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내가 ‘시스템’과 잠시 만담을 나누는 동안 비키 씨는 오른손의 손톱을 물고 당황과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약간 돌리고 있었다. 나는 협상에 대해 요안나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걸 기억한다. 아주 유용한 조언 중 하나였으니까.

비키 씨가 원하는 것은 티켓을 얻는 것. 하지만 그건 내가 들어줄 수 없다. 그러면 차선책으로 택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일까. 아니, 그 전에.

‘나는 비키 씨에게 뭘 원하나?’

솔직히 말해 비키 씨의 몸은 남성이라면 탐내지 않기 힘든 몸이었다. 반쯤 뜬 눈이 만드는 예의 그 고혹적인 분위기에, 탱탱한 가슴과 엉덩이에 잘록한 허리가 그리는 곡선이 만드는 농염함. 경험이 적다고는 할 수 없는 나로서도 그녀 정도의 여성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장미를 꺾으면 찔리기 마련이고, 독이 든 먹이를 먹으면 배탈이 나기 마련이다. ‘냉철’이 발동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나는 지극히 냉정히 생각할 수 있었다. 내가 가장 원하는 건, 그녀의 몸을 취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건, 이후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뒷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부탁이에요. 시세의 두 배를 드릴게요.”

그녀는 약간은 애절해진 목소리로 말해왔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스무 배라도 팔지 않겠습니다. 아니, 그보다. 제안을 낮에 저희 일행이 있는 가운데 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희 일행이 티켓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그 티켓은 저 혼자만의 것이라고 보기 힘들 것 같네요.”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아아.

그녀를 본 첫 날, 갑판에서처럼. 그녀가 소리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그때처럼, 나직한 빛을 받아 토파즈색으로 물든 눈물이 그녀의 역시 토파즈색으로 물든 얼굴 위로 또르르 흘러내렸다. 눈을 감은 채 잠시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부탁이에요...”

그러더니 그녀는 내 앞으로 다가왔다. 저건 연습의 결과일까, 아니면 본능적으로 타고나는 걸까. 그녀의 걸음걸이 하나하나마저도 남자의 시선을 뺏는 농염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내 바로 앞에 서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시키는 대로 뭐든지 할 게요, 부탁이에요...”

‘띠링!’

<냉철이 발동합니다.>

후우. 위험했다.

“죄송합니다.”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나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내가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러더니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입고 있던 슬립을 아래로 스르르 벗어내렸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욕망’이라는 단어를 형상화하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여자처럼 되지 않을까.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 봉긋하고 탄력넘치는 가슴과 아직 핑크빛을 유지하고 있는 돌기, 유려한 허리의 곡선, 풍성한 골반과 탄탄한 허벅지. 아. 그녀에게서 나는 사향의 향이 두어 배는 강해진 것 같았다.

“이래도 안 될까요?”

“먹어서 탈이 날 것 같은 음식은 먹으면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나는 얼른, 내가 두르고 있던 이불을 벗겨내어 비키 씨에게 둘러주었다. 그녀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으윽. 아까 작정을 하고 고혹적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보다, 이 멍한 표정이 훨씬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여자가 옷을 다 벗었다는 건 자존심까지 버리고 이야기한다는 거에요.”

약간 표독스러워지려고 하는 그녀의 말투. 자. 여기서 잘 해야 한다. 여기서 그녀를 잘 달래서 무사히 넘어가지 못한다면, 나는 비키 뢰이너라는 사람을 내 적으로 만드는 결과가 된다. 그리고 그건 또 조용히 넘어가는 것하고는 많이 다르니까.

‘띠링!’

<고급 언변의 하부 기능인 ‘유도’가 발동합니다. 당신은 대화 상대에게서 이야기를 끌어내거나, 그 이야기를 토대로 당신이 원하는 쪽으로 협상을 전개하거나 할 수 있습니다. 유도의 스킬레벨은 현재 Lv. 1이며, 고급 언변 스탯 92의 보정을 받습니다.>

...이런 상황이 닥치기 전에 미리미리 이야기 좀 해 주면 안돼?

<그러면 당신이 이런 걸 믿고 너무 무모하게 행동할 우려가 있습니다.>

음. 아무튼.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나를 노려보는 비키 씨를 보았다. 무섭다기 보다는, ‘내가 울면서 부탁하는데도 그러기에요?’ 하는 심리 공격을 하는 느낌이다. 마음이 아프려고 한다. ‘냉철’이 아니었으면 아마 나는 원하는대로 하십시오 그렇게 굴복했을지도.

“저, 비키 씨. 일단은 얘기를 좀 먼저 들어볼 수 있을까요?”

“무슨 얘기 말인가요.”

“비키 씨가 왜 이 티켓을 절실하게 원하는지 말입니다. 그 이유를 알면 뭔가 좋은 합의점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데요.”

그녀는 나를 보고, 뭐라 말하려 하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손을 들어 맺혀 있던 눈물을 닦아내고는 자리에 앉았다. 윽. 이불은 주고 갈 것이지.

============================ 작품 후기 ============================

씬이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

날이 따뜻해졌네요.

따뜻한 날씨에는 이러다 다시 추워질까 먼저 걱정이 앞서는 걸 보면 저도 참... ㅎㅎ;;;

취향 타는 이야기를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고 가시면 더욱 열심히 쓰겠습니다.

디마프 님 // 1빠(?!) 감사합니다.

subbidese 님 // 실제로 사향냄새 맡으면, 전에 아르토 장면에서 썼듯이, 뭔가 좀 꾸릿~한 냄새라는 생각도 듭니다. 흥분되는 상황에서는 그게 흥분 효과를 확~ 높이는 모양이더라구요. (저, 저는 모르는 일입... 그냥 그렇게 들었습...)

화이트프레페 님 // 감사합니다. 걱정과는 달리 그 부분이 술술 뽑혀져 나왔는데 좋아해 주시니 저도 뿌듯하네요.

eastarea 님 // 읽어주시고 코멘해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힘내겠습니다.

melontea 님 // 감사합니다. 개연성과 이야기와 쉽게쉽게 읽히는 것 모두 놓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고는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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