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94화 (94/309)

00094 4. 누군가의 즐거움이 누군가에게는 슬픔 =========================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다. 이미 노천극장 주변은 극도로 시끄러웠다. 마차와 사람들로 도저히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형의 말에 따라 점심을 먹기도 전에 이미 출발을 하지 않았다면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을 수도 있을 분위기였다.

노천극장은 이미 경기장으로의 변신이 완전히 끝난 상태였다. 겉에서 안이 안 보이게(그러니까, 돈을 안 낸 사람들이 볼 수 없게) 테두리에 쇠로 철책을 세우고 천을 둘러버렸다. 몇몇 곳만이 열려 출입구 기능을 하고 있었다.

출입구 앞에는 누가 봐도 엄청 무지막지하게 생긴 어깨가 떡 벌어지고 근육으로 셔츠가 터질 것 같은 사람들이 여럿 서 있었다. 경기장으로 입장하는 사람들은 일일이, 그 어깨들에게 무기나 이상한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확인받아야 했다. 그래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모양이었다.

‘크주크 가하’, ‘에프오 드라비’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이름을 확인하고, 자신의 줄을 찾아가고 있었다. 에프오 쪽에서 낸 관객석을 분리하자는 의견이, 형의 도움에 의해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그보다 작게, ‘귀빈 및 내빈용 출입구’라는 화살표가 있었다. 음. 저 쪽으로 가면 되겠군.

“너 아까부터 왜 이리 고개를 두리번거리냐?”

형이 핀잔을 줬지만 나는 계속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귀빈용 출입구 앞에서 만나기로 했었는데... 안 보일 리가 없는데... 아. 저기 있다. 나는 손을 번쩍 들어보였다. 비키 씨는 나를 발견하고 손을 마주 들어보였다. 형은 손을 드는 비키 씨를 보더니, 나를 보며,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뭐야, 기리인. 그런 거였냐?”

“배에서 부탁하더라고요. 같이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리인. 제국의 지엄한 법령에...”

“위배되는 일은 하지 않았거든요.”

톨라츠 아저씨와 에빌로 누나는 그저 말 없이, 어찌됐든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아저씨는 언제나 짓고 있던 그 푸근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에빌로 누나는 내가 누나를 안 이후로 처음으로 눈이 흥분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뭐야 이 사람. 형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보다가, 손을 뻗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뭔가 사정이 있는거지?”

“네, 형. 나중에 얘기해줄게요.”

“그래. 나중에 꼭 얘기해줘.”

우리는 입구에 비해 약간 한산한 귀빈용 출입구로 갔다. 비키 씨는 나를 보고 손을 흔들다가, 나머지 일행들을 보고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그녀라 해도 이 사람 많은 곳에서 드레스를 입고 올 수는 없었던지, 하얀 블라우스에 갈색의 바지와 밝은 색의 재킷을 입고 있었다. 블라우스와 재킷 위로 목선이 좀 드러나는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비키 씨. 어제 먼 발치에서 눈인사만 드렸었죠?”

“네, 안녕하세요. 에아임 씨. 톨라츠 씨. 에빌로 씨.”

나 말고는 이름을 한 번씩만 들어봤을 텐데, 그 이름을 기억해서 일일이 불러주는 것도 대단하다. 모두들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비키 씨는 나를 보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내 억지를 들어줘서 고마워요, 기리인 씨.”

“아닙니다. 제가 듣고 제가 결정한 거니까요.”

형은 우리 둘을 잠시 번갈아 보다가, 웃으며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세자르 씨는...?”

“그이는 몸이 안 좋아서 사람 많은 곳에는 가기 힘들 것 같다고...”

비키 씨는 뒷말을 흐렸다. 형은 별 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품 안의 주머니에서 크주크 형이 줬던 금속판 티켓을 꺼낸 후, 입구를 지키고 있던 어깨에게 보여주었다. 어깨는 금속판의 번호를 확인하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금속판 중에서 같은 번호를 찾아낸 후, 맞춰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주크 선수 쪽 링사이드 5인 티켓, 확인되었습니다. 들어가시죠. 안내를 따라 가시면 됩니다.”

