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8 4. 누군가의 즐거움이 누군가에게는 슬픔 =========================
“레카 시 전체로 봐서는 다행인지도 몰라.”
형은 그런 말을 했다. 형의 표정이 씁쓸하지만 않았다면 나는 형에게 따지고 싶었을, 그런 냉정한 말이었다.
“노던쓰도 서던쓰도 불만이 잔뜩 차 있던 상황이야. 이번 대결에 만약 어떤 수가 개입되었거나, 결과가 어정쩡했다면 그건 그 불만세력에 기름을 붓는 결과가 될 수도 있었다. 반목이 격화되거나, 심한 경우에는 남북간 내전까지 가능한 상황이란 말이지. 그러면 이건 제도와 융파트 공작령 간의 내전까지 비화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융파트는 왜 이래요? 안 끼는 데가 없네요?”
내 말에 형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돈은 많은데, 위로는 북부 영지의 병력에 치이고, 제도로 넘어오기는 로그푸스 변경백령, 그래 울 아버지 집 말이다, 그리고 디트리클 시의 대신전이 무섭고, 하니 어떻게든 이곳저곳 찔러보며 세력을 키워보려는 거야.”
형은 쓰고 있던 서류로 다시 눈을 돌리며 말했다.
“아무튼, 그런 상황이었지. 그래서 나는 시장을 압박했다. 당장 당신이 어느 진영에서 미움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제국에서 무능력자이자 반역자로 찍히고 싶냐. 내 말 들어라. 그래서, 심판도 중립적인 인사로 바꾸고, 노던쓰와 서던쓰를 분리시키고, 몸수색을 해서 수를 못 쓰게 만들었지.”
그러더니 형은 다시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 그런 모든 게 다 필요없었을지도 모르지. 크주크가 거기서 그렇게 쓰러질 줄 누가 알았겠어... 그 덕에, 노던쓰의 불만도 서던쓰의 불만도 김이 새 버렸어. 승자도 패자도 명확하지 않은 어정쩡한 결과가 나오고 나니 이걸 가지고 뭐라 하기 힘든 거야. 일단 급한 불은 꺼 놨으니, 제도에 이 보고서 잘 제출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형은 옆에 놓여진 두꺼운 종이다발을 보고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이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어떻게 되든 놔둘 걸...”
그러더니 형은 눈을 빛냈다.
“기리인, 지금 일 없지? 나 좀 도와주라.”
“미안해요 형. 저 어디 다녀와야 해요.”
형은 과장된 좌절 포즈를 취해 보였다. 나는 나중에 다녀와서 시간이 되면 돕겠노라고 약속한 후 – 아마 형의 좌절 포즈는 저 약속을 받아내는 게 목적 아니었을까? - 방을 나섰다. 영빈관 정문에서 나는 신전에 들렀다 돌아오는 톨라츠 아저씨를 만났다.
“아저씨!”
“오, 기리인 군. 나가는 길인가요?”
“네... 어때요?”
내 상당히 축약된 질문에 아저씨는 별 무리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아저씨가 애초에 신전에 다녀오러 나가셨던 것이 두 사람의 병세를 알고자 하는 것이었으니까.
“에프오는 아슬아슬하게 죽음을 면했어요.”
“...그 정도였어요?”
“안 죽은게 용했죠. 마지막에 크주크가 뛰어오르면서 무릎으로 머리를 찍어올리던 장면 기억나나요? 머리 안에서 출혈이 있어 그대로 있었으면 에프오는 신의 천칭을 마주하러 떠났어야 했을 거에요. 다행히 사제분들의 신성 치료와 마법약으로 목숨은 건졌는데, 다리가...”
“아... 그 완전히 꺾여버린 오른발 말이군요.”
“네. 그건 신성 치료로도 완전히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아요. 관절 자체가 완전히 파괴된 거라... 아마 격투기는 고사하고 평생 목발을 짚게 되겠죠.”
나는 가벼운 욕지기가 올라오려는 것을 억눌러야 했다.
“그럼, 크주크 형은요?”
“아... 크주크는...”
톨라츠 아저씨는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크주크가 입은 타격 자체는 대단하지 않아요. 보통 사람이라도 한 달만 정양하면 잘 나을 수 있죠. 단 하나, 뒤통수에 맞은 타격을 제외하면. 그리고 그건 사제들이 있으니 쉽게 치료했어요. 그것이 충격을 남기지는 않을 거에요. 그런데...”
