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9 4. 누군가의 즐거움이 누군가에게는 슬픔 =========================
처음 훈련하는 걸 봤을 때처럼 크주크 형은 제자리에서 팔굽혀펴기를 했다가,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점프하는 동작을 하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힘들어보이는 동작을 형은 얼굴만 약간 찌푸린 채 전력을 다해 하고 있었다.
“어? 기리인!”
형은 숨을 몰아쉬던 와중에 내 쪽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무서운 점은 그러면서도 조금도 동작은 쉬지 않고 있었다는 거다. 입으로 셋, 넷, 다섯 하고 세어가던 뮤리나 누나도 나에게 손을 들어보였지만 입은 쉬지 않고 계속 일정하게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같이 할래?”
“그럼 서른 개만 할 게요.”
마침 크주크 형이 이야기하는 동안 총 세트가 70까지 이르렀기에 나는 바로 형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바로 서서, ‘하나’에 쪼그리고 앉았다가, ‘둘’에 전신에 탄력을 주며 엎드려 뻗쳐 자세로 확 전환했다가, ‘셋’과 ‘넷’에 절도있게 팔굽혀펴기를 한 후, ‘다섯’에 다리를 당겨 다시 쪼그리고 앉았다가, ‘여섯’에 일어서서, ‘일곱’에 제자리에서 힘껏 온 몸을 젖히며 뛴다. 와. 한 세트 하는 것만으로도 뒤지게 힘드네.
“자! 템포 업!”
뭐?! 형의 외침에 뮤리나는 기다렸다는 듯 “하나, 둘, 셋, 넷,”을 전보다 빠른 속도로 말하기 시작했다. 왁왁왁! 따라가기 바쁘다! 쪼그리고, 쭉 펴서 엎드려뻗치고, 팔굽혀펴기 내려갔다, 올라왔다, 다시 쪼그리고, 확 일어서고, 제자리 점프, 바로. 쪼그리고, 엎드려뻗치고...
“헉! 헉!”
어느새 나는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바크 선생님의 혹독한 훈련을 받은 이후 매일 몸을 단련하는 것을 쉬지 않으면서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크주크 형이 하는 것에 비하면 니아트 호수에서 물 한 컵 떠낸 거나 마찬가지였나 보다. 헉! 헉! 힘들다! 어느새 나는 무아지경으로 움직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느 순간,
“그만!”
뮤리나 누나가 외쳤고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헉, 헉. 형은 어쩌고 있나 돌아보니 허리에 손을 얹고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나를 내려다보면서, 웃고 있었다.
“기리인, 주저앉지 말고 일어나서 가볍게 몸을 풀어. 호흡 고르는 것도 수련의 일부야.”
네, 네. 가만히 있다가는 뮤리나 누나가 들고 있는 속이 빈 나무막대로 맞을까봐 얼른 일어나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가볍게 다리근육을 움직이던 크주크 형이 말했다.
“그래도 내 속도를 따라오네? 체력만 좀 키우면 훌륭한 재목이 되겠는데?”
그거야... 제가 민첩을 100까지 올렸기 때문이죠. 어디가서 말할 수는 없겠지만... 형은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크주크 형은 갑자기 그 자세에서 휙 하고 내 쪽으로 주먹을 날려왔다. 으악! 반응할 새도 없이 고개만 뒤로 젖히며 옆으로 꺾자, 형은 휘유~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반응속도도 저만하면 만족스럽고. 눈 안 감는 것까지 바라면 욕심이겠지.”
형은 그러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나 왕좌 방어전 끝나면 정식으로 배워 볼 생각 없냐? 꽃미남 파이터! 여자들이 다들 자지러질걸?”
나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제도로 가야 해요. 지금 같이 다니는 형하고 같이 가야 하고, 거기 가서 만날 사람들도 꽤 있구요.”
“흐음. 아쉽네.”
별로 진지하게 물어본 건 아닌 듯(당연하겠지) 형은 별 아쉽지 않다는 투로 저 말을 하더니, 말했다.
“우리 내리려면 오늘하고 내일 밤 있지? 오늘 밤에 내가 격투기의 기본을 가르쳐주마.”
“네?”