천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저께 봤을 때와는 풍경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넓은 원형의 노천극장은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사이에 넓은 공간, 대략 열 걸음 정도 되는 공간을 두고, 로프로 두 구역이 구분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물밀듯이 줄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열 걸음 정도 되는 그 사이의 공간에는 시청 소속 같아 보이는 병사들이 할버드(halberd)를 들고 열맞춰 서 있었다. 만약의 사태에 사람들이 건너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 같았다.

“형이 시장님한테 말한 거에요?”

“응. 병사들이 고생하는 결과이긴 한데, 그래도 폭동이 일어나는 것보다는 낫지. 병사들이 서 있으면 설사 누가 음모를 꾸미더라도 실천하기 좀 꺼려질테고.”

형의 말이 일리가 있다 싶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덩치 한 명의 안내를 따라 우리는 계단을 통해 아래로 계속 내려갔다. 안내까지 받으며 아랫자리로 내려가는 우리에게 시선이 쏟아졌다. 음. 약간 부끄럽다.

“가슴을 펴세요, 기리인 군. 사람들은 우리를 크주크 씨의 관계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기죽은 모습을 보이면 크주크 군에게 누가 됩니다.”

그래. 나에게 이 표를 보여준 형을 봐서라도 당당해지자. 그렇게 우리는 맨 아래로 내려가, 링 바로 옆에 <예약석>이라고 표시된 자리를 안내받았다. 아저씨, 누나, 형, 나, 그리고 비키 씨 순서대로 앉았다. 나는 나를 안내해 준 덩치에게 손을 들고 말했다.

“혹시 선수를 잠시 볼 수 있을까요?”

“원래는 안되지만, 선수 관계자시니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 쪽으로 오시지요.”

나는 비키 씨를 보고 말했다.

“같이 가요.”

그녀가 그 반쯤 감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시합 전에 가서 형을 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 형에게 무슨 마음으로 형을 보러 왔는지도 말하고, 형을 응원하기 위해 왔다고 말하세요. 말 안 하고 있다가 여기 앉은 비키 씨를 보면 형이 동요할 수도 있잖아요.”

명백히 동요하는 표정을 짓던 비키 씨는, 지긋이 빨간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와 비키 씨는 덩치를 따라, 우리가 내려왔던 계단을 따라 다시금 올라가, 바깥으로 나가서, 멀리 떨어진 곳의 천막으로 안내받았다. <크주크 가하 대기실>이라고 써 있었고, 할버드를 든 병사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형!”

천막 안에는 형과 뮤리나 누나, 그리고 윗머리가 벗겨진 중늙은이 – 코치 라고 불리는 것 같았다 – 셋이 있었다. 형은 천막 한가운데의 의자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숨을 고르고 있다가, 눈을 번쩍 떴다.

“어, 기리인.”

“응원하러 왔어요.”

“그래. 고맙다.”

“그리고...”

나는 살짝 비켜섰다. 내 등 뒤에 서 있던,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던 비키 씨가 드러났다. 형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 그 때 배에서 본 분이네?”

사정을 모를 뮤리나 누나는 그렇게 말했고,

“어... 비키...?”

코치는 비키 씨를 아는 것 같았다. 하기야. 그럴 법하다. 오래 전부터 형과 사귀었다면, 형과 같이 있었던 코치가 비키 씨를 아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뮤리나 누나도 뭔가 이상하다는 눈치를 받았는지 아무 말 하지 않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기만 했다.

“형. 비키 씨가 저한테 부탁했어요. 곧 이 레카 시를 떠날 거라고 하더군요. 가기 전에 형을 보고,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어요. 형도 그 때 저한테 그랬잖아요. 시합하는 거 한 번 보여주고 싶다고. 이야기해 보고 싶다고.”

내 이야기가 형에게 전달되었을까. 형은 내 이야기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비키 씨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비키 씨 역시도 형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비키 씨의 눈에는 눈물이 약간 고여 있었다. 오랜 역사를 공유하는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그리고 공유할 수 있는, 오랜 세월과, 그 세월에 따르는 감정들. 떨어져 있던 시간동안 잠시 잠자고 있었을 뿐 여전히 아련하기만 한 그 감정들.

