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6 4. 누군가의 즐거움이 누군가에게는 슬픔 =========================
어느새 링을 빠져나간 사회자는 옆 쪽에 놓여있던 테이블로 돌아갔다. 그의 앞에는 크고 작은 모래시계 두 개가 있었다. 그는 강하게 공을 치며, 큰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관객들이 환성을 지르는 가운데 두 선수가 가까이 다가갔다. 링의 가운데에서 형이 왼손을 내뻗었고, 에프오가 왼손을 마주 내뻗어 대었다. 인사 같은 건가. 두 선수는 거리를 재며 링 가운데에서 서로 주먹과 발을 뻗고, 피하기 시작했다.
“와아아!”
“죽여라! 죽여라!”
“크주크! 날려버려!”
“에프오! 에프오!”
원형극장의 가운데는 모든 소리가 쏟아지게끔 설계되어 있었다. 만 명이 넘는 사람이 제각기 환호성과 응원, 욕설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소리가 나에게로 다 쏟아들어져 오고 있었다. 한때 마법사로서 나는 소리에 대해 안다. 소리가 귀로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는 걸. 몸을 통해서 들어오는 소리가 있다는 걸. 아카데미 1학년 때, 자기의 말소리를 녹음해 들어보게 하는 경험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원형극장에 모인 모든 소리가 내 몸을 울리고 있었다. 쿵. 쿵. 쿵. 지극히 냉정할 것 같던 내 심장까지 뒤흔들고 있었다.
‘띠링!’
<흥분하지 않는 것이 냉철이 아닙니다. 흥분하는 자신과 냉철한 자신을 양립시키는 것이 진짜 냉철입니다.>
그게 가능하긴 한 건가... 나는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가장 나를 놀라게 한 건 에빌로 누나였다. 누나는 두 주먹을 꽉 쥐며 뭐라 알아듣기 힘든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저 사람한테 저런 면이 있었나. 톨라츠 아저씨도 얼굴이 다소 상기되어 있었고, 에아임 형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비키 씨는... 잇자국이 날 정도로 꽉, 자신의 엄지손가락 관절을 깨문 채, 링 안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모든 사람들 가운데 크주크 형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는 건 비키 씨 혼자였다. 그 동안에도 쿵, 쿵, 소리들은 내 몸을 울리고 있었다.
“와아-!”
순간, 에프오가 긴 다리를 이용해 크주크 형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어?! 갑자기 에프오의 몸이 틀어지며, 허리께를 향하는 것 같던 에프오의 발이 갑자기 생각하지도 못한 궤도로 뒤틀어지며 곡선을 그려 크주크 형에게 내려꽂히고 있었다.
씨익.
형이 웃었다. 그리고 나도, 웃었다. 배에서 크주크 형과 함께 했던 훈련이 생각나서였다. 휘어지는 화살. 형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순간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킥의 반경 안으로 들어간 형은 왼손을 들어 에프오의 날아온 다리 – 형이 순간적으로 빠르게 앞으로 들어가서인지, 무릎과 허벅지의 경계 쯔음이었다 – 를 막아내며, 동시에 몸을 틀어 에프오의 왼쪽 옆구리에 아래에서부터 주먹을 꽂아넣었다. 퍽!
“그렇지!”
“와아아아아!”
노던쓰 쪽의 함성이 순간적으로 확 줄어든 만큼 서던쓰 쪽의 함성이 확 커진다. 에프오는 찡그리면서도 왼 손을 빠르게 휘둘러 형을 밀어내려 하지만, 형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 몸을 아래로 숙이며 빠르게 앞으로 전진한다. 에프오가 왼 발을 낮게 휘둘렀다. 철썩. 형의 장딴지 안쪽에 킥이 적중... 아니다! 형은 이미 맞기 전부터 다리를 휘두르고 있었다! 에프오의 다리가 제 자리로 가기도 전에 형은 자신의 왼 발을 때린 에프오의 힘까지 이용해 왼 발을 옆쪽에 내딛었다. 그러면서 몸통을 틀며 오른발을 끌어올려 에프오의 턱을 노렸다. 에프오가 간신히 턱을 뒤로 젖혀 피했다.
“아!”
외마디 탄성이 나올 정도로 아쉬운 공격. 그 때 사회자가 공을 다시 쾡- 하고 쳤다. 어? 끝날 때까지 하는 게 아닌가보네? 하긴 그러면 모래시계가 있을 리가 없겠지... 사회자가 작은 모래시계를 뒤집는 동안, 크주크 형과 에프오 쪽의 수행원들이 바쁘게, 링 안으로 조그만 의자를 넣고, 선수들을 앉히고, 물을 먹이고, 땀을 닦아내며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1라운드는 명백히 크주크의 우세야!”
