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1 4. 누군가의 즐거움이 누군가에게는 슬픔 =========================
“그럼 오늘 밖에 없네? 많이 가르쳐 줄 수도 없겠구나.”
잠시 생각하던 형은, 얼마 후 고개를 끄덕이더니, “오른손잡이지?” 하고 묻고는, 나를 왼발이 약간 앞으로 나오고 오른발이 약간 뒤로 물러난 사선 방향으로 서게 했다.
“아까 내가 급소라고 했지만, 사실은 몸의 어디든 급소가 될 수 있다. 한 사람의 전투력을 100이라고 할 때, 단순한 부상, 예를 들면 발목이 약간 시큰한 것만으로도 그것이 80까지 떨어지는 건 흔한 일이야. 하지만 그런 걸 모두 막아가면서 싸우는 건 불가능하다. 만약 그러려면, 아예 싸움에 얽히지 않는 교과서에나 나오는 생활을 해야겠지.”
내가 피식 하자 형은 마주 가볍게 웃더니 말했다.
“기리인, 나에 대해서나, 아니면 격투기 세계에 대해서 거의 모르지?”
내가 머리를 약간 숙이며 쑥스럽게 머리를 긁자 형은 괜찮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기본적으로 격투의 스타일은 크게 두 가지다. 달려드느냐, 물러나느냐. 달려들면서 한 대라도 더 상대를 때리려는 사람이 있고, 물러나면서 상대를 정확하게 쳐서 충격을 주는 사람이 있다. 나는 어떤 타입인 거 같냐?”
나는 형을 돌아보며 생각에 잠겼다. 저 탄력 넘치는 근육들을 보면 형은 어지간한 충격은 씹고 앞으로 돌진하지 싶다. 하지만, 저 통통 튀는 가벼운 몸놀림은 뒤로 물러나면서 마치 고양이처럼 이리저리 움직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느 쪽 스타일을 생각해 봐도 형은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르겠어요.”
“모르겠다고 하는 게 정답이다. 나는 둘 다 가능하거든.”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나.
“치고 들어오는 상대에게, 내가 역으로 치고 들어가는 것도, 빠지고 피하면서 때리는 것도 가능하고, 마찬가지로 거리를 유지하는 상대에게 그 거리를 유지하며 싸우는 것도, 파고 들어서 승부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 이야기를 왜 했냐? 이게 자세를 잡는데 기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형은 내 두 손을 얼굴 앞으로 가져오고, 팔꿈치를 모으게 한 다음, 약간 뒷다리에 중심을 두고 서게 했다.
“이게 기본이다. 왜 아까 그 얘기를 했는가 하면, 그것이 체중이동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야. 앞으로 달려들려면 여기서 몸을 앞으로 실어야 한다. 뒤로 물러나려면 당연히 뒷다리에 실어야겠지. 그럼 무게는 어디에 실어야 할까? 언제든 앞으로도, 뒤로도, 옆으로도 움직일 수 있고, 상대가 나를 어설프게 공격해 올 때 반격할 수 있게끔 뒷다리에 7할의 힘을 남겨놓는 정도가 가장 좋다. 그러면서...”
형은 나와 비슷한 자세로 서더니, 순식간에 왼손, 몸을 돌리면서 오른손, 약간 몸을 뒤로 빼면서 왼발을 낮게, 그 왼발을 앞으로 딛으면서 오른발을 높이 휘둘렀다.
“이게 기본이다. 앞에 있어서 무게가 가벼운 왼손 왼발은 상대를 견제하고 방어나 기초작업에 쓰고, 결정타는 뒤에 있는 오른손 오른발로 하는 거다. 그리고 오른손 오른발을 쓸 때는 항상 허리와 골반을 함께 써야 한다. 이렇게.”
형은 내가 서 있는 자세로 돌아가더니, 오른 주먹을 앞으로 쭉 뻗어냈다.
“알겠냐?”
형은 자신의 허리 쪽으로 눈길을 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몸통과 골반과, 심지어 오른다리까지 돌아가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형은 다시 몸을 바로 하더니 말했다.
“다시 아까의 스타일 얘기를 하면, 격투에는 항상 상대가 있다. 내가 상대를 때릴 수 있으면 상대도 나를 때릴 수 있는 거야. 상대를 빨리 끝내려는 마음에 뒷손 뒷발을 뻗으면, 동작이 커져서 빈틈이 생긴다. 그렇다고 그걸 쓰지 않으면 상대에게 타격을 줄 수 없지.”
아, 어렵다.
“어렵지? 그래, 어려운 게 당연해. 무수한 연습과 시합을 통해 경험으로 터득해야만 할 것을 하룻밤 사이에 말로 전해주려니 그게 어렵지 쉽겠냐. 하지만 내가 제자를 가르친다면 오늘 한 얘기를 제일 먼저 해 줄거다. ‘균형 감각’. 너무 앞으로 달려드는 것도, 너무 안 맞으려고 피하는 것도 좋지 않다. 그래야만 어느 상대를 만나든 자신의 리듬을 유지할 수 있어.”
형의 말은 단순한 격투기의 지도가 아닌, 진리의 파편을 본 기분이었다.
‘띠링!’
