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5 4. 누군가의 즐거움이 누군가에게는 슬픔 =========================
“기왕 이렇게 된 거 도시나 돌아다녀 보지요.”
아저씨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러게. 기왕 이렇게 된 거, 무를 수도 없고 말이야. 그리고 나는 생전 처음 보는 도시가 궁금하기도 했다. 남쪽과 북쪽이 어떻게 다른지도 직접 알아보고 싶기도 했고.
“오늘은 2인 1조로 다녀보자.”
“그거 좋지요. 기리인 군, 같이 갈까요?”
톨라츠 아저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아임 형하고는 이래저래 많이 알게 됐지만 아저씨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사실이 없었는데, 이 참에 좀 더 친해지면 좋겠다. 형은 누나를 보았고, 누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형은 우리 쪽을 보며 말했다.
“톨라츠. 기리인은 처음이니까 북쪽보다는 남쪽이 재미있을 거야. 그러니 남쪽을 한 바퀴 돌고 와.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얘기도 좀 들어보고. 꼭 뭔가를 캐낼 필요는 없어. 알지? 톨라츠 당신이니까, 기리인을 맡기는 거야.”
아저씨는 특유의 그 넉넉한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리인 군. 무장은 할 필요 없고, 옷 갈아입고 나오세요. 그냥 편한 외출복 정도면 될 것 같군요.”
“알겠습니다. 시청 정문 앞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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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어떤가요?”
“아직까지는 재미있고, 그렇게 불편하지 않네요. 제가 운이 너무 좋은 건가봐요.”
“하하. 편하게 갈 수 있으면 그게 좋은 거죠.”
가벼운 차림의 아저씨는 느긋해 보였다. 덩치 큰 근육질의 아저씨는 단출한 셔츠 위에 조끼 하나와 바지, 그리고 늘 신는 튼튼한 부츠 차림이었다. 인상이 약간만 험악했어도 사람들이 정말 무서워했을 것 같은데, 아저씨는 워낙 선한 인상에 잘 웃어서 그런지 별로 그런 인상이 들지는 않았다.
“아저씨는 어떻게 사제가 되셨어요?”
“나이에 맞춰서 입교했고 교육받고 수련중이다, 이런 단순한 답변을 원하는 건 아니겠죠?”
의외로 말솜씨가 좋은 아저씨의 입담에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아저씨는 자기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별 건 없습니다. 뭐 출생의 비밀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신전에서 하는 고아원에서 자랐거든요. 자연스럽게 신을 섬기고픈 마음이 들었고, 고아원을 하시던 사제님의 허락과 후원을 받을 수 있었죠.”
“아... 사제 되는 거, 힘들진 않으셨어요?”
“힘들죠. 마흔 다섯이 되어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제’ 역할을 하기 전에는, 온갖 걸 다 할 줄 알아야 하거든요. 그걸 위해서 ‘재능’을 신께 받아야 하는데, 그 재능을 받기 위해서는 정말 뼈를 깎는 수련과 기도가 필요하거든요. 어느 정도로 힘드냐 하면... 솔직히 다른 사람이 사제 된다고 하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요.”
헐. 내 표정을 본 아저씨는 하하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모든 사제들은 그런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겨내지요. 신에 대한 사랑과 균형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그만큼 더 크니까요. 이후 평생 결혼하지 않고 혼자 지내며 세상의 욕망과는 거리를 두고 살게 되어도 행복하니까요.”
아저씨의 말에 나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을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무엇을 하든, 어떤 힘든 일을 하든 행복할 것이다. 나는 저런 마음가짐을 갖기는 어렵겠지만, 아저씨의 태도가 정말 부럽고 존경스럽다고, 진짜 사제 같다고 느꼈다. 그래서 아저씨는 매일 저렇게 느긋하고 푸근하게 웃을 수 있구나.
우리는 도시의 남쪽 거리를 걷고 있었다. 기껏해야 2층 정도의 건물들이 길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도시를 처음 만들 때부터 계획을 잘 했던 모양인지, 사각형 모양의 블록(block)으로 잘 구획되어 있었다. 우리가 걷고 있는 큰 길은 마차 두 대가 나란히 지나갈 정도의 넓은 길이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주택가들과 주택가에 있을 법한 가게들이 간간이 보였다. 아이들이 뭘로 만든 건지 모를 공을 좇으며 깔깔거리고, 예술의 도시 답게 온갖 희한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와, 저 사람 콧수염 봐. 뭘 바른 거지? 풀이라도 발랐나? 어떻게 하면 저렇게 골뱅이 모양으로 끝을 빙글빙글 말아올릴 수 있지? ...신기하긴 하지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 아저씨, 힘은 원래 그렇게 세었어요?”
