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9 4. 누군가의 즐거움이 누군가에게는 슬픔 =========================
그리고 저녁이 왔다. 영빈관 앞뜰에 하얀 테이블보를 씌운 테이블들이 쭉 늘어서고, 정문 앞에 무대 하나가 설치되었다. <제국력 413년 크주크 가하 제 10차 왕좌방어전>이라는 현수막도 걸렸고, 영빈관 앞의 정원의 나무에는 마력석을 이용한 전등들이 내어걸렸다. 낮만큼 밝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지간한 활동을 하기에는 불편하지는 않았다. 시청의 고용인들이 온갖 요리를 내어오고, 쟁반에 연노란색의 술을 담은 가느다란 잔을 여럿 얹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술잔을 집어들거나, 음식을 집어먹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에... 또한, 본 체육협회는 청년들의 건전한 신체 단련과 경쟁의식을 통한 발전을, 에, 발전을 추구하고, 이에 청년의 모범이 되어...”
써 온 것도 잘 못 읽으시는 한 배나온 신사분이 연단에서 원고를 읽고 있었다. 연단 위에는 크주크 형네 사람들, 그러니까 뮤리나 누나와 어제 체육관에서 봤던 두 사람이 한 쪽에 서 있었고, 반대쪽에는 형보다 약간 키가 크고 약간 호리호리하지만 역시 근육질의 남자를 비롯한 몇 명이 서 있었다. 저 사람이 형과 대결할 에프오라는 사람인가. 배나온 아저씨가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는 가운데, 에프오는 형 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고, 형의 시선은 약간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간신히 장광설이 끝나고, 사람들의 산발적인 박수가 이어졌다. 이어, 무대의 아래쪽에서 에아임 형 정도의 나이인 것 같은, 사회를 보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다음은 내일 대결에 임할, 양 선수의 각오를 들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현재 제국 중부 격투기 왕좌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에게 도전한 도전자들을 아홉 번이나 물리친, ‘가하의 한 방’, 크주크 가하 선수입니다.”
다음 순간, 지루하던 분위기가 싹 바뀌었다. 관객들은 거의 절반으로 나뉜 것처럼 되었다.
“가하! 가하! 가하! 가하!”
“우우-”
환호성과 야유가 뒤섞여 영빈관 앞의 파티장은 순식간에 남은 음식물을 죄다 집어넣고 끓인 잡탕 스튜처럼 변해버렸다. 형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손을 들어올릴 때까지 이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아, 감사합니다. 너무 많은 환호성을 들으니 아직 식전인데도 배가 부른 것 같네요.”
나는 형이 아니라 관객들을 돌아보았다. 아까 환호성을 날리던 관객들은 반짝반짝하는 눈으로, 그리고 야유를 보내던 사람들은 탐탁찮아하는 눈으로 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형은 이런 자리에 선 경험이 많았는지 아주 여유있게 말하고 있었다.
“이번 승부에 임하는 제 마음가짐은 이전과 다를 바 없습니다. 격투왕으로서, 왕좌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저는 언제나 전력을 다해 물리쳐 왔고, 이번에도 그럴 것입니다. 저를 상대하게 된 에프오 ‘군’이 한 수 배울 것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오. 상대에게 ‘너는 내 한 수 아래’라고 선언하는 거잖아. 사람들은 다시 ‘오오’ 파와 ‘우우’ 파로 나뉘어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다음, 왕좌에 도전하게 된, 격투계의 신성, 에프오 드라비 선수입니다.”
“에프오! 에프오! 에프오!”
“우우-”
정확히 아까와 반대로 나뉘어 사람들이 환호와 야유를 퍼붓고 있었다. 나는 새삼, 레카 시의 남북간의 대립이 심각하구나 하는 것을 절감했다.
“감사합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입니다. 썩은 왕을 물리치고 왕좌에 앉도록 하겠습니다.”
어우. 적의가 명확히 느껴진다. 형은 코웃음을 치며 처음으로 에프오를 바라보았고, 형보다 약간 키가 큰 에프오는 형을 약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에 질량이 있었다면 아마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 맞부딪혀 불꽃이 팍팍 튀고 있을 거였다. 에프오의 도발에 다시 잡탕처럼 끓어올랐던 분위기가 가라앉자, 사회자가 말했다.
