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86화 (86/309)

00086 4. 누군가의 즐거움이 누군가에게는 슬픔 =========================

커다란 기둥 모양으로 장식된 극장은 꽤 화려했다. 레카 시는 부유해서 이런 여흥거리에 관심이 많다는 말을 그제야 나는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내가 있던 북부에서는 이런 건 북부군에서 가끔씩, 실력도 없는 사람들이 지방 순회공연하는 사람들을 초청해다가 무대에 올리는 정도였고, 당연히 이런 상설극장 같은 건 없었는데. 무슨 종류의 공연이든 1년 내내 올릴 수 있게끔 하기 위한 건물이라는 게 있을 수 있구나.

“오후에 왔었으면 잠시 들어가볼 수 있었겠는데, 지금은 들어가봐야 의미 없겠군요.”

“네?”

“아. 대부분의 공연은 오후나 저녁에 하거든요. 게다가 오늘은 트리클의 날도 아니니 저녁 식사시간 즈음에 공연을 시작할 테고, 그러면 아직 무대준비 정도나 하고 있을 텐데, 지금은 들어가봐야 못질 망치질 정도 하고 있을 거고, 그런 건 굳이 여기까지 와서 볼 이유가 없지 않겠어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그냥 가기에는 약간 아쉬워, 나는 극장의 대리석 기둥을 만져보고 있었다. 그 때였다. 우리가 왔던 쪽, 그러니까 북쪽에서 마차 한 대가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말이 네 마리나 달리고, 마차 자체도 꽤 많은 장식이 되어 있는 꽤 호화스러운 마차였다. 알아서 사람들이 마차 앞을 비켜주자, 마차는 끼익 하고 제동을 걸더니, 우리 바로 앞, 그러니까 극장 정문 앞에 와서 섰다.

우리 말고도 그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모두 ‘뭐야 저 마차는’ 하는 눈으로 그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곧, 마차의 마부가 펄쩍 뛰어내리더니, 황급히 달려가, 우리 쪽의 문을 열었다. 그 문을 통해 내린 것은 검은 색에 ‘꼬리’가 긴 – 나중에 형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그게 ‘연미복(swallow-tail)’이라는 걸 알았다. - 재킷과 회색의 바지를 입은 남자였다. 그는 마차 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그러자 장갑 낀 손이 나와 그 손을 맞잡았다.

남자의 손을 붙잡고 내린 것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였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와, 예쁘다’ 소리는 누구나 할 만한 그런 여자였다. 잔뜩 찌푸린 표정의 그녀는 내리자마자, 옆에서 잔뜩 긴장해 서 있는 마부를 보더니,

“운전 좀 똑바로 해요. 엉덩이가 아파 죽겠네.”

누가 봐도 야, 저 여자 성깔있네, 하는 말투로 쏘아붙인 후, 연미복의 남자와 함께 계단을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눈길을 의식했는지, 걸음걸이가 별안간 차분해지며 ‘조신해졌다’. 뭐야 저 여자.

‘정보 확인.’

<이름          : 수르키 밍

나이          : 25(28)

HP           : 1043/1043

힘            : 65

민첩          : 73

지력          : 81

마나친화력    : 56

매력          : 88

지구력        : 66

특수          : -

스킬          : 암기술 B+, 노래 B+, 연기력 B+, 정치 A0>

<최근 레카 시에서 주목받고 있는 여배우입니다. 실력은 그저 그렇지만 정치력으로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평이 많습니다.>

아. 짜증나는 타입이다. 실력 없는데 자리 보전하는 것도. 주변 사람들 휘두르고 자기 입맛에 맞게 맞추려는 것도. 안 봐도 눈에 보인다, 보여. 뭐, 배우가 연기만 잘 하면 되는거긴 하지만. 얼굴도 저 정도면 예쁘장하고, 드레스 때문에 안 보이지만 몸매도 꽤 괜찮은 것 같고.

그 때 그 여자가 내 쪽을 돌아보더니,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별 관심없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연미복의 남자는 달랐다. 갑자기, 그녀의 손을 놓더니, 와다다다, 내 쪽으로 달려왔다. 뭐, 뭐, 뭐야.

“어, 어이! 이봐! 너!”

“네?”

“자네! 배우해 볼 생각 없나?”

“네에에?”

뭐야, 이 남자. ‘정보 확인’!