“힘이요. 그렇지요. 어릴 적부터 두세살 많은 형들하고 팔씨름 해도 맨날 이기긴 했으니까요. 신전에서 사제 교육을 받을 때 혹독하게 단련해서 더 그런 것도 있을 거고요. 아, 하지만 이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기리인 군, 내가 내 재능에 대해 설명했던 것 기억나나요?”
“아, 네, 이름이 ‘눈썰미’라고 하셨죠.”
“맞아요. 눈대중이 정확해지고, 여러 가지 감각이 정확해지죠. 마법사였으면 우리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대략 알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에서 사람의 몸에 있는 근육과 뼈 같은 것에 대해 배우고, 그에 앞서 모든 마법사들은 자기 몸 안에 마법 회로를 만들기 위해 자기 몸을 관조(觀照)하는 시간을 갖기 때문에 몸에 대해 잘 안다.
“이런 비유를 들면 되겠네요. 기리인 군, 채석장이나 농장 같은 곳에서 무거운 짐 드는 아저씨들을 본 적이 있나요? 아니면 시장에서 머리에 쟁반을 열 개씩 이고 다니는 아주머니들 같은 것도 좋은 예가 되겠네요.”
잠시 생각한 후 나는 물었다.
“그러니까, 아저씨의 ‘눈썰미’ 때문에 힘을 쓰는 요령이나 자세가 다른 사람에 비해 더 좋고, 그래서 효율이 잘 나오는 거라는 말씀이죠?”
“그렇죠. 역시 이해가 빠르군요.”
에아임 형이었으면 내 머리를 헝클어트렸겠지. 나는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가 택한 경로는, 아니, 아저씨가 말했고 나는 그냥 아무 것도 모르니 고개만 끄덕인 경로는, 시청 근처에 있는 ‘두 번째 다리’를 건너, 더 남쪽으로 내려가 레카 시 극장 구경을 하고, 서쪽으로 꺾어 노점들이 있는 곳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좀 더 가서 크주크 형의 왕좌방어전이 열릴 노천광장 쪽으로 가서 주변을 살펴보고, 크주크 형이 훈련하고 있는 체육관을 들러서 어떻게 되고 있나 본 다음, 차 한잔 마시고, 맨 바깥쪽에 있는 ‘세 번째 다리’를 건너서 마차를 빌려서 시청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다리 이름이 왜 저래요? 아니, 숫자도 제각각이네요?”
“아, 만든 순서 때문에 이름이 그렇게 붙었다고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좀 전에 건너온 ‘세 번째 다리’는 시청을 크게 지으면서 남쪽 사람들이 자꾸 첫 번째 다리까지 돌아가는 게 너무 불편하니 짓게 된 거라고 하더군요.”
우리는 도시 구경을 하며 한참 걸어내려갔다. 확실히 우리가 봐 왔던 대로, 그리고 얘기 들었던 대로 도시는 들떠 있었다. 크주크 형과, 이름이 ‘에프오’라는 상대 선수가 그려진 포스터가 어디 가나 붙어 있었다.
남쪽은 크주크 형을 일방적으로 응원하는 것 같았다. 크주크 형의 그림, 응원 문구 같은 것들이 거의 한두 집 걸러 하나에 붙어 있었다. 가게마다 크주크 형의 그림이나 깃발 같은 것들이 걸려 있었다. ‘가자 왕중왕!’ ‘가하의 한 방!’ 뭐 이런 문구들과 함께.
“어우... 장난 아니네...”
“나도 간간이 레카 시를 지나왔지만 이 정도로 뜨거운 열기는 처음 보는 것 같군요. 아까 시장님이 그동안 왕중왕이 두 명 나왔었다는 말 기억하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저씨는 설명을 이었다.
“사실 그 분들은 이미 1~2백년 전 분들이라, 지금처럼 격투기가 엄청 발달한 시대에 가하 씨처럼 오래 왕좌에 앉아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죠. 이렇게 뜨거운 관심도, 그리고 크주크에 대한 응원도 이해가 가긴 합니다.”
“그런데, 강 건너편에서는 얘기가 다르다고...”
“있다가 만나서 들어보면 알겠죠. 우리는 아직 저 에프오라는 선수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니까요. 이 부근에서 물어봐야 별 내용 안 나올 것 같고 말이죠.”
