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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87화 (87/309)

00087 4. 누군가의 즐거움이 누군가에게는 슬픔 =========================

“어? 기리인?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놀라 묻는 크주크 형에게 나는 등 뒤의 뮤리나 누나를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몰랐어요. 저기 노점에서 뭐 사먹다가 지나가던 누나가 우리를 보고 불렀어요. 밥 하는거 좀 도와달라고 하던데요.”

“크주크, 누구야?”

대략 나이가 쉰 정도 되어 보이는 귀윗머리밖에 남지 않은 우락부락한 대머리 아저씨 한 명이 물었다. 손에는 얼굴 크기만한 넓적하고 둥근, 솜이 들어가 있는 것 같은 큼지막한 장갑을 끼고 있었다. (나중에야 뮤리나 누나가 저건 미트라고 부르는 거라고 얘기해 주었다.)

“아, 왜 얘기했잖아요. 배에서 훈련 도와줬다는 그 동생.”

“아, 저 친구가 그 친구야? 진짜 네 말대로 잘 생겼네? 튼튼해 보이고. 이봐, 격투기 배워 볼 생각은 없나?”

오늘따라 왜 이리 나를 뭘 못 시켜서 안달들인지. 진지하게 권한 건 아닌 모양인지 그 아저씨도 피식 하고서는 말았다.

크주크 형이 훈련하고 있다는 ‘체육관’은 대략 3층 정도 되는, 넓지는 않은 건물이었다. 천장이 높은 1층은 가운데 세 줄의 로프를 네 기둥에 매어 구분한 사각형의 공간(‘링’이라고 한다. 둥글지 않은데 왜 링(ring)인지는 모르겠지만.)이 있었고, 천장에 매달린 검은 가죽 주머니(모래가 들어 있어서 ‘샌드백(sandbag)’이라고 부른다고 한다)와 각종 아령과 무게추 등이 있었다.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도구들도 잔뜩 있었다. 창문이 넓어 방 안은 불을 켜지 않아도 밝았지만, 오랫동안 밴 땀냄새가 시큼하게 배어 있는 그런 공간이었다.

“크주크, 에프오 쪽에서 요구사항이 하나 더 있다고 하는데.”

단정하게 셔츠와 검은색 바지를 입고, 조끼와 코사주(cosage), 그리고 안경까지 걸친 한 남자가 뒤쪽 문에서 나오며 말했다. 로프에 기대서 우리를 보고 있던 크주크 형은 갑자기 팍 얼굴이 일그러지며 말했다.

“또 뭐?”

“노던쓰들의 단체석을 만들어 달래.”

“그 얘기는 끝난 거 아니었어?”

“문제는 그게 에프오 명의가 아니고 레카 시 체육협회 북부 지부 명의로 왔다는 거야.”

형은 갑자기 발을 링의 바닥에 쾅 굴렀다. 링 뿐만 아니라 건물 전체가 울릴 정도의 커다란 소리가 쾅- 하고 났다.

“아 나 진짜 이 치졸한 새끼들, 끝까지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아니 근데 이걸 우리가 어떻게 준비해? 체육 협회 쪽에서는 뭐래? 별 말 없어?”

“자기네들도 알아보고는 있다고...”

크주크 형은 진심으로 짜증내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거기 말고 더 위에 얘기해야 할 거 아냐? 왜 선수 쪽에서 관중들 입장하고 앉는 것까지 신경써줘야 해? 알아서들 하라 그래!”

그때 뮤리나 누나가 뒤에서 나와 톨라츠 아저씨를 끌었다.

“우린 밥이나 하러 가자. 저런 이야기 할 때의 오빠는 좀 짜증이 많거든.”

그래서 우리는 뮤리나 누나와 함께 1층 뒤쪽, 목욕탕 옆에 있는 주방으로 갔다. 주방은 딱, 대여섯명 정도가 먹을 식사를 만들 수 있는 공간이었다. 화덕에는 불씨가 잘 살아 있었고, 물통과 양념통, 기름통 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톨라츠 아저씨가 팔을 걷으며 말했다.

“특별히 먹으면 안 되는 거나, 먹어야만 하는 게 있나요?”