“그런데요?”
“음... 뭐랄까. 꽃병으로 비유해보죠. 보통 크주크 나이면, 꽃병 안에는 물이 가득 차 있어야 맞아요. 생명력이라는 물이요. 그런 사람에게 질병이나 부상은, 꽃병이 기울어져 물이 쏟아지는 것에 다름아니죠. 꽃병을 세워서, 다시 물을 채워주면, 완전히 건강해지는 거죠. 그런데 지금 크주크의 몸 상태는... 비유하자면, 꽃병에 금이 잔뜩 가고, 구멍도 나 있어요. 물이 줄줄 새는 거죠. 그의 생명력은 너무 많이 고갈되었어요.”
“그럼... 목숨이 위험한가요?”
톨라츠 아저씨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을 거에요. 하지만... 뭐, 어찌 되더라도 에프오보다는 낫겠지요.”
그러더니 아저씨는 내가 외출 채비를 하고 나온 것을 보고 물었다.
“어디 가나요?”
“아, 편지를 부치고... 형에게 다녀오러 가요.”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직접 만나서 들으면 되겠네요. 아마 기리인 군이 찾아가면 다들 좋아라 할 겁니다. 비키 씨도 거기 있을 거에요.”
---
내가 문을 두드리자, “들어오세요.” 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나를 반겼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목소리의 주인, 비키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고개숙이며 인사했다.
“어서 와요, 기리인 씨.”
“안녕하세요, 비키 씨. 이거.”
나는 사 온 꽃을 내밀었다.
“형이 깨 있었으면 먹을 걸 사 왔겠지만, 비키 씨만 있으니 이게 나을 것 같아요.”
“어머... 싱싱하기도 해라. 잠깐만요.”
그녀는 비어있던 꽃병에 물을 채우고, 꽃다발을 풀어 꽃을 맵시있게 잘 정리해싿.
“고마워요. 예쁘네요. 향기도 좋구요.”
“다행이네요. 원래는 화분을 사오려고 했는데, 꽃집 아저씨가 그러면 큰일난다고...”
비키 씨는 가볍게 웃었다. 나는 그녀의 웃음에 진 그늘이 안타까웠다.
“네, 환자를 병문안할 때는 뿌리내리는 식물을 사 가는 건 결례에요. 환자보고 너 병상에 뿌리내려라 라고 하는 걸로 받아들여지거든요.”
그녀는 나에게 의자를 내어주고, 옆의 차주전자에서 차를 따라주었다. 나는 그 잔을 받아들고, 침대에 누워 있는 크주크 형을 바라보았다.
3일 전, 형이 왕중왕에 등극한 직후, 비키 누나를 안은 채 그대로 쓰러진 이후. 형에게는 여러 명의 트리클 사제와 마법사가 달라붙었다. 덕분에 형이 입은 내상이나 피부의 상처는 거의 다 나았다. 하지만 형은 그 후로 계속 기절한 상태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형의 얼굴은 멀쩡했고 평온한 표정이었다. 숨도 고르게 쉬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 톨라츠 아저씨의 얘기를 들은 후 나는 형이 전과 무엇이 달라진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형은 마치 접시 안의 기름을 모두 태운 등잔불처럼, 생기가 많이 없었다. 예전의, 자신감 넘치고 생기있던, 존재 자체만으로 위압감을 주던 ‘가하의 한 방’ 크주크 가하는 이제 없었다. 돌아오기 힘들 것 같다.
비키 씨가 자신도 차를 따라 와서는, 내 옆에 앉아, 한숨을 푹 쉬었다.
“내 탓인가, 싶어요...”
“무슨 말이에요, 그게?”
“세자르가 죽은 거, 알고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 비키 씨에게 온 연락은 예상대로 세자르 씨의 부고를 알리는 것이었다. 비키 씨는 그 날 아침만 해도 세자르 씨의 상태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는데, 자신이 자리를 비우고 몇 시간 만에 갑자기 사망했다고 했다. 형에게 그 말을 해 주자 형은 레카 시의 공무원들을 동원해 세자르의 사인에 다른 것이 개입된 것이 있는가 조사하게끔 했다. 조사 여하에 따라 새로운 수사 기사가 파견되게끔 손써 주겠다고도 했다.
“기리인 씨가 내 별명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잠자는 꽃’이요?”
