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0 4. 누군가의 즐거움이 누군가에게는 슬픔 =========================
다행히 내가 죽기 전에 뮤리나 누나가 형을 막아줄 수 있었다. 간신히 형을 막아세운 누나가 상황을 설명하고, 형은 빨래줄과, 내 손에 들린 빨래를 보고는, 멋쩍게 웃어버렸다.
“아하하! 하필이면 자세가 그래가지고! 미안!”
“괜찮아요. 좀 오해할 만한 자세이긴 하죠. 솔직히 말해 형을 경기장에서 상대하는 선수들이 왜 무서워하는지 알 수 있게 된 좋은 시간이었어요.”
이 정도로 가볍게 까는 건 괜찮겠지? 난 진짜 죽는 줄 알았으니까. 형은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고, 뮤리나 누나는 옆에서 그걸 보며 웃고 있었다. 얼굴에 약간 붉은 기가 도는 건 웃어서 그런 거겠지?
“야, 진짜 미안하다. 우리 동생이 좀 이쁘잖냐. 그래서 언제든 덮치려는 사람 나올까봐...”
“형 진짜 괜찮아요. 그냥 한 번의 해프닝이잖아요?”
나는 일어서서 옷을 털고는 헤죽 웃어 보였다. 형은 내 웃음을 보자 비로소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형,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요. 뮤리나 누나가 정말 예쁘긴 한데, 형 옆에 있으면 무서워서 남자들이 안 올 것 같은데요.”
형은 그 말에 누나에게 시선을 돌렸고 누나는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벙찐 표정으로 있다가,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야! 내가 무서워서 못 다가올 정도면... 그 남자가 이미 마음가짐 자체가 글러먹은 거네! 못된짓 하려고 다가온다는 거 아냐! 그런 놈들은 없는 게 나아!”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나직한 누나의 말에 형은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에고.
“형, 누나. 이러다 싸우겠어요. 밥이나 먹으러 가죠. 마침 밥 때 된 거 같은데.”
뭐라 입을 열려던 형은, 내 말에 자기의 말을 삼키고는, “그래. 가자.” 하면서 앞장섰다. 누나와 나는 서로 얼굴을 보고 풋 하고 웃고 말았다.
“누나, 갈까?”
“그래.”
나는 마치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는 사람처럼 과장되게 팔을 내밀었고, 누나는 다시 한 번 풋 웃으며 내 팔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그리고 우리가 방 바깥으로 나갔을 때, 형은, 문 밖에서 마치 시골 마을의 입구에 세운다는 토템처럼 우뚝 서 있었다. 형의 워낙 넓은 등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아 무슨 일인지 모르고 있을 때, 갑자기 형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형이 지나치고 나서야 나는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비키 씨가 바로 옆에 혼자 서 있었다. 형은 문을 열었다가, 비키 씨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가, 다시 걸어가기 시작한 거였다. 형의 약간은 평소보다 큰 걸음걸이,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등이 말을 대신 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누나. 얼른 가자. 배고프다.”
“응? 어, 응.”
나는 좋은 타이밍에, 뮤리나 누나가 비키 씨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가운데로 슬쩍 끼어들었다. 왠지 뮤리나 누나가 이 관계를 알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 눈에 비키 씨의 표정이 스쳤다. 이루 뭐라 말할 수 없는, 온갖 감정이 뒤섞여 소용돌이치고 있는 표정이었다. 누군가 물어본다면 아마 ‘슬퍼하는 표정’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그것 말고도 뭔가가 더 있는 것 같았다.
“근데 누나. 형 옆에서 도와주려면 누나도 이것저것 많이 알았겠네?”
“어? 응... 처음에는 거의 맨날 날밤 샜지... 오빠 훈련 따라다니고, 밥 챙겨주고, 공부하고...”
혹시라도 뮤리나 누나가 눈치를 챌까 이런저런 말을 붙이며, 나는 비키 씨를 지나쳤다. 잠시, 비키 씨와 나의 눈빛이 마주쳤고, 그녀가, 한없이 슬픈 표정으로, 나에게, 눈짓으로 인사해 왔다.
고마워요.
아니에요.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런 의미들이 지나가고,
우리는 다시 등을 돌려 원래 가려던 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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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는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아, 물론, 아무 일을 안한 건 아니다. 나는 에아임 형의 옆에 앉아, 형이 찾아다 달라는 종이를 찾아주거나, 형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적거나 했다. 가장 결정타는 형이 나보고 “너 글씨 잘 쓰냐”고 물었을 때였고, 내가 심한 악필임을 보여주자 형은 좌절하고 말았다. 아니, 형은 꽤 글씨를 잘 쓰는 편이던데, 직접 쓰지 왜.
그렇게 오후를 보내면서 눈이 퀭해진 에아임 형을 보며 나는 수사기사는 할 짓이 못 된다고 다시 결심했다. 설령 마법사가 안 돼도 다른 거 해야지. 저렇게 서류에 파묻혀 사는 건 내 취향이 아니야.
작업을 마치고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데 형이 말했다.
“야, 기리인. 내일 내리는데 정리는 다 해 놨니?”
“네? 내일 내린다고요?”
형은 뭐 못 먹을 걸 먹었냐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늘이 3일째 밤이잖아. 이미 레카 시에 거의 도착했어.”
“어, 어제, 티르완 아저씨가 내일 보자고 했는데...”
“착각했겠지. 몇 군데를 오가는 선원들은 가끔 이곳과 저곳을 착각하는 경우가 있어.”
그런가... 티르완 아저씨가 나를 일부러 피한 것 같지는 않으니 정말 그런가. 좀 아쉽다. 아직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가 많은데. 티르완 아저씨에게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오늘 밤에 미리 짐 정리해 둬. 내일 바로 내릴 수 있게끔.”