“자! 오늘의 지루한 행사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이제부터 식후 행사를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시장님께서 내시는, 술과 음식이 준비되어 있으니 자유롭게 즐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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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뭐에요?”
“레카 시에는 언제 왔어요? 어머 세상에, 이 옷 선좀 봐. 어쩜...”
아 은근슬쩍 만지지좀 마세요...
“어머, 어쩜 콧날도 이렇게 오똑할까?”
그러면서 정말로 코를 만지려는 듯 손가락을 뻗어오는, 나이가 마흔은 되어 보이는 귀부인 한 명. 내가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뒤로 빼자 나를 둘러싼 여남은 명의 여자들이 깔깔깔 거리며 웃었다. 아. 화도 못내겠고. 이게 뭐하는 짓이냐.
지금 내 옆에서 은근슬쩍 내 팔짱을 끼어오는, 제법 체격이 있는 통통한 귀부인, 아니, 귀부인은 무슨. 그냥 아줌마. 아줌마 한 명은, 아까 분명히 남편 정도 되는 남자랑 같이 와 있는 걸 봤는데? 고개를 약간 돌려보자 저 쪽에, 파란색 드레스를 어울리게 차려입은 에빌로 누나가 몇 명의 남자에게 둘러싸여서 나처럼 곤란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 중에, 아까 이 아줌마랑 같이 서 있던 남자가 능글맞은 얼굴로 말을 걸고 있는 걸 보았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장면이냐고. 이런 게 사교계의 파티야?
“이름이 기리인이라고 했던가요? 이런 자리는 경험이 별로 없나봐?”
아아. 돌아가신 엄마 뻘은 되어 보이는, 얼굴에 분칠을 뽀얗게 해서 목하고 얼굴 색깔이 다른 아주머니 한명이 몸을 바짝 붙여오며 말한다.
“네, 이런 파티 자리는 처음... 으헉!”
내 허리를 만지던 손이 엉덩이를 스윽 하고 쓰다듬고 지나갔다. 내가 그 감촉에 깜짝 놀라 몸을 홱 젖히자 나를 둘러싸고 있던 아줌마들이 깜짝 놀라며 깔깔댄다. 아 왜! 좀 젊은 사람들 없나? 왜 이렇게 아줌마들한테만 인기지?
‘띠링!’
<본인 스스로도 짐작할 수 있는 이유일 겁니다.>
그래, 나도 안다, 나도 안다고. 이런 자리에 오는 여성들은 대개가 누군가 남성의 동반자 격으로 오는 거지. 아내건, 미스트레스건. 그리고 젊은 여자들이라면 나를 보고 관심을 가졌다고 해도 같이 온 사람 눈치가 보여서 그럴 수 없겠지. 남자들이야 자유롭게 다른 여자들에게 ‘작업’을 걸거나 할 수 있겠지만, 미스트레스들이 그랬다가는 내처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좀 너무하잖아. 다들 짝이 있는 아줌마들이, 그래. 아줌마들이!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즐기는건지 내 몸에 와닿는 손길들은 더 과감해지기 시작했다. 분 냄새, 이름모를 향수 냄새, 이상한 냄새가 뒤섞여 숨이 막히는 느낌이다. 머리도 아프고. 아. 싫다.
“기리인 군, 우리 조용한 데서 이야기 좀 더 나눌까요...?”
“어머나, 노나 씨, 대담하시네요. 그렇게 대담하게 손 뻗을 시간에 드레스나 조금 더 신경쓰지 그랬어요?”
“두 사람 다 품위를 좀 지키세요. 그러지 말고, 기리인 군. 저 쪽에 가서, 같이 식사나 하면서...”
가만히 있다가는 어느 으슥한 곳에 끌려가서 깔려버리겠다. 아줌마는 아줌마만의 매력이 있지만, 이런 아줌마들하고는 싫다고!
“실례하겠습니다.”
“어머, 어디를...”
