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2 4. 누군가의 즐거움이 누군가에게는 슬픔 =========================
형은 ‘이 새끼를 어째야 하나’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그 눈빛이 ‘이 새끼를 죽여서 입을 막을까’ 이런 표정으로 읽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순식간에 추워진 것 같은, 아니 얼어붙어버린 것 같은 순간이 우리 사이를 한참 흘러갔다. 한 순간 한 순간이 흘러갈 때마다 나는 ‘얘기하지 말 걸’ 같은 후회를 무지무지 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형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았어요.”
비키 씨만 빼구요. 형은 다시 내 눈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어깨의 힘을 약간 뺐다.
“그래...”
그러더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충분히 똑똑하고 현명하다고 생각하니까 믿겠다.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말아라. 맹세할 수 있겠냐?”
“신과, 돌아가신 제 부모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게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 이 사실을 말하지 않겠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어?”
“네, 제가 살던 곳에서 대화재가 생겨서...”
물론 내 마음은 진심이었다. 냉정한 계산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보다는, 부모님 이름을 걸고 말하면서 거짓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부모님 얘기를 꺼낸 게 정답이었을까, 형은 눈을 꿈벅꿈벅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그래. 너의 그 맹세를 믿을게.”
형은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한참 죄 지은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형은 그런 나를 돌아보다가 피식 웃었다.
“무슨 약이냐고 물어봐야 되는 거 아냐?”
‘띠링!’
<고급 언변의 하위 스킬, ‘유도’가 발동합니다.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이 쉬워집니다. 유도의 스킬 레벨은 Lv. 1이며, 고급 언변 수치 92의 보정을 받습니다.>
아...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기왕 발동된 스킬을 안 쓸 수는 없다. 나는 어떻게 서두를 꺼낼 까 하다가, 약간 물러나는 인상을 주기로 했다.
“물어보면 가르쳐 주실 거에요? 저는 얘기하면 안 되는 약인 줄 모르고...”
“뭐, 모르고 그런 거니까. 얘기 안 할 거라고 했으니까, 믿고, 얘기해주마.”
형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듣는 귀가 없어졌다는 걸 확인한 후 하늘을 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옛날에 내가 아직 이름을 못 날렸을 때가 있었어. 조금씩 조금씩 강해지면서 이겨나가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왕좌는커녕 10강의 반열에도 오르지 못했을 때가 있었지. 그 때 만나던 여자가 있었어.”
비키 씨 이야기다. 나는 이야기에 확 주의가 쏠리는 자신을 느끼며, 티 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진짜 착한 여자였지. 답지 않게 순수하고. 술집에 나가는 아가씨였거든. 너도 그런 아가씨들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되게 쉽게 보거든 그런 아가씨들? 밤 늦게 마치고 퇴근하다가 끌려가서 강제로 당하기 십상이야. 그렇다고 경비대나 자경단에서 그 아가씨들 편을 들어주는 것도 아니고. 아주 똥같은 신세지 그냥. 그 날도 그렇게 끌려가던 아가씨를 보고,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그 아가씨를 구해줬거든.”
아, 이건... 형 입장에서의 그 때 이야기구나...
“그 아가씨는 내가 좋다고 계속 쫓아다니더라. 근데 생각해봐. 돈 벌기는커녕 하루 밥먹기도 쉽지 않은 운동선수가 뭐 쥐뿔이라도 있어서 여자를 만나겠냐? 고생만 시키지. 술집 출신이라는 건 조금도 신경 안 썼어. 진짜 예쁘고 착했거든. 근데, 가업을 이으라는 부모님 말 무시하고 몰래 도망와서 이 고생하고 있는데, 여자 만나면서 시간 보내면 안 되겠다 싶었지. 그래서 피해다니기도 하고, 심한 말도 하고 그랬어. 근데도 끝까지 찾아오더라고.”
나는 흘깃, 형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약한 조명이 밝혀진 갑판의 불빛을 받은 형의 표정은, 슬프지도, 우울하지도, 그렇다고 옛 추억에 즐거워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지’ 하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어느 날인가... 비가 막 쏟아지는 날이었어. 자려고 누웠는데 누가 문을 쾅쾅 두드리더라. 나가 보니 그 여자인 거야. 너 비 맞은 여자가 얼마나 처량한지, 그리고 그 처량한 분위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냐?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지금 이 여자를 들여보내면 저항 못하고 넘어가겠구나. 그래도 이 여자 신세가 나 때문에 더 망쳐지면 안되겠다 싶어서 좋은 말로 달랬거든. 그랬더니 이 여자가 젖은 옷을 벗고 달려드는거야.”