“네는 무슨 네야, 임마. 챔피언한테 이런 거 배우는 기회가 뭐 자주 있는 줄 알아?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들여야지. 너 오늘 밤에 별 일 없지?”
당황해서 뮤리나 누나를 보니 누나는 웃으며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을 막을 순 없겠구나.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형은 박수를 한 번 짝 치고는 말했다.
“자! 어제 했던 훈련 다시 해보자! 기리인,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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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제보다 더 잘 맞출 수 있었다. 형 덕에 나는 휘어지며 날아가는 화살을 실컷 연습할 수 있었고, 동시에 두 궤도를 그리며 왼쪽과 오른쪽, 위와 아래 등으로 날아가게끔 할 수도 있게 되었다. 형은 기상천외하게 날아오는 화살에 진땀을 흘리며 어찌저찌 막아내었지만, 사각에서 들어오는 옆구리 쪽이나 턱을 노리는 화살에 몇 방 얻어맞고는 했다.
“야! 한 번 더 해!”
무서운 것은 형의 요청으로 거듭해서 연습을 하면서였다. 온갖 조합으로 화살을 날렸지만 형은 점점 더 잘 그것들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정말 고도의 집중상태에 들어간 듯 형은 정면으로, 측면으로, 다리로, 아래에서 날아오는 화살들을 쳐내고, 피하고, 걷어내며 주먹과 발로 상상의 상대에게 반격해왔다. 내가 ‘이건 형의 연습을 도와주는 거다’는 걸 잊고 있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진지하게 마불살을 강하게 날리는 걸 생각해 봤을 것 같다.
결국 30발씩 세 차례 쏘고 나서 형은 숨을 헐떡이며 손을 들었다.
“그만! 그만! 어우, 시합하는 것보다 더 힘드네!”
빈 말은 아닌 듯 형은 갑판에 드러누워 버렸다. 헐떡이는 크주크 형은 마치 맹수가 먹이를 쫓아 전력질주한 후 먹이의 다리를 분질러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는 옆에서 식사 전에 숨을 헐떡이는 모습 같았다. 만약 내가 지금 손에 칼을 들고 있다고 해도, 맨손인데다가 무방비한 게 분명한 형에게 달려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문득 나는, 비키 씨가 해 줬던 얘기가 생각났다. 형이 나중을 팔아 지금을 사는 약을 먹고 있다고 말이다. 형의 저 강함은, 그 약물 때문일까? 모르겠다.
“기리인, 나 좀 도와줘.”
형이 계속 대자로 뻗어있는 동안, 뮤리나 누나가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활시위를 내린 후 갑판의 사방에 흩어져 있는 화살들을 주워담고, 형의 훈련 도구들이 들어있는 가방을 집어들어 어깨에 매었다. 어우, 무겁다. 나는 누나의 뒤를 따라, 형과 누나가 함께 쓰는 6호실로 향했다.
“누나.”
“응? 불렀니?”
“누나는 형이랑 같이 레카로 내려온 거야?”
누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빠가 먼저 집에서 도망갔어. 엄마아빠가 반대하니까 편지 한 장 남기고 훌쩍 떠나버렸거든. 몇 년 지나서 나도 성인이 되고, 오빠가 왕좌에 오르고 나서 집에 찾아와서는, 자기를 좀 도와달라고 하더라고. 아무래도 오빠가 경기 외적인 것까지는 신경쓰기 힘드니까... 엄마아빠도 가서 오빠 밥도 좀 챙겨주고 하라고 하더라고.”
“그럼 온지 얼마 정도 된 거야?”
“음... 한 2, 3년?”
그랬구나. 그래서 어제 낮에 누나는 비키 씨를 모르는 것 같은 반응을 보였던 거구나. 어느새 방에 도착했다. 누나가 6호실의 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들어가서 한쪽 구석에 가방을 잘 내려놓았다.
“고마워, 기리인. 뭐라도 주고 싶은데 뭐 줄 만한게 없네.”
“뭐 큰 일을 했다고. 이제 뭐해?”
“음... 글쎄. 오빠가 뭐 할지 물어봐야지. 오늘 훈련할 거는 대충 했거든. 휴식하고 오후에 체력단련 운동하면 돼. 아직 점심시간은 조금 남았는데 할 일이 없네...”
