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95화 (95/309)

00095 4. 누군가의 즐거움이 누군가에게는 슬픔 =========================

긴 계단을 내려가며 나는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비키 씨.”

“네?”

“무슨 얘기 했는지 물어봐도 돼요?”

“아뇨, 안 돼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풋 하고 웃으면서 내 팔을 툭 쳤다. 아. 파괴력이 강력하다. 옛날에, 크주크 형을 처음 만났을 때의 비키 씨는 저랬겠구나. 언제나 주변 것에 무관심한 듯 반쯤만 눈을 뜨고 있던 그녀가, 형과 보낸 30분 이후에는 완전히 눈을 뜨고 있었다. 나이에 걸맞는 발랄한 매력까지 가진 그녀는, 약간 형이 부럽고 질투난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농담이에요. 음... 대부분은 기리인 씨가 예상할 만한 내용일텐데요. 크주크한테 내 얘기 들었다면서요.”

“네...”

그녀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냥, 그 때 못했던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그때 왜 그랬는지 얘기했고, 크주크는 왜 그런 약까지 먹으면서 성공을 탐했는지 말해 주었고요. 그때의 우리는 너무 어리고 서툴렀나봐요. 약간만 늦게 만났더라면, 그래서 조금만 더 서로를 이해해 주었으면, 지금같지는 않지 않을까요?”

“그랬으면 지금처럼 서로를 그리워하지 않았을걸요.”

그녀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내 팔을 툭 쳤다.

“어머, 진짜 그렇겠다. 기리인 씨는 로맨스 소설 같은 거 써도 잘 쓰겠어요?”

“또 마음에 없는 소리 하시네.”

그렇게 투닥대는 동안 우리는 우리 자리에까지 내려왔다. 어느새 저 멀리 보이는 시계탑의 시간이 두 시에 거의 가까워져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관중석도 거의 다 꽉꽉 들어차 있었는데, 아직도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어, 기리인. 크주크는 어때?”

“잘 있어요. 뭐, 열 번째 방어전을 하는 격투왕이 이제 뭐 이런 거 때문에 새삼 긴장하겠어요?”

내 너스레에 형은 피식 웃었다. 그 때, 누군가 링 위로 올라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공(gong)을 콰앙- 하고 쳤다. 일시에, 그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란이 확 죽었다. 그 남자는 마력석을 넣어서 작동시키는 확성기를 들고 있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내빈 여러분! 이 자리에 오신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한 쪽으로밖에 나가지 않는 확성기였지만, 그는 한 방향으로만 바라보며 말했다. 그랬는데, 소리가 마치 약간 시차를 두고 다시 다가오듯 약간의 웅웅거림과 함께 귀에 들려왔다. 뭐지. ‘시스템’, 이건 마법적인 효과인가?

‘띠링!’

<아닙니다. 건물의 설계로 만든 반향입니다. 어느 자리에서건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설계입니다.>

워우. 그런 게 있단 말야? 내가 그런 것에 감탄하는 사이,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만 명이 넘어가는 사람들이 지르는 소리가 아까처럼 울려오자 나는 온 몸 전체가 소리로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의 환호가 약간 잦아들자, 링 위에 선 남자는 말했다.

“제국력 413년 4월, 레카 시 체육협회가 주관하고 레카 시 시청 및 레카 상단 연합회가 후원하는 제국 중부 격투왕 선발 대회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아울러! 이번 대회는 현 격투왕의 왕중왕 도전전을 겸합니다!”

“와아아아아! 가하! 가하! 가하! 가하!”

“우우우우-”

정확히 우리를 중심으로 왼쪽은 야유를 퍼붓고 있었고, 오른쪽은 가하! 가하!를 외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어느 쪽이 서던쓰이고 노던쓰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무대 위의 남자는 관객을 둘러보더니, 다시 환호가 약간 가라앉자 말했다.