“자, 자리를 잠시 비켜 주자. 거기, 기리인 군도 잠시 같이 나가지. 비키, 오랜만이야. 반갑다.”

비키 씨는 코치에게 허리숙여 인사를 했다. 코치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려주고는, 뮤리나를 끌고 천막 바깥으로 나갔다. 나는 비키 씨의 등을 가볍게 밀어 천막 한가운데로 보내고는, 나가서 문을 닫았다.

“뭐, 뭐야 저 여자? 기리인, 뭐야? 아는 사람이야? 오빠랑?”

“크주크의 연인이었다. 옛날에.”

“네에에에?”

뮤리나 누나는 크게 놀랐다. 누나가 충격으로 입을 크게 벌린 채 어버버, 하고 있는 동안, 코치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이봐. 기리인이라고 했었지? 시합 전에 이렇게 선수를 동요시키면 어쩌자는 건가? 자네 미쳤나?”

“아뇨.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형이 간절하게 한 번 비키 씨에게 자기의 시합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고, 비키 씨는 얼마 안 있어 레카 시를 떠납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할 거라면 지금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은 채 링사이드에 앉아 있는 비키 씨를 보면 형이 더 동요할 것 같았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그러더니, 코치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래. 크주크에게 저 여자가 어떤 의미인지는 두 사람 말고는 내가 잘 알지. 이렇게 데려온 걸 보면, 자네도 대충 사정은 아는 모양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뮤리나 누나는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사정? 무슨 사정?”

“누나. 나중에 얘기해 줄게. 나중에.”

그리고 나는 코치님을 바라보았다. 코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한 번은, 이렇게 털고 가는 게 좋겠지.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몰라. 마지막 시합이니까...”

그리고 그는 바닥에 털썩 앉아버렸다. 뮤리나 누나는 여전히 나와 코치를 번갈아 바라보고만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대략 반 시간 정도가 지난 후, 천막이 열리고 비키 씨가 나왔다. 눈물자욱도 있고, 눈도 부어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그녀는 코치와 뮤리나 누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코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얘기는 잘 했나?”

비키 씨가 고개를 끄덕이자, 코치는 말했다.

“자. 크주크 마음에 있는 짐 하나를 내려놨으니, 이제 크주크가 마음을 다스리고 집중할 시간을 줘야지. 비키, 표정이 밝아서 나도 마음이 놓이네. 만나서 반가웠다.”

“고마워요, 아저씨.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인사드리러 갈게요.”

우리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코치와,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뮤리나 누나에게 인사한 후 다시 경기장으로 향했다.

나는 비키 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확실히... 어... 그래, ‘후련’했다. 하고 싶었던 것을 한 느낌. 그녀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돌아보더니, 살폿 웃으면서 말했다.

“고마워요. 기리인 군 말을 듣기를 잘 한 거 같아요.”

“어...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어쩐지 약간 쑥스러워졌다.

“나 얼굴 엉망이죠? 어쩌지...”

평소같으면 괜찮아요, 그래도 예뻐요 이런 식의 말 한두 마디는 던져봤겠지만... 지금은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와 몸을 섞은 적이 있는 여자지만, 왠지 지금은 완전히 남의 여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무례로 느껴질 것 같아, 나는 “자리에 가서, 에빌로 누나한테 뭐 쓸만한 거 있는가 빌려보죠.”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어느새 1메가 넘게 썼네요.

감사합니다. 모두 읽어주시는 여러분들 덕입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부탁드립니다. 숫자가 1 올라갈 때마다 글 쓰는 보람을 팍팍 느낍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아무래도 기리인은 수사기사로서의 마음가짐이 아직은 없으니까요 ㅎㅎ 그리고 지금 이 사람들이 이 도시의 마약 수사까지 하기는 힘들 겁니다. 그 얘기는 나중에 작중에서 설명드리기로 하죠.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