“정말 참기 힘들었는데, 그래도 어떻게 한 번은 참았어.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둘러줬더니, 그 여자가 엄청 서럽게 대성통곡을 하더라. 우는 여자 앞에 있어 본 적 있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지금은 좀 덜하지만 그때는 여자 경험이 거의 없었거든. 땀내나는 운동선수가 뭐 경험이 있겠냐. 말해본 여자라고 해 봐야 네 살 어린 여동생이 다인데. 펑펑 우는 이 여자를 어떻게 달래야 하나 하고 다독거리는데 이 여자가 그때 나를 잡고 안 놔 주는 거야. 뭐... 그렇게 됐지 뭐.”
“그래서요?”
“그래서... 그 날부터 같이 살았지. 워낙 뭐 살림이라는 게 없어서 합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어. 걔는 계속 술집에 나가고, 나는 계속 훈련하고. 그렇게 한 2년쯤 살았지. 아까 내가 골빈 여자들 얘기 했었지? 그런 여자들 말고, 나라는 사람 자체를 바라봐주는 사람은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는 형의 표정은 전혀 밝아지지 않고 담담해 보였다.
“이래서 결혼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누가 나를 무조건적으로 응원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큰 힘이 되더라. 그때쯤부터 시합에 나가서 많이 이기기 시작했어. 그런데 이기는 거에 비해서 별로 돈이 안 벌리는 거야. 내 시합이 재미가 없다고.”
“재미...요?”
“응. 좀 치고받고 하는 면이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피도 좀 튀기고 그래야 하는데, 그런 게 없으니까 사람들이 별로 재미가 없다고 하더라고.”
세상에... 으스스한 얘기를 형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요?”
“어쩌겠냐. 시합 스타일을 바꿔서 좀 더 치고받는 스타일로 바꿨지. 그런데 그게 참 쉽지가 않더라. 그때까지 성격이 좀 유했던 것도 있고.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데, 그래서 사람들한테 자기를 선전하고 그래야 하는데 그런게 참 안되더라고 나는. 약간 한계 같은 것도 느껴지고.”
아까 좋아하는 여자를 그려보일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실패를 말하는 형은 여전히 담담해 보였다. 이 모든게 형에게는 지나간 일이라는 건가?
“아마 그때 나 혼자였으면, 이 여자를 못 만났으면 아마 나는 안 바뀌고 계속 그때처럼 조금 재미없는 스타일을 밀고 나갔을 거야. 이기기만 하면 응원해 주는 사람들도 생기거든. 하지만, 너 그 기분이 얼마나 더러운지 아냐? 내가 돈을 많이 못 벌어서, 이 여자가 계속 술집에 나가는 걸? 하루에 얼굴 볼 수 있는 그 짧은 시간에, 일을 마치고 들어온 그 여자에게서 술 냄새와 화장품 냄새, 그리고 다른 남자 냄새가 나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모른척해야 하는 걸?”
“그래서 그 때부터 주변에 슬쩍 물어보기 시작했지. 좋은 약 있냐고. 그랬더니 누군가 소개해 준 게 저 약이야. 확실히, 그 약을 먹으니까 몸이 확 강해지더라고. 서너 대는 때려야 했을 놈을 한 방에 눕힐 수 있었을 정도로. 그 때부터 ‘가하의 한 방’이라고 불리면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했지. 그 약이 성격도 바꿔주더라. 엄청 자신감 넘치고 사람들 앞에서 떨지 않고 자기 선전 할 거 다 할 수 있게 되더라.”
나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아는 얘기라고 말할 수 없었으니까. 형은 여전히 옛날 일을 담담하게 말하듯 이야기했다.
“그런데, 너도 잘 알지? 신의 천칭은 공평하다는 거. 좋기만 한 일은 없다는 거. 이 약도 그래. 지금의 강함을 주는 약이지만, 먹으면 먹을수록 몸이 약해져. 선수들 사이에서는 ‘미래를 팔아 지금을 사는 약’이라고 불리고 있어. 약기운이 떨어지면 몸이 많이 아프고 힘이 없어. 아마 내 몸 안은 지금 이 약 때문에, 그리고 그 동안 두들겨 맞은 것 때문에 만신창이가 됐을 거다.”