“먼저 한가지 양해말씀 구하겠습니다. 보통 격투기 대회는 격투왕전에 들어가기 전에 신인 선수들간의 대결 등을 여흥거리로 보여드리곤 합니다. 그러나, 오늘 대회는, 그 중요성을 감안하여, 일체의 여흥 없이 바로 본 경기로 들어가기로 하였습니다.”

“와아아아아!”

양해말씀이라고 했는데 오히려 관객들이 더 좋아한다. 하긴, 세상 최고의 메인요리가 기다리고 있다면, 굳이 맛있지도 않는 샐러드 같은 걸로 배를 채울 필요가 없겠지. 남자는 공을 한번 더 쾌앵- 하고 쳤다. 그게 신호였던지, 천막으로 가려졌던 한 쪽에서 새로운 입구가 열리고, 어젯밤에 봤던 그 키가 껑충한 남자, 에프오 드라비가 몇 명의 남자와 함께 나타났다.

“그럼 오늘의 선수를 소개하겠습니다! 도전자! 혜성같이 나타나, 현 챔피언 다음으로 어린 나이에 왕좌 도전권을 획득한 남자! 떠오르는 신성! 레카 북부 체육관 소속! 196cm, 98kg! 에-프오- 드라-비-!”

나는 내 온 몸을 울려대는 소리 때문에 이를 꽉 악물어야 했다.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제히 야유와 환호를 보내는 것이 그대로 내 몸을 울려대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환호 속에, 에프오는 얇고 화려한 로브를 뒤집어쓴 채, 어느새 깔린 푸른색의 카펫을 맨발로 밟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손에는 마법적인 문양이 손목에 찍힌 두툼한 벙어리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와, 펄쩍 하고 마치 살쾡이가 뛰어오르듯 가장 높은 로프 위로 몸을 휙 날리더니, 가볍게 링 바닥에 안착했다. 환호소리가 더 커졌고, 에프오란 남자는 자신이 지나쳐 오만하게까지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환호에 답례했다. 그러면서 환호의 크기만큼 큰 야유에는 무관심한 듯했다.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나는 옆의 비키 씨를 돌아보았다. 비키 씨는 에프오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두 손을 모아 깍지끼고,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기도라도 하시는 건가... 에프오는 펀치와 킥을 날리고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몸을 풀었고, 사회자는 공을 한 번 더 울렸다. 쾌애앵-. 그러자 반대쪽이 열리며 크주크 형이 뮤리나 누나, 코치와 함께 나타났다. 사회자가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도전을 방어할, 현재 제국 중부 격투왕이자, 도전해 온 도전자를 무려 아홉 번이나 격퇴해 내어 왕중왕 등극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중부 최강의 격투가! 무시무시한 공격 끝에 한 방으로 상대를 침몰시키는, ‘가하의 한 방’190cm, 94kg! 크-주-크- 가아---하---!”

아까보다 더 큰 환호성이 울렸다. 어느새 깔린 붉은 카펫 위로 형은 침착하고 차분하게 계단을 내려왔다. 아까 에프오가 자신감이 지나친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형은 오래 한 일을 해서 달인이 된 사람이 보여주는 약간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형에게 야유를 퍼붓던 노던쓰들의 야유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형은 그런, 반대자들마저도 침묵시킬 수 있는 아우라(aura)를 내뿜고 있는 것만 같았다.

‘띠링!’

<당신은 세련된 무예의 편린을 목격하였습니다. 반복하여 경험을 쌓을 경우 새로이 무예와 관련된 스킬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진정한 강함과 자신에 대한 신뢰가 어떤 것인지, 그것이 가짜와는 어떻게 다른지 고찰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무예의 편린 – 2/5>

이해가 되면서 동시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저런 걸 할 수 있다고? 설마... 나는 에프오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팍 굳어 있었다. 아니, 몸까지 굳어 있었다. 그는 기 죽지 않고 크주크 형에 대한 투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보였다. 갑자기, 그의 능력치는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졌다.

‘정보 확인.’

