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1 4. 누군가의 즐거움이 누군가에게는 슬픔 =========================
“수르키...씨.”
나는 손수건을 받아든 채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그녀는 약간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내 이름을 알아요?”
아차. 그녀와는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지. 시스템으로 알아낸 건데.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다행히, 돌려서 말할 수 있는 상황이라 천만다행이다.
“아...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봤어요. 그, 극장에 이름 걸려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그랬어요?”
풋, 하고 그녀가 웃었다. 그러더니, 손수건을 바라보며 말했다.
“닦아요.”
“어... 손수건을 더럽히게 될 것 같아서...”
“괜찮아요. 그 정도야. 비싼 거 아니니까 버려도 돼요.”
싸가지 없는데, 그래서 마음이 편해지는 묘한 상황. 나는 그녀의 말대로 입가를 닦고, 더럽혀지지 않은 부분으로 얼굴을 대충 닦았다. 그리고, 시큼한 냄새가 나는 손수건을 돌려줄 수는 없어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고맙습니다.”
“이젠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이런 파티는 처음이죠?”
그녀는 내가 토한 이유를 안다는 듯이 말했다. 처음 보는 사람마저도 알아챌 수 있는 걸 보면 내 꼬라지가 참 가관인가 보다. 나는 부정해 봐야 어설픈 허세밖에 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닫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기리인...이라고 했었죠. 나이가?”
“열아홉이요..”
그녀의 표정이 변했다.
“어머나- 애기였구나?”
으윽. 참기 힘들지만 참아야 한다. 저 여자는 내가 발끈하기를 바라는 거니까. 나는 빙긋 웃어보였다.
“그러게요. 아직 어린 모양이네요.”
“...끝이야? 내 나이는 안 물어보고?”
“물어보면 여자 나이를 물어보다니 실례니 어쩌니 하실 거 아니었어요?”
잠시 멍하니 있던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핫! 너 꽤 재미있게 말하는구나?”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다리를 모으고 일어나려 했다. 그 때 그녀가 말했다.
“가게?”
“정신 차렸으니 이제 나가봐야죠.”
“손수건 값으로 조금만 더 있어주면 안 될까?”
내가 ‘네?’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쪼그리고 앉은 채로 저 쪽을 건너다보며 말했다.
“저 쪽에 갔다가는 나도 누군가를 상대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말야. 보이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그렇다고 여기에 혼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심심하잖아. 말상대나 잠시 해 주면 안될까?”
뭐... 실제로 도움받은 것도 있고, 말싸가지가 참 없는 게 문제지만 뭐 잠깐만 참으면 되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아까 주머니에 넣었던 손수건을 꺼내서 그녀 쪽에 깔아주었다. 그녀는 잠시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보더니, 풋 하고 웃고는 그 위에 엉덩이를 올리고 앉았다.
“어이구, 우리 꼬마 신사님. 예절교육이 잘 돼있네?”
“꼬마 치고는 좀 크지 않나요?”
나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렇게 쉽게 도발될 상대가 아니랍니다. 도발당하면 그 쪽 페이스로 끌려갈텐데, 그랬다간 더 큰 놀림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
“너... 진짜 말하는 게 재미있구나.”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은 후 그 위에 턱을 괸 자세로 나를 뻔히 바라보았다. 어제도 그랬고, 아까도 그랬고, 지금도 그녀는 나를 뚫어져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괜히 민망해져 뺨을 긁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파티장의 중심에서도, 그리고 정복의 쾌감을 불태우는 짐승들에게서도 멀어진 이 곳은 조용했다. 여기까지 오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아까 저 곳에서는, 이야기소리와 잔 부딪히는 소리, 웃음소리, 음악소리, 혹은 탄성이나 비명소리만 들렸는데, 여기 오니 풀벌레들이 찌륵찌륵거리며 울고 있었다. 깎은지 얼마 안 된 잔디에서는 상쾌한 향이 났고, 봄밤의 바람은 상쾌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아까의 지저분한 광경이 거짓말이라는 듯, 밤하늘은 여전히 탁 트인 자유로운 광경을 상상하게끔 했다.
“아까...”
수르키 씨가 말을 꺼냈다. 나는 잠시 저 위를 떠돌던 정신을 얼른 제자리로 돌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도로 가야 한다는 거, 진짜야? 하기 싫어서 핑계대는 건 아니고?”
