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4 4. 누군가의 즐거움이 누군가에게는 슬픔 =========================
우리의 배는 도선(pilot)에 인도되어 천천히 운하를 항해해, 한 시간쯤 후에 항구에 도착했다. 특실에 탄 우리는 다른 수속 없이 제일 먼저 내릴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내린 것은 크주크 형과 뮤리나 누나였다.
“시합 날 보자.”
형은 그렇게만 말을 남기고 내렸다. 선착장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크주크! 크주크! 크주크!”라고 환호하며 형을 맞고 있었다.
“기리인, 시합 전까지는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겠지만, 시합 지나고 꼭 얼굴 보고 가?”
뮤리나 누나가 내리다 말고 내 옆에 멈춰서더니 나에게 말했다.
“알겠어, 누나.”
“약속한거야? 꼭이다?”
“알았다니까.”
그제야 누나는 웃으면서, 우리 나머지 일행에게 인사한 후 내려갔다. 내려가는 누나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있자니,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얼굴값을 하는 것 같아요.”
“이거 아주, 가는 곳마다 그냥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군?”
차례대로 아저씨, 누나, 형이 한 마디씩 던졌다.
“아 그런거 아니라고요.”
“세상에, 그럼 그런 거 아닌데도 여자들이 달려드는거야? 그거야말로 진정한...”
“아 쫌!”
참다참다 못해서 내가 한 마디 했더니 세 사람은 깔깔 낄낄대며 웃었다. 재밌냐? 사람 갖고 놀면 재미있어?
“여전히 기운이 넘치는 사람들이군.”
뒤에서 나타난 세자르 씨와 비키 씨가 말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먼저 내려가도 괜찮겠습니까?”
“그러시죠.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세자르 씨.”
“저도 반가웠습니다. 혹시 묵을 곳이 정해지시면 세자르 상단으로 연락 한 번 넣어주십시오. 차나 한 잔 하시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비키 씨도요.”
비키 씨는 세자르 씨 대신 짐가방을 들고 있었다. 형은 그걸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별 말 하지 않았다. 세자르 씨는 몸을 돌려 아래로 내려갔고, 그를 따라 몸을 돌리던 비키 씨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연락할게요.’
입모양으로 그런 말을 남기고 그녀는 세자르 씨와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 형은 비키 씨를 보다가, 나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기리인. 제국의 지엄한 법령에 위배되는 일을 하면 안 된다.”
뜨끔했지만, 나는 아무런 티를 내지 않았다.
“형 그만 좀 놀리세요.”
피식 웃은 형은, 배낭을 둘러메며 말했다.
“자, 내려가자. 숙소부터 잡아야지. 내가 단골로 가는 여관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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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요?”
선착장에 내려와, 사무소에서 입항 수속을 하던 우리에게 레카 시에서 나온 관리는 ‘방이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니, 왕좌 방어전 3일 전인데, 방이 있겠어요? 고급이고 저급이고 웬만한 방은 전부 다 나간 지 오래지. 그것도 그냥 격투왕이 아니고 아홉 번이나 왕좌를 방어한, 왕중왕 자리를 노리는‘가하의 한 방’인데 말이에요.”
“아...”
이건 정말 생각하지 못한 상황인데. 아저씨와 나와 누나는 모두 형을 바라보았고, 형은 잠시 맹렬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형은, “별 수 없지.” 하고 말하더니,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좀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차 한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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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고귀하신 분께서 이렇게 방문해 주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형은 우리를 데리고 가서 승용마차 한 대를 빌린 다음, “시청으로 갑시다.”라고 했다. 우리가 그 마차를 타고 시청에 도착하자, 형은 “시장을 보러 왔다.” 라고 하며 목에 건 뭔가를 꺼내 보여주었다. 잠시 후, 3층짜리 커다란 시청 정문이 벌컥 열리고, 머리가 벗겨진 한 남자를 필두로 여러 명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알고 보니 그 머리가 벗겨진 남자는 시장이었고, 형이 보여준 것은 수사기사가 서류 맨 뒤에 서명과 함께 찍는, 황제 폐하께 직접 수여받는다는 수사기사의 인장이었다. 제국 수사기사의 방문은 대개 뭔가 무시무시한 일을 수반할 수 있기에 시장과 고위 공무원들이 우르르 달려나온 것이었다.
“북쪽에서 공무를 처리하고, 제도로 귀환하던 길인데, 시장님을 안 보고 지나가려니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 하하. 그러시군요. 차는 입에 맞으십니까?”
다행히, 시장님은 자신이 수배도, 체포도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나서 빠르게 침착을 회복했다. 제국 수사기사라는 게 이 정도의 지위가 있는 거였구나.
“괜찮군요. 역시 제국의 모든 물산이 거쳐간다는 레카 시 답습니다.”
“아하하, 과찬이십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와 아저씨와 누나는 존재감이 거의 없어진 상태로 그저 차만 홀짝이고, 함께 나온 다과를 가끔 집어먹을 뿐이었다. 그나마 다과는 형 말대로 꽤 맛있었고, 차도 향이 꽤 향긋했다. 차 향을 음미하던 형이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도시가 들떠 있더군요.”
형의 단순한 말에 시장님이 갑자기 긴장하며 말했다.
“네, 아무래도 격투왕의 왕좌 방어전이 며칠 안 남은데다, 보통 격투왕이 아니다보니...”
“이번이 열 번째 던가요?”
“네. 지금까지 열 번째 방어전을 성공하고 왕중왕이 된 선수는 역사상 두 명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도시가 들썩들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아... 나는 몰랐는데,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런 중대한 경기를 남기고, 형은 부모님 묘소에 다녀온 건가. 기일이라도 됐나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북부 쪽에서 분위기가 안 좋겠군요.”