그러더니 누나는 나를 보며, 히죽 웃었다.
“기리인, 나 좀 더 도와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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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달라는 게 뭔가 했더니...”
나는 누나가 배낭에서 꺼내 준 줄을 방 안 이곳저곳에 묶었다. 누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야, 이런 빨래는 하루만 미뤄도 냄새 엄청 난단 말이야. 오빠는 이런 거 신경도 안 쓰고. 니가 키가 커서 다행이다.”
매일 땀을 흘리는 격투가는 생산해내는 빨래의 양도 어마어마한 모양이었다. 누나는 빨래해 온 칼라없는 셔츠, 속옷, 짧은 바지 등을 나에게 한 장씩 건네주었고, 나는 그걸 내가 조금 전에 걸었던 빨래줄에 널었다. ‘탁탁 털어서 널어야지’ 하는 누나의 잔소리를 들어가며.
“다 됐어 누나?”
“응, 조금만 더 널면 돼. 이 쪽으로 올래?”
나는 바닥에 내려서서, 조금 전까지 내가 딛고 있던 의자를 집어들고 누나쪽으로 한 걸음 걸었다. 그 순간.
“어어엇!”
나는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뭔지 모를 것을 밟고 비틀대면서 앞으로 넘어져 버렸다.
“아야...”
어, 이건 내 소리가 아닌데. 뭐지. 정신을 차려 보니... 세상에. 이건 무슨 이야기꾼의 재담 중 한 장면도 아니고. 나는 하필이면 쓰러지면서 누나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도, 아주 민망한 포지션으로 말이다. 마치, 곧, 섹스를 시작할 연인들 같은. 나는 당황해 물었다.
“미안, 누나, 괜찮아?”
“으, 응... 괜찮아... 머리 안 부딪혔어...”
그 말을 왜 얼굴을 붉히면서 하세요...
그 때, 하필이면 그 때, 방 문이 벌컥 열렸다.
“뮤리나! 밥 먹으러 가...”
크주크 형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아주 민망한 자세로 바닥에 겹쳐져 있는 우리 두 사람을 보았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기리인.”
갑자기 완전히 변한 목소리로 크주크 형이 말했다.
“그렇게 안 봤는데, 감히 내 동생을 건드려?”
“네? 에? 에?”
나는 황급히 뮤리나 누나의 몸에서 일어났다. 크주크 형은 주먹을 말아쥐고 한 걸음씩 나를 향해 다가왔다. 우와. 산의 왕이라는 백호가 다가오는 느낌이 이럴까. 온 몸에 파괴와 폭력을 두른 형은 정말, 지금까지 겪었던 어떤 것보다도 정말 무서웠다.
“이런 짓을 저질렀을 때는 각오는 돼 있었겠지?”
“네? 그, 그게 아니고, 형!”
“형이라고 부르지도 마라.”
형은 한 걸음 한 걸음 더 내딛었다.
“아, 그게 아니라니까요, 형!”
“그게 아니긴 뭐가 아냐. 신의 천칭 앞에서 네 아랫도리의 행실을 반성해라!”
“오빠! 멈춰!”
============================ 작품 후기 ============================
네 뭐, 러브코미디의 전형적인 클리셰죠(...)
이렇게 기리인은 또 다른 여자와 얽히게 되고...
약간은 클리셰범벅의 함량미달에 가까운 연재분입니다. 죄송합니다.
전개를 위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취향타는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선작과 추천, 그리고 코멘트 부탁드립니다. 하나하나 늘어날때마다 무한한 보람을 느낍니다.
(리리플)
디마프님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 좋은 밤 되셨나요? ;) 감사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추리물은 저번 챕터로 족하다는 생각이... 이번 챕터는 추리물 요소는 안 넣으려고 합니다.
melontea 님 // 정말 감사합니다. 해외에 거주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아직 개강 전이신지? 어느 쪽이든 읽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subbidese 님 // 상단주도 안 죽었고, 아직 아무도 안 죽였으니까 기리인보고 너무 코난같다고 그러지 마세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