“하기 싫은 건 맞지만, 핑계는 아니에요. 정말로 제도로 가야 해요.”
“그래...”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녀는, 옆에 나 있는 잔디 하나를 뚝 하고 끊어내어서는, 가볍게 옆으로 던졌다. 그렇게 잔디 세 개를 뽑아낸 후에야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아까는 그냥 물어보셨으면서.”
진지하게 타박 줄 의도가 없었고, 수르키 씨도 내가 그냥 말한 거라는 걸 안 듯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기 말야. 왜 그렇게 배우가 되는 게 싫었어?”
“네?”
수르키 씨는 내가 아닌 풀밭 쪽으로 고개를 떨군 채, 여전히 하나씩 풀잎을 뜯어내며 말했다.
“오늘 제도로 가야 한다는 얘기 꺼내기 전에, 어제 말야. 에렌스가 얘기 걸었을 때 무슨 벌레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라.”
“제가 그랬나요?”
“어. 그랬어.”
음.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내가 정말로 에렌스 씨를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던가.
“그랬는지도 모르겠네요.”
“왜?”
“글쎄요... 아마, 보장되지 않는 걸 보장된 것처럼 말하는 게 너무 싫었던 것 같아요.”
그녀는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제 에렌스 씨는 얼굴이나 몸만 좋으면 어지간한 사람은 다 배우가 되어서 성공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했죠. 신인을 보는 자신의 눈은 틀린 적이 없다고 하면서.”
그녀는 어느새, 팔을 내리고 허리를 편 채 어제처럼 불타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보면 아무리 나라도 조금은 쑥스럽다.
“수르키 씨가 들으면 저를 또 어리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 배우가 된다 한들, 그건 에렌스 씨의 의사에 따라 맞춰진 인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목소리, 어떤 표정을 가졌는지, 어떤 경험이 있고 어떤 걸 잘 하고 못하는지... 이런 건 아무 것도 몰라도 되고, 그저 얼굴과 몸만 맞으면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처럼 말했잖아요.”
나는 결국 그녀의 눈길을 이기지 못하고 약간 시선을 돌리고 멋쩍음에 뺨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배우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만, 아마 지금도 배우나 가수가 되기 위해 매일매일 죽어라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에요. 그런 사람들 사이에 각오가 되지 않은 제가 들어가는 건 그 분들에 대한 모욕인 것 같았어요. 배우라는 직업이 싫었던 건 아니에요.”
이야기가 잘 전달됐을까? 그녀는 읽기 힘든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동안 풀벌레 찌륵거리는 소리만이 지나간 후 그녀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나 몇 살인지 아니?”
“아뇨, 잘...”
“올해 스물여덟이야.”
나는 내 놀라는 연기가 너무 과장되지 않기를 바라며 놀라는 척을 했다.
“네? 한 스물 다섯 정도인 줄만 알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스물 다섯 살인 줄 알아.”
아. 나이 : 25(28)의 의미는 그거였구나...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니 말대로 배우가 되는 건 정말 힘들어. 나도 처음에는 나 정도면 꽤 이쁘장하니까, 그리고 사람들 앞에 서는 걸 좋아하고, 무대도 좋아하니까 노력하면 잘 될 수 있을 줄 알았어. 하지만 아무리 해도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를 않더라. 분명히 내가 더 잘 하는 것 같은데, 다른 어린애들이 발탁되어서 스타가 되고. 나는 배우 일로는 입에 풀칠이 안 돼서 맨날 다른 허드렛일 찾아다니느라 손이 맨날 부르트고. 시간이 없고 돈이 없어서 치장을 못 하면 여배우가 그런 거 신경 안 쓴다고 또 욕먹고.”
그녀는 담담하게 옛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잠깐... 이봐, ‘시스템’. 지금 ‘유도’ 적용중이야?
‘띠링!’
<유도 스킬은 현재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수르키가 그냥 말하고 싶어하는 듯 합니다.>
“그렇게 한 3년이 지났나...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안 되더라도, 이 생활을 접더라도 뭐라도 해 보고 접고 싶었어. 그래서 에렌스를 찾아갔지. 스타가 되고 싶다고. ‘뭐든지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더라고. 두 번이나.”