에아임 형이 나와 비키 씨에게 말했다. 비키 씨는 그걸 듣는지 못 듣는지, 그녀의 눈길은 크주크 형에게 못박혀 있었다.
“너무 제대로 옆구리에 들어갔어! 크주크의 접근을 막으려면 에프오는 왼 손과 왼 발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걸 하기 힘들게끔 왼쪽 옆구리를 공략해 놓은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키 씨는 초조하게, 계속 크주크 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크주크 형이 이 쪽을 돌아보았다. 형은, 비키 씨의 초조한 모습을 보더니, 씨익 웃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비키 씨의 떨림이 멎었다.
쾌앵-
“우와아아아아!”
다시 큰 모래시계가 뒤집히고, 사람들이 환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에프오는 옆구리가 부담되는지 아까처럼 손을 뻗으며 견제를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형은 앞으로, 천천히, 밀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형이 한 걸음 앞으로 들어가면, 에프오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들어가고, 물러나고. 형은 조금씩 에프오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크주크가 무리만 하지 않으면 유리할 것 같은데!”
그 순간, 에프오가 갑자기 앞으로 확 치고 나왔다. 하필이면 그때 한 걸음 앞으로 내딛고 있던 형은 최대한 몸을 숙이며 팔로 얼굴을 가렸고, 그 팔 위에 에프오의 오른손이 작렬했다. 펑. 형이 두 걸음 뒤로 물러나자 에프오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치고들었다.
파파파파파팍. 두 사람이 링 한가운데에서 격렬하게 격돌했다. 팔꿈치와, 주먹과, 무릎이 오간다. 상대를 지근거리에서 묶으려는 크주크 형과, 그 지근거리로 스스로 뛰어들어간 에프오. 순간, 형의 팔꿈치가 에프오의 왼뺨을 후려갈기고, 동시에 에프오의 무릎이 형의 왼쪽 옆구리에 틀어박힌다. 에프오의 입에서 피가 퍽 하고 터지지만, 형 역시도 옆구리에 입은 타격이 만만치 않은지 바로 추가타를 넣지는 못한다.
“우와아아아아!”
피가 터지자 환호성이 갑절로 커진다. 나는 잠시 링이 아닌 뒤쪽을 돌아보았다. 주먹을 불끈 쥐고, 얼굴이 벌개진 채, 사람들이 일어서 있었다. 눈이 충혈된 채 사람들은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외마디 소리를 질러대며, 피를 갈구하듯, 더 큰 응원과 욕설을 뱉아내고 있었다. 나는 뜨거웠던 심장이 약간 식는 느낌이 들었다. 남의 피 흘리는 것이 그렇게나 흥분되는 일인가. 모르겠다. 이미 이건 운동경기의 영역을 벗어난 것 같은데.
에프오는 피 섞인 침을 퉤 하고 뱉어낸 후 다시 치고 들어왔다. 지근거리에서 맞는 만큼 치겠다는 전략인가.
“에프오 쪽이 옆구리 때문에 조급해 진 게 틀림없어! 장기전으로 가서 타격을 누적시켜야 나중에 유리할텐데, 지금처럼 달려드는 걸 보면 장기전이 힘든 거야! 하지만 크주크의 맷집은 유명한데...?”
형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때, 퍼억. 두 사람이 다시 한 번 타격을 주고받았다. 에프오의 주먹이 형의 배에 꽂혔고, 형은 그걸 견디며 에프오의 턱 쪽을 팔꿈치로 후려갈겼다. 에프오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머리에 충격이 왔는지 걸음걸이가 안정되지 못했다. 형은 얼굴을 잔뜩 일그리면서도, 맷집 88이 무색하지 않게 앞으로 달려들려 했다.
쾌앵-!
하필이면 그 때 공이 울렸고, 심판이 형과 에프오 사이에 끼어들어 막았다. 노던쓰 쪽에서 안도의 한숨이, 그리고 서던쓰 쪽에서는 욕설이 터져나왔다. “심판! 뭐야!” “저거 시간 안 됐는데 친거 아냐?” 그러거나 말거나 링 안에서는 의자를 갖다놓고 선수를 돌보기 바빴다.
