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88화 (88/309)

00088 4. 누군가의 즐거움이 누군가에게는 슬픔 =========================

“누나.”

“응.”

나는 시합을 보는 게 끔찍했다는 비키 씨의 말이 떠올라서 누나에게 물었다.

“누나는 형 시합하는거 보기 끔찍하지 않아?”

누나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끔찍하지. 왜 끔찍하지 않겠니.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게 변하는 경우가 많아. 신관을 모셔다가 치유를 하긴 하는데, 부러진 이빨 같은 거는 방법이 없어. 제도의 대신관님 정도는 뵈어야 하거든, 이빨 같은 거를 돌리려면.”

아... 누나는 확연히 어두워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동생이라서 그런가, 그래도 오빠가 좋아하고 열심히 하는 거니까 봐주는 건가 싶어. 아마 내가 오빠 와이프나 애인 같은 거였으면 시합 때 못 따라다녔을 것 같아. 너 배에서 그거 봤지? 내가 오빠 다리 때리던 거? 나 그거 처음에는 정말 못 했어. 엄청 세게 때려야 되는데, 그렇게 못 했거든. 오빠랑 코치님은 맨날 살살 때린다고 막 뭐라고 하고, 나는 미치겠고.”

누나는 그 때를 상상하듯이 몸서리를 한 번 치다가,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는 괜찮아. 그리고 오빠도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10번 방어 성공하면 왕중왕이라고 했지? 그럼 은퇴하는 거야?”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게 불문율이야. 오빠 이전에 왕중왕에 올랐던 사람들이 있는데, 마지막 왕중왕이 150년쯤 전에 나왔어. 그 전 왕중왕은 그 30년 전에 나왔고. 그 분들은 격투기 대회가 생긴 지 얼마 안 돼서 하신 거라, 그 뒤로는 다섯 번 방어하면 많이 한 거였거든.”

크주크 형이 대단하다는 건 알겠다.

“그럼 누나, 형은 이겨도 져도 물러나는 거야?”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될 거 같아. 이기면 왕중왕이라서 물러나고, 지면 패배했으니까 물러나고. 오빠 기분이야 차이나겠지만, 나는 오빠가 이제 더 안 다쳐도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의 마음이 이해가 가서였다. 아무리 명예와 부가 따라오는 격투기 계의 대형 스타라 해도 가족이 다치는 걸 보고 싶을 사람은 없겠지.

“아, 맞다, 기리인. 숙소는 어디로 구했어?”

“아, 그게... 방이 없어서 어떻게 할까 하다가, 에아임 형이 연줄이 있어서... 시청 영빈관에 묵고 있어.”

누나가 눈을 크게 떴다.

“진짜? 영빈관에 있어? 우리 내일 밤에 거기 가는데!”

“어? 그래?”

“응! 원래 시합 전날 밤에는 파티 비슷하게 하거든. 도시에서 한 가락 한다는 사람이면 다 와. 잘 됐다! 내일 밤에 보겠네?”

“어, 그러게. 누나 내일 그럼 예쁘게 하고 오겠네?”

“뭐, 1년에 몇 번 안 되는 드레스 입는 날이기는 하지... 너, 지금 누나 놀리는 거지?”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누나는 근처 시계탑에 있는 시계를 보더니, “어머, 시간이 많이 지났네.” 라고 말하더니. “그럼 내일 밤에 봐!”하고 나와 아저씨에게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기리인 군.”

아저씨가 내 두 어깨에 두툼한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네?”

“그 버릇은 고치는 게 좋겠어요.”

“어떤...?”

“마음이 없는 여자에게 예쁘다, 같은 말을 던지는 거 말이에요.”

아...

“습관 같은 거라서 말이죠...”

“그러면 더더욱 조심해야 할 것 같네요. 기리인 군처럼 여심에 대해 잘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상대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에요. 그리고 남녀 관계에서 오해는 증오가 될 수도 있죠.”

나는 뭐라고 자기 변호를 위해 입을 열었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저씨의 지적이 맞았다. 그 동안 아카데미라는 너무 안정된 공간에서 잘못 버릇이 붙어버렸다.

“감사합니다. 조심할게요.”

아저씨는 어깨를 툭 툭 두들겨주고는 예의 그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힘 조절이 달인급인지 어깨가 전혀 아프지 않았다. 크주크 형이나 에아임 형이 할 때는 아팠는데.