<이름          : 에렌스 비너

나이          : 37

HP           : 1856/1856

힘            : 77

민첩          : 76

지력          : 85

마나친화력    : 72

매력          : 79

지구력        : 71

특수          : 안목 88

스킬          : 협상 B+, 감언이설 A0>

<수르키 밍과 함께 일하는, 극단 단장입니다. 현재 이 극장에서 연극 상영 중입니다. 신인 발굴에 명성이 높지만, 그만큼 악명도 높습니다.>

악명? 무슨 악명이길래. 안 그래도, 이 남자 얼굴이 뭔가 사람 깔보는 것 같이 느끼하게 생겨서 좀 거리껴진단 말이다. 그러나저러나 에렌스라는 남자는 끝끝내 내 손을 꼭 붙들고 놔주지 않은 채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주 그냥 남녀가 세트로 밥맛이다.

“자네같은 얼굴에 자네같은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 배우를 안한다는 건 그 얼굴에 대한 모독이야, 모독! 나하고 손 잡자고. 조금만 지도받고 조금만 연습하면, 금세 이 레카 시를 주름잡는, 아니, 전 대륙에 이름을 날릴 배우가 될 수 있어! 자네같은 사람은 제도 극단 진출도 아무 문제 없을 걸세!”

‘띠링!’

<냉철이 발동합니다. 고급 언변이 발동합니다.>

<상대의 협상 스킬이 퇴치당합니다.>

<상대의 감언이설 스킬이 C+로 격하됩니다.>

비단 저 문구가 아니라도 손톱만큼도 관심이 안 간다.

“사양하겠습니다.”

“아니, 이봐! 그렇게 딱 끊고 갈 일이 아니라니까? 저기! 저 아가씨 보이지? 저 아가씨도 자네처럼 길거리를 지나다가 나한테 발탁된 거라고! 지금 봐, 모든 레카 시가 주목하는 여배우가 됐잖아! 자네도 그럴 수 있다고!”

‘띠링!’

<형식상 물어봅니다만, 배우로서의 전향을 시도해 보시겠습니까?>

<현재의 스킬이 배우 직을 수행하기 위해 조금씩 재조정됩니다.>

형식상 물어본 거면 안 할 줄 알고 물어본 거네. 그렇지?

<형식상입니다, 형식상. 어쨌든, 본 ‘시스템’은 당신에게 제안을 했고, 당신은 거절했다는 걸 기록에 남겨놓겠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좀 놔 주시죠.”

“이봐! 내 입으로 말하기 민망하지만, 이 에렌스를 모르는 사람은 이 레카 시에 없어! 자네같은 분위기 있는 미남자와, 신인 발굴의 명장 에렌스의 만남! 이것이야말로 트리클 신께서 놓아주신 다리일세!”

아, 좀. 짜증이 나려고 한다. 그 때, 내 어깨에 두툼한 손 하나가 얹어졌다.

“그만 하시죠. 이 친구가 싫다고 하는군요.”

톨라츠 아저씨의 커다란 손이 내 어깨에 놓였다. 아저씨는 아직 웃는 표정이지만, 눈은 단단하게 바뀌어 그 에렌스라는 남자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스르르, 그 남자의 손에서 힘이 풀렸고, 나는 손목을 정중하게 잡아뺐다.

“죄송합니다. 그 쪽으로는 생각이 없습니다.”

“아니, 바로 그렇게 거절하지 말고, 자.”

그는 품 안으로 손을 넣더니 자그마한 종이 조각 하나를 꺼내, 품 안에서 만년필을 꺼내들더니 뭔가를 긁적거린 다음 나에게 주었다. 나는 엉겁결에 그걸 받아들었다. 한 쪽에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극장의 모습이 간략화되어 그려져 있었다. 종이를 뒷면으로 돌리자 문구가 씌어져 있었다.

<레카 시 시립 극단 대표 에렌스 비너>

그는 옷차림에 대단히 신경쓰는 사람이 흔히들 그러하듯 옷매무새를 단정히 다듬으며 나에게 말했다.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은 아니지? 여행자지? 어디에 묵고 있나?”

“시청 영빈관요.”

내 퉁명스러운 답변에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 남자를 두고, 아저씨에게 “가죠.” 라고 말했고,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고 연락하게!”