저 멀리 극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변의 낮은 건물들에 비해 3~4층은 되어보이는 높은 극장은 멀리서도 잘 보였다. 나는 갑자기, 사제를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생각나, 아저씨를 보며 말했다.
“아저씨.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뭔가요?”
“곤란한 질문이면 답변 안 하셔도 되는데요, 왜 트리클 교단은 마흔다섯부터 사제가 되게끔 했을까요? 혹시 공식적인 이유가 있을까요?”
아저씨는 잠시 침묵에 잠겨들었다. 내가 괜한 걸 물었나, 하고 한참 자책하고 있을 때 아저씨는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그걸 궁금해하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 저를 지도해 주셨던 스승님 되시는 사제, 아, 지금은 제도 남구의 주교시죠. 어쨌든, 그 분께도 여쭤보고, 선배들에게도 물어봤죠. 하지만 그 분들도 딱히 정해진 답을 해 주시지는 못하더군요. 학교에서는 뭐라고 말하던가요?”
“어... 트리클 교리 시간에 배우기는, 치르낙 대왕께서 교단의 우수한 사람들의 능력을 사회에 쓰기 위해...”
“그렇죠.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고, 실제로 그 말이 틀린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아저씨는 잠시 생각하더니 덧붙였다.
“내가 올해 서른 여섯이에요. 기리인 군 나이때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수사기사단과 함께 일하기 시작한 건 10년 정도 되었지요. 말했죠? 제국의 이곳저곳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돌아다녔다고. 음... 그러면서 온갖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의 생활 양식을 접하게 되지요. 사람들은 모두 다 달라요. 말하는 방식도, 생각하는 방식도 다르고, 어느 것 하나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지요. 그런 사람들이 서로 얽히다보니, 사제로 교육받을 때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을 세상에 나가서 부딪히는 경우도 많지요. 특히 나는 수사기사와 함께 다니다보니 사람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도 많이 보게 되었어요.”
내가 아무 말 못하고 아저씨를 바라보자, 아저씨는 웃으면서 “기리인 군 곤란하게 하려던 얘기는 아니”라고 한 후, 말을 이었다. 아저씨의 표정은 예의 그 넉넉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음, 뭐랄까. 나는 지난 10년간 그런 면들을 보면서 오히려 사람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트리클 신의 천칭은 공평하지요. 그 천칭의 저울대가 되려면, 양 쪽 접시에 올라갈 것들을 잘 알고 있어야만 하겠죠. 아마 그런 뜻에서, 인간 사회 속에 들어가 인간에 대해 깨우치고, 동시에 그런 과정동안 자신의 신에 대한 믿음과 깨끗함을 유지하라는, 배려이자 동시에 수련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어요.”
“아...”
“그리고, 좋잖아요? 혈기왕성할 때 어디 신전 안에 처박혀서 하루종일 못 나온다고 해 보세요. 아무리 사제라도 갑갑하겠죠.”
아저씨의 약간 익살스러운 말투에 나는 푸흡 하고 웃어버렸다.
“아저씨가 사제가 되면, 다른 건 몰라도 대륙에서 가장 힘이 센 사제가 되겠네요.”
“하하, 그러면 아이들이 무서워할 것 같은데요?”
“아이들을 번쩍번쩍 안아들 수 있으니 오히려 더 좋아하지 않을까요?”
“그럴까요? 하긴, 제가 허허 웃게 생겼으니 아이들이 생각보다는 무서워하지 않더군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어느새 극장은 성큼 다가와 있었다.
============================ 작품 후기 ============================
다행히 한 시간 안에 선방했네요. 조아라가 안 열려서 여유만 안 부렸어도 더 짧은 시간에 끊을 수 있었을텐데. 자정에는 꼭 제 시간에 올리겠습니다.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도 감사드리며 부탁드립니다. 숫자 올라갈때마다 너무 큰 보람이 됩니다.
(리리플)
eastarea 님 // 지금쯤 깨셨겠죠? 잘 주무셨나요? ㅎㅎ
얼룩야옹이 님 //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형식은 게임시스템을 차용했지만, 정통판타지에서 볼 수 있는 묘사 같은 것도 시도해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좀 호흡이 길어지네요 ㅎㅎ;;; 감사합니다.
subbidese 님 // 말씀 감사합니다. 님 말씀대로 이제는 제목 걱정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기리인은 이미... 어긴 지 오래... 배에서... 밤에... 쿨럭...
melontea 님 // 그래도 그냥 놀멘놀멘 하면 눈치보이니까 관광을 나가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