나는 나를 건드리고 있는 손을 약간 무례할 정도로 걷어낸 후, 나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원을 간신히 빠져나왔다. 다행히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나를 쫓아오기까지 하지는 않았다.
“후우...”
간신히 숨을 돌리고, 지나가던 급사가 들고 있는 잔 하나를 집어들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물이나 주스 같은 게 없어서 목을 약간만 축일 생각이었다. 연노란색의 술 안에는 좁쌀만한 공기방울이 많이 맺혀 있었다. 아, 이게 샴페인(champagne)이구나. 나는 처음 마셔보는 샴페인을 한 모금 목으로 넘겼다. 독하지 않은 샴페인 안의 공기방울이 입 안에서 터지는 느낌과 상쾌한 포도향이 아까 저 안에서 갇혀있느라 어지러웠던 나를 깨워주는 것 같았다.
내 머리가 깨어나서일까? 테이블 주변에서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약간씩 들려왔다. 나는 테이블에 있는 음식을 집어드는 척 하며 귀를 기울였다.
“하여튼,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저 크주크 놈을 왕좌에서 끌어내려야 해.”
“그러게 말입니다. 아이고, 저 말 안 듣는 돌대가리 때문에 얼마나 우리가 고생했는지...”
슬쩍 돌아보니 쉰은 되어 보이는 배나온 남자들이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라고 말한 남자가 다름아닌, 아까 원고를 보며 장광설을 늘어놓던, 체육 협회의 회장이라는 걸 깨달았다.
헐. 형은 같은 편이어야 할, 아니, 적어도 공정해야 할 체육 협회로부터도 따돌림을 당하는 건가.
“어른을 공경하는 맛이 있어야 되는데, 요새 애들은 암튼...”
“그래도 다행입니다. 북부에서도 오라고 하는 걸 전부 다 거절했잖습니까.”
“흥. 북부에서도 저 더러운 성깔을 못 받아낸 거지.”
“아하하... 어쨌든, 이기든 지든 저 얼굴 다시 안 보는게 참 다행이군.”
으으. 나는 주먹이 꽉 쥐어지는 걸 간신히 참았다. 여기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다. 이 얘기를 잘 들어뒀다가, 나중에 형에게 얘기하자. 에아임 형에게 얘기해보면 뭔가 이야기를 해 주지 않을까.
“응? 아니, 자네! 그래, 자네가 영빈관에 머물고 있다고 했었지?”
왠지 느끼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 얼굴은 팍 일그러지고 말았다. 어제 점심 전에 극장 앞에서 만났던, 에렌스라는 자칭 신인 발굴의 대가와, 그에게 가볍게 팔을 맡기고 있는, 수르키 밍이라는 여배우였다.
============================ 작품 후기 ============================
약간 늦었네요. 오늘 밤부터는 제 시간에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고 가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올라가는 수치를 볼 때마다 기운이 납니다.
(리리플)
화이트프레페 님 // "나는 사교계의 문을 젖히고 그 안을 들여다봤지만... 그 안엔 혼파망 뿐이었어..."
melontea 님 // 제도로 바로 보낼까도 생각해봤는데, 얘가 지금 멘탈이나 경험치로 제도 갔다가는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더라구요. 게다가 주인공이 성장해야지만 세계의 진실을 깨우칠 수 있다는 점에서 이것도 다 나중에 기리인의 성장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와중에 재미도 좀 보구요 ㅎㅎ
longway 님 // 잘 생긴 사람들이 면접 합격률이 더 높고 급여도 더 잘 받는다던가 하는 연구 결과가 있더군요. 거울에 비친 제 얼굴 보고 한숨을 푹... 에효...
eastarea 님 // 기리인이 옴므파탈이 되려면... 음... 아직 경험치가 멀었죠. 상대가 어떻게 되든말든 꼬시고 본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아직 애가 그런 게 없다보니 오히려 아줌마들에게 당하고 막...
이문세 님 // 쿠폰 정말 감사합니다. 더 힘내서 열심히 쓰겠습니다.
체크필통 님 // 아직 뭐라 말씀드리긴 이르죠?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