형의 지나가듯 한 한 마디 말에 시장님은 열변을 시작했다.
“아이고, 말도 마십시오. 제가 아무리 북부 출신이지만, 도시가 반쪽나게 생겼는데 어느 시장이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 날이 가면 갈수록 점입가경입니다. 원래 크주크와 그를 돕는 여동생 뮤리나의 부모님 기일이 이 때라서, 보통 같으면 시합을 한 달 정도 미뤄줬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북부 출신 도전자에다가, 북부 체육연맹이라는 단체가 뒤에 있다 보니 일정 변경에 합의를 안 해 줬지 뭡니까.”
“크주크와 같은 배를 타고 미틱에서 왔었는데,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그 때문에 아주 살기가 등등합니다. 남부 사람들은 만에 하나 크주크가 컨디션 조절에 애를 먹어 왕좌 방어에 실패라도 하면 폭동이라도 일으킬 분위기입니다.”
“시장님이 걱정이 크시겠습니다.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시장님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는 아주 손발이 묶여버린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 쪽을 돕는다고 생각이라도 되었다가는, 남부 사람들은 ‘북부 시장이라 저 지랄이다’라고 할 거고, 북부 사람들은 ‘북부 출신 주제에 변절자다’라고 할 거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렇겠다. 양 쪽에서 욕 얻어먹기 딱 좋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저 시장님이다. 원래 저런 공무원들이 그렇지만, 지금 레카 시처럼 양 쪽에 끼인 신세인 시장님은 훨씬 더하겠지. 게다가 뭐 할 수 있는 게 없다보니 더 갑갑할테고. 나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부 시장님 책임이 될테고 말이지.
“으흠, 으흠.”
형은 헛기침을 한 두 번 하더니, 시장님에게 말했다.
“이런 시기에 불행히 시장직을 수행하게 되신 시장님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저와 저희 일행은 황제 폐하의 신민이자 제국의 관료로서 제국의 중추가 되는 레카 시에 일어난 이 불행한 사태를 그저 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 같군요.”
시장님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 그 말씀은?”
“우리 일행이 여기 잠시 머물며, 정보를 수집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알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외부에서 온 중립 인사라면 노던쓰와 서던쓰 어느 쪽에서도 불만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불만이 없을 것 같지는 않은데. 어쨌든, 시장님은 불구덩이에 갇혀 있다가 물 한 양동이를 만난 사람처럼 형의 말을 반가워했다. 그러더니, “어이! 들어와 봐!”라고 밖을 향해 외쳤고, 비서로 보이는 젊은 남자 한 명이 들어오자 말했다.
“이 분들, 시청 영빈관에 모시게. 이 분들이 원하시는 건 내가 책임질 테니 조달해 드리도록 해. 알았나?”
“네, 시장님.”
“그럼, 잘 부탁드리곘습니다. 혹시 기사님의 함자가...?”
“에아임 로그푸스라고 합니다.”
웬일로 형은 풀네임을 댔고, 시장님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오, 에아임 님이셨군요!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저의 무지를 용서해 주시길. 정의를 실천하는 수사기사단 중에서도 가장 올곧은 검을 이렇게 뵙는군요.”
나는 시장의 찬사에 약간 놀라, 아저씨와 누나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표정에 조금도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익숙한 찬사인 모양이다. 진짜 유명한 사람이었구나, 에아임 형은. 가문 때문이 아니고, 자신이 한 일 때문에 말이다.
“감사합니다. 할 일이 많으실 것 같고, 저희도 해야 할 일이 생긴 것 같으니 이만 물러나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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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빈관에 짐을 푼 우리는 형 앞에 모였다.
“에아임 씨, 진짜 일 하시게요?”
“설마.”
“설마라고요?”
“잘 봐. 우리가 경기를 보러 가는 건 뭐라 부르는지 아냐?”
내가 대답 못하고 있는데 옆에서 톨라츠 아저씨가 약간은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시찰 및 정보수집이죠.”
“기리인, 니가 도시 구경을 하는 건 뭐겠냐?”
“설마, 미틱 시에서 제가 하던 거라고...?”
“그래. 우리는 ‘공무로 관광을 하는’ 사람들인 거다.”
“...형, 이건 좀... 반칙 아니에요?”
형은 약간은 찔린 얼굴이었지만 당당히 말했다.
“뭐, 뭐. 어차피 내가 여기서 나선다 해서 저 유서깊은 대립을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혹시 아냐? 우리가 모아온 정보를 토대로 해서 또 황제 폐하와 기사단에 보고할 거리가 생길지도 모르는 거지. 시장님은 잠시 안심해서 좋고, 우리는 정보도 모으고, 숙식을 공짜로 해결해서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얼마나 좋냐.”
우리 셋은 거창하게 한숨을 쉬었다. 뭐? 제일 곧은 검이 어쩌고 저째?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일요일 저녁은 항상 어렵네요. 거기다가 집안일까지 하고 반찬(오뎅볶음)까지 만들고나니...
에아임이 꼼수를 부린 건 맞지만,
시장의 입으로 현재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ㅎㅎ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갑자기 많은 분들이 읽어주셔서 기분이 좋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가시기 전에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리리플)
melontea 님 // 그러게요. 후회가 남지 않게. 좋지요. 그런 사랑.
eastarea 님 // 감사합니다. 어, 그 장면은 김동현 남매 보고 쓴게 맞습니다 ㅎㅎㅎ
화이트프레페 님 // 뜨끔... 작가 때문이 맞... STOP USING FACT... 아, 제목은 화이트프레페님 말씀대로 이대로 고정하기로 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