이름          : 에프오 드라비

나이          : 24

HP           : 4800/4800

힘            : 93

민첩          : 92

지력          : 75

마나친화력    : 60

매력          : 75

지구력        : 94

특수          : 복합성격*

스킬          : 맨손격투 A0>

<레카 시의 격투가입니다. 크주크 가하 이래 가장 강력한 신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복합 성격이란 그의 성격에 이중적인 면이 있음을 말합니다. 오만하지만, 그 안에는 강한 열등감이 있습니다. 그 열등감이 드러났을 때 그는 비열하게 바뀔 수 있습니다.>

으음... 시스템, 부탁 하나만 하자. 크주크 형이랑 저 놈의 능력치를 비교해 보여줄 수 있을까?

‘띠링!’

<능력치 비교>

<크주크 : 26/5600/98/89/77/59/78/95/내구 88/맨손격투 S, 검투 A0

에프오 : 24/4800/93/92/75/60/75/94/복합성격/맨손격투 A0>

크주크 형이 힘이 더 세고, 대신 에프오는 그만큼 더 빠르고 민첩한 모양이군. 그럼... 크주크 형은 앞으로 들어가야 할테고, 에프오는 그걸 들어오지 못하게 싸우겠군.

“오늘의 주심을 소개합니다! 사정이 생겨 오늘 아침에 심판이 변경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순간 에프오가 약간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 눈은 황급히 에프오와 함께 계단을 내려왔던 그의 팀에게 향했다. 그들도 썩 좋지만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의 주심은, 시장 각하의 지정에 의해, 시청 체육과 과장이며, 과거 격투계에 투신해 왕좌를 세 번 방어해 낸 바 있는, 로치티 님께서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와아-! 생각보다 작지 않은 환호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노던쓰고 서던쓰고 없었다. 모두가 환호와 박수를 보내는 가운데, 약간 살집이 생겼지만 그래도 체격이 탄탄한 남자가 흰 색 바탕에 검은 색 세로줄무늬가 들어간 셔츠를 입고 링 위로 올라왔다. 그가 링 한 가운데 서자, 크주크 형과 에프오는 그의 앞에 나란히 서서 상대를 바라보았다. 아마 시선이 실제적인 힘이 있었다면 서로의 몸은 뚫렸으리라.

“룰은 예전과 같습니다! 한 사람이 완전히 쓰러지기 전까지는 승패가 결판나지 않습니다! 몸의 어디든 타격이 가능하지만, 상대를 잡거나, 밀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외, 상대를 이빨로 물거나 머리로 받는 행위, 그리고 국부를 가격하는 행위는 즉각 반칙패 판정을 받습니다!”

살벌한 규칙이다. 누가 초주검이 돼서 쓰러져야지만 경기가 끝난다는 것 아닌가. 스포츠가 아니고 정말 서로를 죽이려 드는 격투인 건가... 나는 다시 비키 씨를 바라보았다. 비키 씨는 아까와 같은 자세로, 두 손을 꼭 모으고 눈을 꼭 감은 채였다.

============================ 작품 후기 ============================

2016헌나1, 어제 11시 21분에 있었던 판결문을 읽어보고 있습니다.

잘 쓴 글이란 내용이 아무리 어려워도 술술 읽히는 글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판결문은 정말 예술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술술 읽혔습니다.

그렇게 술술 읽혀지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고 가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숫자가 1, 2 늘어나는 걸 보는 것이 글쟁이의 보람입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그러게요. 먼저 크주크를 새하얗게 불태우고, 글러브를 비키에게...?

eastarea 님 // 93편에 주신 과분한 칭찬 감사드립니다. 어... 헤어진 여자... 저도 만나본 적이 없어서... 쿨럭.;; 소설에서나 대신 써 보는 거죠 ㅎㅎ;;; 감사합니다!

melontea 님 // 그러게요. 너무 고생시키지는 말아야겠네요. ㅎㅎ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