<당신은 세련된 무예의 편린을 목격하였습니다. 반복하여 경험을 쌓을 경우 새로이 무예와 관련된 스킬이 생길 수 있습니다.>
<더불어, 다른 무예가를 만난다면 이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것도 좋습니다. 학문이든 무예든 백가쟁명 속에 발전하는 것입니다.>
<무예의 편린 – 1/5>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나보다. 게다가 ‘격투기의 편린’이 아니고 ‘무예의 편린’이다. 모든 무술, 예를 들면 검술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말이겠지.
“에이. 오늘 하룻밤 밖에 없으면 이 이상 나가봐야 소용이 없잖아.”
형은 그렇게 투덜댔다. 나는 웃으며, 가져온 물통에서 물을 따라 형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형. 드세요.”
“어, 고맙다. 안 그래도 평소보다 말을 많이 해서 목이 말랐는데.”
형은 물잔의 물을 한 번에 다 비웠고, 나는 다시 물을 따라주었다.
“오늘 아침에 내가 하는 버피 따라하는 걸 보고 느꼈지만, 넌 속도가 매우 빠르더구나. 시간만 좀 더 있다면 스텝 밟는 법을 가르쳐주면 좋겠는데. 그것도 배우는데 며칠은 걸리는 거라... 딱 하나만 기억해라. 남보다 한 걸음 더 걸으면 기회가 한 번은 더 생기는 거다.”
꼭 격언 같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형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완연한 봄이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낮에는 따뜻했어도 밤에는 썰렁했는데, 이제는 밤에 불어오는 바람마저도 따스한 기운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그믐인 밤하늘은 끝없이 별들을 품고 있었다. 수많은 반짝이는 점과, ‘저울대’와, 비록 술은 아니지만 시원한 물. 이 정도면 기분좋아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고보니 밤하늘 오랜만에 보네...”
형은 평소의 기운넘치는 목소리가 아닌, 약간은 홀가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요샌 밤에 일찍 자요?”
“뭐? 그게 아니고 임마. 나도 무명 선수 시절이 있었잖냐. 지금이야 내 집에 훈련장이 있고 거기에서 할거 다 하니까 볼 일이 없지만, 옛날에는 체육관에서 늦게까지 뛰고 구르다가 밤에 집에 가려고 딱 나서면... 크. 밤에 달님이랑 별님이 온가득 있었지. 너 직업으로 운동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죽어라고 하는지 모르지? 진짜 집에 간신히 갈 힘만 남아있는데도, 저 밤하늘만 딱 보면 힘이 나는 거야. 저 별을 잡고 싶다. 스타가 되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그래,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다, 이런 생각이 나면서 다시 힘이 나게 되지. 그 힘으로 다음날 체육관까지 가는 거야.”
“아... 지켜야 할 사람들요...?”
모르는 척, 툭 던져봤는데, 형은 걸리지 않았다.
“뭐, 동생도 있고, 부모님도 있고, 애인도 있을 수 있고.”
그러더니 형은 내 머리를 아주 가볍게 툭 쳤다.
“얌마, 내가 뭐 여자 한 명도 못 사귀어 본 사람인 줄 알았냐?”
툭 쳐도 아프단 말입니다! 내가 머리를 문지르며 표정을 일그러트리자 형은 하하 웃더니 말했다.
“스타가 된다는 거, 생각만큼 재미있지는 않더라. 나를 물건으로 대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 돈? 여자? 원하는 만큼 가질수는 있지. 하지만 진짜는 없어. 전부 골빈 년들 뿐이야. 나랑 하루 잤다는 걸 자랑하고 싶어해서 달려드는 거지. 유명한 것도 마찬가지야. 은퇴한 격투가가 얼마나 빨리 잊혀지는지 아니?”
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표정은 뭐랄까... 그래. ‘허망’해 보였다.
“내 주변 사람들을 위해 성공하려고 했는데, 그래서 성공했는데, 그러고 나니 주변 사람들과는 점점 더 멀어지네.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뮤리나 누나가 있잖아요.”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걸 알기에 나는 순진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이야기를 꺼냈다. 형은 피식 웃었다.
“그래, 동생이 있지. 동생 때문에 산다 내가.”
형은 아직 허망함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채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분명 비키 씨 생각이 완전히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비키 씨 얘기를 꺼냈다가는, 어떻게 알았냐고 추궁할 테고... 으음... 아. 그래. 지금이라면 이 얘기를 꺼내봐도 괜찮지 않을까.
“형. 기분나빠하시지 말고 들어주세요.”
“기분 나쁠 만한 얘기야?”
“형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서요. 어제 형 방을 지나다가 우연히 방 안을 봤는데, 형이 화장실에 혼자 서 있었어요.”
“그랬는데?”
“형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뭔가를 입에 집어넣고 있었어요.”
형은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돌아보았다. 우와. 순간적으로 엄청 무서웠다.
============================ 작품 후기 ============================
써놓고 보니 조금 짧네요.
목표했던 전개에 뒤쳐지지 않게끔 열심히 쓰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하나 늘어날때마다 큰 힘이 됩니다.
(리리플)
디마프 님 // 언제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subbidese 님 // 끈끈한 장면 곧 넣도록 하겠습...ㅎㅎ;
화이트프레페 님 // 매력 100의 힘인게죠. (시무룩한 개구리 짤방이 들어가야겠는데...)
도그드림 님 // 그러게요. 이 점과 관련해서는 이야기가 있을 예정입니다.
melontea 님 // 아이고.. 통학이 왕복 네시간... 고생하십니다 ㅠ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