“자, 그럼 점심도 먹었고, 도시 구경도 했고, 크주크 씨 상황도 알았고. 슬슬 돌아가 볼까요? 강변 구경도 하면서 말이죠.”

---

“그래? 기리인을 캐스팅하려고 했다고? 하하핫! 이거 너무 전형적인데?”

영빈관에 딸린 시종을 시켜 차를 내오게 한 형은 찻잔을 앞에 두고 나와 아저씨의 반나절 이야기를 듣더니 키득대며 웃었다. 에빌로 누나도 예의 그 약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아는 누나라면 저 정도면 꽤 크게 웃는 편인데.

“야, 기리인. 하지 그랬냐? 잘 풀리면 엔간한 마법사보다 훨씬 화려한 삶을 살 수 있는데.”

“그리고 이름모를 삼류 배우가 되어 지방 극단이나 술집을 떠돌 수도 있는 거잖아요. 사양할게요.”

형은 여전히 큭큭대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혹시 그런 일 있는 건 아닌가’ 했는데 어쩌면 그렇게 예상을 빗나가지를 않냐. 기리인, 너한테는 그런 류의 사건을 끌어들이는 마력 같은 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고. 형은 이런 류의 농담을 한 번 시작하면 그치지를 않는구나. 나는 못 말린다는 투로 고개를 저었고, 형은 웃음기를 약간 걷어내며 말했다.

“우리는 북쪽을 돌아다녔지. 몇 군데 상단 본거지를 찾아가서 차도 마시고, 노천 카페에서 식사를 했는데, 확실히 북쪽에서는 크주크 얘기를 꺼내면 백안시당할 분위기더라고.”

“맞아요. 좀 이상할 정도로, 에프오 응원만 하고 있더라구요.”

에빌로 누나가 덧붙였다.

“누나, 이상하다고요?”

“응, 어... 어떻게 설명할까... 기리인, 만약 아홉 번 방어에 성공한 챔피언에게 새로 도전자가 나타났다면, 그리고 열 번 방어를 성공한 사람은 150년째 안 나타나고 있다면, 너는 누구를 응원할 것 같니?”

“어... 도전자는 미래가 있지만, 챔피언은 열 번 연속 방어를 할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까, 챔피언을 응원하지 않을까요? 챔피언을 더 응원하게 되는 게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요.”

에빌로 누나가 고개를 끄덕였고, 형은 턱을 괴고 말했다.

“그래. 에빌로 말대로, 좀 이상하게 에프오의 응원이 많아. 의도적으로 에프오를 응원하고 크주크를 깎아내리려는 것처럼 말야.”

“그럼 누군가가 일부러, 에프오를 띄워서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는 말인가요?”

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를 한 모금 마셔 목을 축인 후 말했다.

“이 갈등을 조장해서 이득을 얻는 사람이 있을 거야. 하지만 이건 우리가 손댈 수 없는 범위다. 실제로 갈등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크주크의 방어전이 지나고 나면 가라앉을 수도 있으니까.”

그때 나는 형에게, 크주크 형의 체육관에서 보았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자리까지 분리해 달라고 했다고? 흠... 확실히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라는 게 확실해지는 것 같은데.”

“차라리 분리하는 게 좋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섞여 있다가 난동이라도 벌어지면 링 밖에서 패싸움이 벌어질수도 있어요.”

아저씨가 걱정스럽게 얘기했다. 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맞아. 쉽게 넘어가서는 안 되는 문제야. 시장님을 찾아 뵙고 오마. 지금 얘기를 정리해서 시장에게 말해주고, 관중석을 아예 분리하고 시청 경비대를 파견하게끔 말해야겠다.”

“아, 형. 그리고 또 들은 얘기가 있는데, 내일은 이 시청 영빈관 앞 뜰에서 전야제가 열린대요.”

“전야제? 오호. 양쪽 선수들이 올 거란 말이지?”

형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음. 조금씩, 수사기사로서의 본능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여기 올 때는 일 안 할 거라고, 돈 받으면서 공무로 관광할 거라고 하더니. 올곧은 검은 올곧은 검인 건가.