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형의 표정이 아까만큼 펴져 있지 않았다. 배에 맞은 두 발이 꽤 아픈 것일까. 에프오는 옆의 코치가 주는 물을 한 모금 물고는 입 안을 헹궈낸 후 다른 수행원이 준 양동이에 뱉아냈다. 그 물이 피로 시뻘갰다. 입 안은 이미 엉망진창이겠구나. 두 코치들이 뭐라뭐라 소리치고 있었지만, 알아듣는지 못알아듣는지 두 선수는 회복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승부가 날 수도 있겠는걸.”
형이 말했다. 나는 형을 돌아보았다. 비키 씨는 형의 말을 못 들은건지, 계속 긴장되는 표정으로 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2라운드만에 꽤 큰 충격을 입혔어. 게다가 턱에 한 방 맞았다. 머리가 흔들렸을 거야. 크주크도 복부에 두어 발 맞은게 꽤 크게 들어간 모양이다. 서로 이제 뒤를 볼 여유가 없어. 아까처럼 격렬하게 맞붙을거다. 크주크 조심해야해. 이럴 때 한 방 행운의 펀치 같은 게 나오면 크게 흔들릴 수도 있다.”
어느새 사회자가 공을 한 번 더 울리고, 두 사람이 맹렬하게 링 한가운데로 돌진했다.
“와아아아!”
쿵. 쿵. 쿵. 발을 구르며,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며, 주먹을 휘두르며 응원하는 사람들. 내 마음은 조금씩 더 식는다. 내 몸을 울리는 소리도 더 이상 나를 흥분하게 하지는 못한다. 아까 피가 터진 것을 보고 환호하던 사람들 때문일까.
‘쾌락을 위해 양심을 버린 사람들’ 이라고, 형은 어제 상류층의 파티를 묘사했었다. 그 자리에 참석했었던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알 수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피가 튀고 멍이 들고 찢겨나가는 모습을 보고 환호하며 소리치는 사람들을 보니, 그 ‘쾌락을 위해 양심을 버린’ 사람들이 과연 그들, 부유한 사람들과 그에 달라붙는 사람들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사람이라는 게 그런 건가.
‘띠링!’
<미리 경고합니다. 지금 당신은 가벼운 인간 혐오에 빠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지 않기를, 당장 눈 앞의 경기에 집중하기를 권합니다.>
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시스템의 조언은 듣는 게 유리하다. 내가 잠시 그러는 동안에도 두 사람의 주먹과 팔꿈치와 무릎과 발은 격렬하게 휘둘러지고 있었다. 막고, 치고, 피하고, 피하는 것을 다시 치고. 자잘한 타격들을 서로 팔다리에 입지만, 서로 필사적으로 막고 피하느라 결정적인 타격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어느 새 두 사람은 자리를 바꿔 있었다. 내 쪽에서는 에프오의 등이, 그리고 형의 얼굴이 보이는 자리였다. 그 때, 형이 이빨을 꽉 깨무는 것이 보였다.
“어어어!”
형은 에프오의 발차기를 맞았다. 아니, 맞아주었다. 자신의 왼쪽 옆구리를 노린 크주크의 미들킥을 맞아주며, 형은 순간적으로 안으로 파고들어 다시 한 번 오른손으로 에프오의 턱을 올려쳤다. 맞아준 것 때문에 힘이 완전히 실리지는 않았는지, 에프오는 비틀거렸지만 타격이 결정적인 것 같지는 않았다. 형이 온 몸을 비틀며 에프오에게 주먹을 꽂아넣은 그 순간.
퍽.
마지막으로 반격을 노려본 것일까. 형의 주먹이 에프오의 코에 정확히 틀어박히는 순간, 자신을 방어하던 손마저 포기한 채 휘두른 에프오의 발차기가 형의 뒤통수를 정확히 가격했다.
============================ 작품 후기 ============================
원래 계획대로면 12라운드 혈전을 벌이려 했으나...
떨어지는 조회수가 왠지 몰라도 제 늘어지는 전개를 타박하는 것 같아서
격투기 장면은 최대한 압축해서 넣기로 했습니다.
어떤가요?
읽어주시는 한 분 한 분께 늘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꼭 부탁드립니다. 숫자 1 올라가는 걸 보며 글쟁이는 글 쓰는 보람을 느낍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에이, 기리인같은 나비에게 머무를 곳이 생기면 안되죠~ (뭐래니;;;)
eastarea 님 // 트랩이 해제되었는데 쉽게 못 가는 이유가 곧 나올 겁니다.
nnuhgwyegd 님 // 기꺼이! 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