그녀는 다시 무릎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내가 아까, 이런 파티 처음이냐고 물었지? 너 아까 저기에서 늙은이들한테 당하던 젊은 애들 보고 그러는거지?”
이번에도 부정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난 걔네들 마음을 잘 알아. 나도 그랬으니까. 에렌스의 소개로 이런 자리에 와서 몇 번 다리를 벌려주면, 다음날 좋은 배역이 하나 생기고, 오페라의 오디션 자리가 생기고는 했지. 처음에는 정말 죽고 싶었어. 이러려던 게 아닌데, 이렇게까지 스타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닌데... 하면서.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정말 적응을 잘 하더라. 어느새 당연하다는 듯 이런 자리에 와서, 나에게 배역을 가져다주고 후원을 해 줄 유력자와 으슥한 곳으로 사라지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는 신기하다고 느낄 때가 많았어.”
그녀의 고백은 나에게 향했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향한 것 같았다. 요약하자면, 몸을 팔아서 배역을 따내고 스타가 되었다는 건가. 더럽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렇게까지 스타가 되고 싶었나? 하는, 그녀의 마음 안에 있는 열망의 크기가 궁금해졌다.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지. 그리고, 돈 많은 사람들도 이제는 나를 별로 찾지 않고. 더 어리고 싱싱하고 적극적인 애들이 언제든 있으니까. 그래서 이제는 이런 파티 자리에 굳이 오지 않아도 돼. 나이 들어서인지 쉬고 싶기도 하고. 근데, 에렌스한테 부탁해서 억지로 같이 왔어.”
“왜요?”
“너 만나고 싶어서.”
“에엑?”
너무 놀란 나머지 내 입 밖으로 튀어나온 소리는 되게 이상한 소리였다. 수르키 씨가 풋 하고, 입을 가리며 웃었다. 온갖 동작을 컨트롤하는 배우답게 그 동작 하나에서도 나는 눈을 잡아끄는 매력을 느꼈다.
“어제 에렌스의 제의를 한 마디로 거절하던 네 모습을 보면서, 옛날의 나를 떠올렸어. 아직 노력하면 올라갈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의 나를. 그 때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가끔 그 때의 내가 그리워질 때가 있거든. 지금은 너무 때가 묻고 더러워진 나인데, 어제 만난 너는 너무 강렬하고 순수한 느낌이었어. 그래서... 그냥, 한 번 더 그 강렬한 빛을 보고 싶어서.”
그녀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내 앞에 서서, 허리를 굽혀 얼굴을 내 얼굴 가까이에 가져온 그녀는 말했다.
“아까 그런 사람들 말야. 물론 돈과 권력으로 억지로 쾌락을 쫓는 사람들을 변호할 마음은 없어. 언젠가 신의 천칭 앞에 섰을 때 벌을 받겠지. 하지만, 그들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젊은 사람들 말야. 그 사람들까지 역겹게 여기지는 말았으면 좋겠어. 어쩔 수 없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게라도 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나는 너무 가까이 온 그녀의 얼굴 때문에 약간 부담스러워 눈을 돌리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저 안됐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래... 고맙다고 말하고 싶네.”
그녀는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게 했다.
“나도, 안 됐다고 생각해 주면 안 될까?”
“네?”
그녀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러더니, 그녀가, 천천히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리며, 나에게 입술을 맞대어왔다. 나는 그녀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 속도 그대로, 우리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
============================ 작품 후기 ============================
오늘 자정에는 씬이 나오겠네요.
수르키가 약간 억지를 쓰고 있는 게 맞습니다. 전형적인 자기합리화죠.
뭐, 기리인이 그걸 지적할 이유는 없지만요. ㅎㅎ
약간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제 조아라 연재작 중에 제가 좋아하는 작품에서 발암캐에게 거하게 당하고 나서 잠을 설쳐서인지 제 컨디션이 아니라서 늦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NTR내성이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발암 내성도 거의 없네요.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고 가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숫자가 1 올라갈 때마다 쓰는 보람을 정말 많이 느낍니다.
(리리플)
eastarea 님 // 언제나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내 매력 100 앞에 모두 무릎꿇어라!" 하는 중2병 컨셉으로도 한 번 나가볼까요? ㅎㅎ;;
longway 님 // 네, 그래서 제도의 파티는 이런 퇴폐적인 면이 좀 덜하겠죠? 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