“글쎄요. 솔직히 오빠가 좋아하는 건 지금 상황에 먹으면 안 되는 것들이긴 해요. 힘들게, 그리고 스트레스 받아가면서 운동하는 사람이라 덩어리 고기 같은 건 좀 부담스러울 것 같기도 하구요. 그래서 오늘은 푸줏간에서 쇠고기를 잘게 갈아서 왔는데...”

“혹시 쌀이 있나요?”

“쌀요? 아... 네. 오빠가 찐 쌀로 만드는 요리를 좋아해서 쌀은 많이 사놔요.”

“고기는 넉넉히 샀을테고. 야채도 사왔나요?”

뮤리나 누나는 어느새 주도권이 아저씨에게 넘어간 지금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바구니에서 채소를 꺼내기 시작했다. 양파, 당근, 마늘, 그리고 저건...

“오호, 부추가 있네요?”

“네, 부모님이 어릴때부터 봄 부추는 약사의 손님을 줄인다고 꼬박꼬박 먹이셨거든요... 오빠가 좋아할 거 같아서...”

아저씨는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얼른 맛있는 밥 해서 다 같이 먹을까요? 뮤리나 씨랑 기리인 군이 저를 좀 도와주면 좋겠네요. 우선 도마와 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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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톨라츠 아저씨의 요리는 대박이었다. ‘눈썰미’라는 재능은 정말 대단했다. 남의 부엌을 자신의 부엌처럼 쓰면서도 아저씨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요리를 척척 진행해 나갔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훌륭했다.

“야, 이런 거라면 속이 부담되지도 않고 엄청 힘이 나겠는데. 아저씨, 고마워요.”

크주크 형이 그릇째로 들고 아저씨가 끓인 스튜(아저씨는 ‘죽’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를 마시면서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아니, 빈말이 아니라, 하는 방법을 배워두고 싶군. 뮤리나, 하는 거 봐 뒀지?”

“네, 대략은 가능할 거 같은데... 연습을 몇 번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안경 쓴 남자도 아무 말 없이 숟가락을 열심히 놀리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맛있었다. 다들 큰 그릇을 비우고 한 그릇씩 더 먹은 후, 만족스럽게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하아... 배부르다.”

“크주크, 너무 많이 먹었어. 오후에 훈련하기 힘들잖아 이러면.”

“괜찮아요. 조금 쉬었다가 뛰면 또 금방 배 꺼질 건데요.”

크주크 형은 웃으면서 일어나 팔을 붕붕 돌려 보였다.

“크주크, 내가 보기에 넌 전보다 긴장을 안 하고 있어. 좀 걱정스러울 정도로.”

안경 쓴 남자가 딱딱하게 말했다. 크주크 형은 하지만 여전히 빙글거리며 이리저리 몸을 풀 뿐이었다.

“하아... 상대는 온갖 치졸한 수를 써가면서 이기려고 발악하고 있는데, 정작 우리의 격투왕께서는 아~무런 걱정이 없는 것 같으니 이거야...”

대머리 남자도 안경 쓴 남자와 생각이 비슷한지 머리를 싸쥐었다. 음? 긴장을 안 해서 문제야?

“저, 긴장을 안 하면 좋은 거 아닌가요?”

“너무 긴장을 안하는 상태는 쉽게 말해 ‘방심’이라고 하지.”

아. 대머리 아저씨의 한 마디로 이해가 되었다. 안경쓴 남자가 덧붙였다.

“크주크가 방심할 정도로 그가 허술한 사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크주크가 필요한 만큼 긴장하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상대는 지금 온갖 치졸한 수까지 동원해 어떻게든 크주크에게 흠집을 내려고 하고 있는데... 저 쪽은 노던쓰들이 일치단결해서 크주크를 끌어내리려고 난리인데, 이쪽은 애초에 도와주는 사람도 없는데...”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요?”

“야, 손님 모셔다 놓고 별 소리를 다 한다.”

아차. 옆에서 몸을 풀고 있던 크주크 형이 말했다. 지금이 타이밍인 것 같아 나는 말했다.

“형, 오후에도 훈련하셔야 하니까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어, 그래. 고맙다. 찾아와서 맛있는 것도 해 주고. 형이 막 힘이 나는데?”

짐짓, 팔을 구부려 알통을 만들어보이며 웃는 크주크 형. 나와 아저씨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때, 뮤리나 누나가 말했다.

“시장에 한 번 더 다녀와야겠는데. 나갈 때 같이 좀 나갔다 올게. 배웅도 해줄 겸.”