끝끝내 그렇게 말하는 에렌스. 나는 고개를 돌리다가, 수르키라는 그 여배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 여배우는 왠지 몰라도 나를 불 같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노려보는 건지, 아니면 그냥 뚫어져라 바라보는 건지. 감정을 모르겠다. 잠시 나와 그 여자의 눈길이 마주치고, 셋 정도 셀 시간이 지난 후 그 여자가 눈을 돌렸다. 나와 아저씨는 또 붙들릴세라 빠른 걸음으로 극장으로부터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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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가 에아임 씨한테 아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면 박장대소를 하겠군요.”

아저씨는 껄껄대며 앞에 놓인 접시에서 크레이프 하나를 집어들었다. 우리는 극장으로부터 한 10분 넘게 걸어왔다. 노점 거리에 와서도 최대한 극장으로부터 더 멀어지고 싶었던지, 극장과 먼 쪽에 앉은 우리는, 크레이프를 파는 가게 앞에 앉아서 크레이프를 몇 개 시켰다. 안에 소세지와 토마토, 신선한 야채, 그리고 크림 같은 소스가 들어간 크레이프는 정말 맛있었지만, 아저씨가 놀리는 바람에 그만 그 맛이 뚝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배우를 그렇게 뽑아도 되는 건가?”

“무슨 말인가요, 기리인 군?”

“아, 아뇨. 그 남자는 저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잖아요? 배우는 연기력이나 목소리, 전달력 같은 게 정말 중요할텐데. 그렇게 그냥 얼굴만 보고 ‘자네는 대배우가 될 거야’ 해도 되는 건가 싶어서요.”

“지금 ‘대배우가 될 거야’는 아까 그 사람 흉내낸 거 맞죠? 기리인 군 연기도 못하지는 않는데요 뭐.”

나는 어이없다는 듯 하, 하고 웃었고, 아저씨는 다시 사람좋게 껄껄 웃더니, 약간은 진지한 투로 말을 이었다.

“약간 진지하게 말하자면, 그런 연기나 노래, 춤 같은 것은 연습으로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죠. 아마 그 남자는 자기가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일 겁니다. 아마 지금까지도 그래왔을 거고요.”

나는 아까 떠올렸던, 수르키라는 여배우의 정보를 기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대충 무슨 말 하는지 알 것 같긴 하다. 그래도, 공정하지는 않은 것 같다. 연기와 노래에 재능이 있고 지금도 연습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일텐데. 그렇게 말하자 아저씨는 잔잔히 웃으며 말했다.

“그 남자는 기리인 군을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아마 기리인 군이 실제로 그 길에 뛰어들면, 그저 새싹 중 하나로밖에 취급받지 못할 겁니다. 못 자라면, 그 남자 입장에서는 뽑아서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그 때, 우리가 앉아있던 노점 저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어? 기리인!”

어. 익숙한 목소리다. 나는 몸을 돌려 손을 번쩍 들었다.

“뮤리나 누나!”

“여긴 웬일이야? 레카 시 구경하러 다니는 거야?”

“어 뭐, 비슷해.”

방이 없어서 시청에 쳐들어가서 영빈관 얻어내고, 거기 그냥 있기 민망해서 나왔다, 고는 말할 수 없지.

“누나는 여기서 뭐해?”

“아, 너는 모르겠구나. 우리 체육관이 여기 근처야. 오늘 돌아왔다보니 집에 먹을 게 아무 것도 없어서, 장 좀 보려고 나왔지.”

누나는 자신이 들고 있던 장바구니를 들어보였다. 반바지에 거무스름한 다리의 누나가 가정주부들이나 들 법한 장바구니를 들고 있는 게 좀 안 어울리는 것도 같다.

============================ 작품 후기 ============================

어. 뭐. 그렇습니다.

<3일 후> 이러면서 바로 노천극장 특설 링으로 이동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러면 너무 무미건조해지지 않겠습니까.

읽어주시는 많은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부탁드립니다. 숫자 올라갈 때마다 글쓰는 보람을 많이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리리플)

화이트프레페 님 // 저도 공감합니다 그 마음. 절실히.

체크필통 님 //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초심 잃지 않고 열심히 쓰겠습니다.

eastarea 님 // 그러게요. 좋은 형과 삼촌을 만난 우리 인공이가 복받았네요. 저도 저런 사람 있으면 믿음직하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푸를청 님(5편) // 어이쿠, 과분한 말씀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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