“아...”
“아마 그래서 니가 봤던 내 얼굴이 팍 구겨져 있었을 거야.”
형은 피식 하고, 전혀 우습지 않은데 웃는 웃음을 한 번 짧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여자한테, 지금 너한테처럼, 약 먹는 모습을 들켰어. 불같이 화를 내더라고. 왜 그렇게 자기를 망치냐고. 그렇게 해서 이기면 누가 좋아할 줄 아냐고. 아파서 밤마다 끙끙거리는 거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막 울면서 소리치더라.”
“그럼 얘기하지 그랬어요? 빨리 성공해서...”
“그런 얘기를 자존심 상하게 어떻게 하냐. 성공한 다음에나 하는 거지.”
처음으로 형의 얼굴에 표정이 떠올랐는데 그건 다름아닌 ‘쑥쓰러움’이었다. 아아. 이해가 되면서도 바보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그래서... 뭐 보통 헤어지는 연인들처럼 헤어졌지. 나는 이 여자가 나를 이해 못 해주는 게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고, 아마 그 여자도 그랬겠지? 그래서 점점 싸움이 잦아지다가, 헤어진다는 말도 없이 어느 날 헤어졌어.”
“원인이 나한테 있는 줄은 나도 아는데, 그래도 너무 화가 나더라고. 이를 갈면서 더 죽어라 운동했지. 성공해서, 누구 못지 않게 성공해서, 그 여자한테 보여주고 싶었어. 그랬는데, 그 새를 못 참고, 한 1년 가게하다가 어느 부유한 상인의 애첩으로 가더라.”
“비키 씨 처럼요?”
나는 최대한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형의 반응이 궁금해서였다. 형은 그 때 내 휘어지는 화살에 처음 맞았을 때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 얼굴을 바라보던 형은, 내가 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세고 나서야 대답했다.
“그래. 비키 씨처럼.”
형의 얼굴에 약간 슬픈듯한 기색이 어리는 것 같아서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렸다. 잠시 밖의 물소리를 들으며 형에게 시간을 주다가, 나는 물었다. 이후에 어떻게 할 지를 정하기 위해서였다.
“형, 그 여자 보고 싶어요?”
형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남의 여자가 됐는데 뭐.”
그러더니 형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냥, 딱 한 번, 내 시합 보러 오라고 하고 싶어. 내가 잘 나가기 시작할 때부터 내 시합을 보러 온 적이 없거든. 그전에 빌빌댈 때 시합만 보여줬었으니까, 왕좌에 앉은 사람의 시합을 보여 주고 싶어.”
“그럼 사람 시켜서 몰래 부르면...”
“아... 하필이면 그 여자를 데려간 상인이 노던쓰라서 말야. 나는 상관없는데, 내 주변 사람들이 전부 서던쓰라서 노던쓰를 불러왔다가는 모두가 불행해지는 결과를 낳을까봐.”
아이고... 답답한 사람들아. 나는 턱밑까지 치달아 올라온 말을 간신히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그냥 그 여자가 이번에 마음이 바뀌어서 한 번 보러 오기를 기다려봐야 겠네요.”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내가 이 얘기를 너한테 왜 했는지 모르겠다...” 하고,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미안해요 형. ‘유도’ 스킬 때문일 거에요.
============================ 작품 후기 ============================
네, 뭐. 다들 예상하셨을 그런 스토리입니다.
가난한 연인의 '크리스마스 선물' + 이수일과 심순애 + 허리케인 조를 섞어서 환타지 양념을 좀 뿌리면 이런 스토리가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그나마 가운데 관찰자 기리인을 집어넣기는 했습니다만 말이죠.
어떤 분 말씀대로 제목의 앞뒤를 바꿔봤습니다.
더 이상의 제목수정은 없을 겁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읽어주셔서 그저 감사합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숫자 올라갈 때마다 새 힘을 얻습니다.
(리리플)
화이트프레페 님, melontea 님 // 1인칭 화자의 문제점이 그거죠. 오지랍이 안 넓으면 다른 사람 얘기가 못 들어가니까..ㅎㅎ;;;;
경직 님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자주자주 임팩트를 넣어줘야 하는데 참 그게... 뜬금없는 전투신을 자주 넣을수도 없고, 애초에 이 글은 그 쪽이랑은 거리가 좀 있다보니 쉽지 않네요. 더 고민하고 노력해 보겠습니다. 재미있게 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