“에빌로, 드레스 없지?”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형은 아저씨와 내 쪽을 돌아보더니,

“어차피 아저씨는 맞는 옷 없을 테고... 기리인은 솔직히 말하면 한 번 입혀보고 싶기도 한데. 어떤 모습일지 정말 궁금해.”

왠지 불안함을 느꼈지만, 형은 “시장님에게 다녀올게.”라고 말을 남기고 그대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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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어제 형은 나갔다가 여남은 명의 줄자와 옷핀을 든 사람들을 대동하고 왔다. 여자 두 명이 에빌로 누나를 자기 방으로 데려간 후, 그 분들은 에아임 형과 나를 가만히 서게 하더니, 팔을 벌렸다 접었다, 바로 섰다. 돌아섰다, 온갖 동작을 하게 했다. 그러면서 줄자로 온 몸의 길이를 이곳저곳 모두 쟀다. 나는 이 분들이 내 바지를 내리게 한 다음 내 물건의 길이와 방향까지 기록할까봐 잠시 두려움에 젖었다. 그 정도로 이분들은 진지하게 내 온몸을 측정했다.

그리고는 다음 날 아침식사 후, 우리가 차를 마시며 약간 과했던 기름기를 씻어내리고 있자니 그 분들이 은색 쟁반에 잘 개어진 옷을 받쳐들고 왔다. 에빌로 누나를 또 옆방으로 데려가서 드레스로 갈아입게 하고, 형과 나에게 옷을 내밀며 갈아입게 했다. 지어진 옷은 어제 점심때 극장 앞에서 봤던 그 남자, 이름이... 어. 에렌스였다. 에렌스가 입었던 그, 제비 꼬리 모양의 연미복과 바지였다.

그리고 그 옷으로 갈아입고 서자, 형과, 아저씨와, 옷을 들고 온 사람들이 모두, 약간 입을 벌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정말이지 잘 어울리시는군요. 파티가 끝난 후 옷을 다시 수선해 다른 분에게 드리기가 아까울 정도입니다. 어제 밤늦도록 옷을 만든 보람이 있군요.”

옷을 들고 온 장인이 나를 보며 말했다. 형은 멍하니 나를 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말했다.

“기리인. 너를 원래는, 황제 폐하께 상을 받게 한 후, 사교계에 한 번 세워 볼 생각이었다. 너 정도로 생긴 사람이 사교계에 데뷔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나 궁금했거든.”

...이 사람이 나는 아무 생각도 없는데 혼자서 뭘 정하고 난리야. 내가 뚱한 눈길로 형을 바라보자 형은 다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되겠어. 오늘 너한테 이 옷을 입혀보니까, 너 거기 갔다가는 둘 중 하나일 것 같아. 너 때문에 귀부인들과 레이디들 사이에 쟁탈전이 벌어지든가, 그 과정에 니가 죽거나 어디 다치든가. 안 그래도 너는 지금 뒷배가 없어서 외압에 취약할텐데.”

“형, 대체 무슨 소리에요. 나는 아무 생각도 없는데.”

“아무 생각이 없다...라. 하긴 너에게는 그게 당연하겠지.”

형은 ‘나는 다 알고 있지롱’하는 미소를 짓더니, 나에게 말했다.

“오늘 밤 전야제 파티에 한 번 참석해 봐. 너를 보고 사람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면, 그리고 그 꼴이 얼마나 구역질나는지 겪어보고 나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거다. 쾌락을 위해서 양심이나 상식따위 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후에 사정이 있어서 못 썼더니 밤에 늦어졌네요.

추워졌습니다. 이 추위가 가면 확실히 봄이 올 것 같네요.

취향 타는 글 읽어주시는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느 날은 조회수가 쭉쭉 올라갈 것 같다가도, 어느날은 다시 원위치거나 뚝뚝 떨어지네요.

일희일비하지 말고 제 글을 쓰자고, 하지만 재미있게 쓰자고 다시 다짐해봅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많이 부탁드립니다. 하나하나 늘어나는 걸 보는게 제 보람입니다.

(리코멘)

eastarea 님 // 제 글이 휴식이 되었다니 황공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그 얘기도 오늘 정오나 내일 자정쯤?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이문세 님 // 연참은... 아하하^^;;; 노력해 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melontea 님 // 네, 저도 열심히 쓰겠습니다. 멜론티님도 지치치 마시고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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