“어, 그래.”

약간은 떨떠름하게 크주크 형이 대답하더니, 제자리에서 가볍게 통 통 뛰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할 모양이었다.

“가자, 기리인.”

누나는 그런 형을 잠시 보더니, 내 팔을 잡고 나를 끌다시피 하며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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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누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왜 한숨이야?”

“답답해서...”

누나는 장바구니를 든 채 팔을 위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가벼운 옷차림을 한 누나의 라인은 슬림하면서도 탄탄했다. 가슴이 그렇게 큰 것 같지는 않지만, 허리에서 골반으로 내려오는 라인이 예술적이었다. 그 짧은 동작에서 나는 맨 처음 누나를 보고 느꼈던 매혹적인 분위기를 잠시 느꼈다. 물론, 다시 팔을 내리자 사라졌지만.

“우리는 솔직히 노던쓰 서던쓰 이런거 잘 모르고 관심도 없거든. 우리는 미틱 시에서 왔으니까. 그런데, 오빠 체육관이 남쪽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오빠는 서던쓰의 대표 인물이 되어버렸어. 그러다 보니까 노던쓰 쪽에서는 어떻게든, 오빠가 왕중왕에 못 오르게 하려고 발악을 하는 거야.”

누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원래 이번이 두 번째 맞는 부모님의 기일이거든. 그래서 재작년에 돌아가셨을 때하고 작년에 첫 번째 기일하고는 상대하고 협의해서 한 달 정도 방어전을 늦췄었어. 그런데 이번에는 끝끝내 합의를 안 해주더라고. 그래서 시합 직전의 그 중요한 시기에 배를 타고 다녀온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장님에게 들은 얘기가 맞았구나.

“아까 봤지? 그거 말고도 온갖 꼼수 쓰면서 오빠를 훈련에 집중 못하게 하려고 하는거. 아, 진짜 짜증나. 그냥 오빠는 격투기만 하고 싶어할 뿐인데. 그렇다고 이 쪽 협회에서 오빠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아까 했던 얘기네... 형을 안 도와줘?”

“아... 오빠가 협회에 고분고분하지를 않거든. 행사 같은거 안 다니고, 수익 배분하라는 거 배분 안 하고 하니까. 그나마 체육관이 이 쪽 소속이고, 노던쓰에서 워낙에 기세등등하니까 편만 들어주는 거지...”

누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앞을 가리켰다.

“저기야. 저기가 우리가 시합할 노천극장이야.”

와. 나는 입이 쩍 벌어지는 걸 느꼈다.

마치 거인이 나타나 땅을 푹푹 파낸 것처럼, 땅이 경사지게 깊이 파내어져 있었다. 거기에 돌로 사람이 앉을 수 있게끔 큰 계단 모양을 한 것이 2~30층 정도 있었다. 사이사이에는 아래로 내려갈 수 있게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맨 아래에는 원형 모양의 공간이 있었다. 거기에는 이미 공사가 시작된 듯, 온갖 자재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레카 시민들 뿐만 아니고, 제도나 미틱 시, 저 남쪽에서까지 수천명이 이미 몰려왔다고 하더라고.”

누나의 표정은 되게 뿌듯해 보였다. 하긴, 나라도 저런 큰 무대에 서는 사람이 형이나 오빠라면 내가 함께 뿌듯할 것 같긴 하다.

============================ 작품 후기 ============================

약간 맘에 안 들어서 조금씩 갈아엎고 갈아엎고 하다 보니 늦었습니다.

꾸준히 읽어주시는 분들이 있으셔서 언제나 안심이 되고 힘이 납니다.

조회수나 선추코의 등락에 일희일비하지 말자고 오늘도 다시 한 번 다짐합니다. 감사합니다.

(리리플)

nnuhgwyegd 님 // 어, 네. 그 부분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호흡을 길게 가져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기리인이 겪는 일들도 나중에는 그가 세계의 진실을 알게 되는데 작용하거나 보탬이 될 것이니, 메인 스토리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고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번 챕터는 원래 군상극 개념으로 가려고 했어서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아, 님 오늘 리플 보고 빵 터졌습니다 ㅋㅋㅋ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 언제나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melontea 님 // 고생많으시네요 ㅠㅠ 통학 통근이 사람 체력 잡아먹는데는 뭐 있죠...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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