“묵었다 가실 거죠?”
“그럼. 너 그 티켓이 얼마나 귀한 건지 아냐? 이 복덩이야.”
형은 내 머리를 또 거칠게 헝크러트렸다. 이거 버릇되겠다.
“그거 기다리는 동안 황도로 가는 길을 모색해보자. 기리인, 황도에 다녀본 적 없지?”
“아시면서. 저는 북부 나온 것도 생전 처음이에요.”
“황도는 대륙에서 제일 안전한 여행길이야. 하루 거리마다 여관과 역참이 있고, 친위군 소속 황도 경비대가 매일 순찰을 하지. 지금 생각 같아서는, 마차 여행하는 상단이 있으면 거기 끼어 가거나, 아니면 아예 우리끼리 마차를 빌리는 걸 생각하고 있다.”
나는 형에게 맡길게요, 라는 뜻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그 사이 서류 정리를 다 마쳤는지 서류를 정리해 배낭에 넣고는, “자. 밥 먹으러 가자.” 하고 나서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오늘 저녁엔 뭐 하기로 했니?”
“아, 크주크 형이 격투기 가르쳐준다고...”
“헐. 진짜? 뭐 하루 사이에 얼마나 가르쳐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대가에게 하루 지도받는 건 대박이긴 하지...”
그렇게 얘기하던 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너 검술 제대로 배워 본 적은 없지?”
“어, 네. 그냥, 기본적인 파지법하고, 단도랑 숏 소드 쓰는 법만...”
“롱 소드가 하나 있긴 있어야 하지 않겠냐?”
“어, 뭐, 활이라는 게 언제나 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제 활은 좀 평소에 관리를 조심해야 하기도 하고...”
“그럼 황도 가는 동안 매일 저녁에 형한테 검 좀 배워라.”
“예에?”
제국 수사기사한테 무예를 사사받는다고? 수많은 전설을 찍어내는 사람의?
“아, 사실 너도 봤겠지만 나 북부에서부터 여기까지 전혀 무예수련을 못 했어. 녹이 스는 것 같아서. 너 가르치면서 나도 좀 회복 좀 하게.”
“형을 돕는 것도 되는 거라면 할게요. 저도 배우고 좋지요.”
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크주크랑 밤에 수련을 할 거라면 식당에 물 한 통 달라고 해라. 훈련이 끝나고 술은 못 마시겠지만 물이라도 마시면서 얘기하면 되겠네.” 라고 말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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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투기의 기본은 뭔지 아니?”
저녁식사 후, 갑판으로 나를 불러낸 형은 뜬금없이 그런 말을 던졌다. 선원들이 우리 곁을 지나 이리저리 다니며 내일의 상륙을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티르완 아저씨는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저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글쎄요... 많이 때린다?”
“그것도 맞지. 또?”
“그럼 안 맞는다?”
“그것도 맞고.”
형이 무슨 트리클 교 교리문답 하듯이 말했다.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가끔씩 스포츠로 하는 격투기가 있긴 하지만, 내가 있는 격투기는 결국 상대를 쓰러트려야 하는 거니까 실전과 거의 같아. 그러니 너한테 가르쳐 줄 것도 실전에서의 싸움이라고 봐도 되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형이 무작정 치고 받는 싸움을 가르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진지하다. 심오하고.
“우선 하나만 전제하고 들어가자. 여러 명을 상대하거나, 아군과 적이 잔뜩 섞여있을 때의 싸움은 지금 내가 가르칠 것과 많이 다르다. 그 난전은 다른 기회에 배워라. 단 하나 가르쳐주자면, 만약 혼자 많은 사람을 상대하게 될 경우가 있다면 전장을 만들어라. 30명을 상대해도 1:1을 30번 할 수 있다면 승산이 없지 않으니까.”
나는 점점 형의 얘기에 빨려들어가는 자신을 느꼈다. 가르치는 재주도 있나 보네.
“한 명을 상대하는 방법으로 돌아가자. 니가 두 가지를 얘기했지? 많이 때리고, 안 맞는다. 하지만 완전히 안 맞을 수는 없어. 가끔씩은 맞는 걸 감수해야 할 때도 있고.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형에게 물었다.
“‘잘’ 맞아야겠네요. 빗겨맞고, 막고, 쳐내고... 형이 하는 연습도 그런 거죠?”
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맞아야 한다. 급소를 잘 막고, 상대의 빈 틈을 노린다. 내가 아까 보니까 너의 속도는 꽤 훌륭해. 니가 아직 너의 속도를 전부 활용할 방법을 모르고 있는 거야. 오늘하고 내일...”
“아, 형. 저희 내일 내리는데요.”
“응? 선원들이 내일모레라고...”
“저도 잘못 알았어요. 내일 아침에 내린대요.”
형은 뭐야, 하면서 머리를 긁었다. 순간 아까의 진지했던 격투기의 대가는 사라지고 동네 바보 형만 남았다.
============================ 작품 후기 ============================
원래는 배에서 하루 더 보내려고 했는데, 이러다가 또 3챕터 재판되지 싶어서 하루를 잘라냈습니다. 티르완은 도시에서 또 어떻게 보게 되겠죠.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선작과 추천, 코멘트 좀 많이많이 부탁드려도 될까요? ^^;;;
(리코멘)
subbidese 님 // 3부에서 좀 정치얘기 같은거 많이 했으니 이번에는 좀 말랑끈적한 걸로...
화이트프레페 님 // 그 편이 19금 끌어내기는 더 좋았을수도...
이문세 님 //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