나는 ‘정보 확인’으로 알아낸 그녀의 정보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거 말구요. 요즘 내 별명은 ‘서방 잡아먹는 년’이에요.”
내 말문을 턱 막아버린 그녀는 말했다.
“사실 세자르가 나를 측실로 들인 건 이미 건강이 많이 안 좋을 때였어요. 그의 본처와 자식들은 그걸 이용해 그의 사업체를 이미 야금야금 다 빼앗아간 뒤였죠. 다행히 어느 정도의 자산은 남아 있었고, 세자르는 남쪽에서 요양을 해서 건강을 회복한 후, 남아있는 자산으로 재기를 노려볼 생각이었어요. 이번에 무리해서 미틱 시를 다녀온 것도 그 때문이었구요. 아마 그이가 죽지 않았다면 나와 함께 내려갔을 거에요.”
“그런데 왜 그런 별명이...”
그녀는 약간 처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본처와 자식들이 내가 걸리적거렸던 거죠. 나머지까지 쪽 빨아내야 하는데, 내가 세자르의 곁에서 그를 돕고 있으니까. 그들은 곧 인맥을 동원해 사교계에 소문을 퍼트리기 시작했어요. 세자르의 건강이 망가진 건 나를 만나면서부터이다, 내가 모든 걸 세자르에게서 앗아갈 거다... 사실 그렇게 하고 있는 건 그의 본처와 자식들이지만 말이에요. 정작 그래놓고, 그이가 돌아간 다음에는 내가 그 곁에 나타나면 자신들의 체면에 손상이 갈까봐, 얼마 집어주고는 나타나지도 못하게 하고 있는 사람들 말이에요.”
그러더니 그녀는 크주크 형의 팔을 만지며 말했다.
“첫 사랑이었던 크주크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 날. 마지막으로, 남쪽으로 떠나기 전에 보고 싶어서 왔다고. 크주크는 잔잔히 웃으며, 마지막 시합을 보여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어요. 그 동안 왜 그렇게 약을 먹어가며 무리했는지, 그를 통해 얻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보여주겠다고요. 지금 생각하면, 내 욕심이었던 것 같아요... 내가 크주크 곁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그는 지금 괜찮지 않을까요... 서방 잡아먹는 년의 박복한 운명이 세자르도, 크주크도 다 잡아먹게 만든 것 아닐까요...”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울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날 비명을 지르고 싶어도 비명을 못 지른 것처럼, 지금 그녀는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주저하다가, 그냥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품 안의 그녀는 너무나 작고 가녀린 존재였다. 어떻게 해 보겠다는 요만큼의 감정도 없지만, 보호해줘야 겠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가녀린 존재.
말이란 것이 얼마나 허망한가. 고급 언변 92로도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허망하고 비어있는 말 뿐이라는 것이 말이다. 내가 아무리, 우연이다, 그런 운명 같은 것은 없다라고 해 봐야, 그것은 그녀에게 빈말뿐인 말잔치에 지나지 않겠지. 나는 뭐라 말을 할 수 없어 그녀를 꼭 안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얼마 후, 그녀는 내 품에서 가볍게 벗어났다.
“고마워요, 기리인 씨. 그때도 생각했지만 당신은 정말 훌륭한 바람둥이의 재목이에요.”
그녀는 다시 가볍게 웃었다. 아까보다는 그늘이 덜한 것 같아서 나는 마음이 약간은 가벼웠다.
“내가 술집을 직접 경영할 때 단골로 오던, 어느 바람둥이가 그러더군요. 바람둥이의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조건은, 그 순간에 진심을 담는 거라고. 기리인 군이 나를 진심으로 위로해 줬다는 거 그래서 잘 알고 있어요. 너무 고맙고요.”
으윽. 나는 그 시점에서 더 오래 있어봐야 좋을 게 없겠다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키 씨. 저희 일행의 출발 날짜가 잡혔어요.”
“언제 가나요?”
“내일 모레요. 말 두 마리가 끄는 마차를 빌렸어요.”
“아... 황도를 따라 갈 모양이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쉬세요, 비키 씨. 내일 한 번 더 올게요.”
비키 씨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가 언제 자고 언제 밥을 먹는지, 형의 곁에서 떨어지기는 하는지 궁금했지만, 그런 것을 물어보지 않은 채 그냥 인사하고는 방을 나왔다.
방 문을 나서서 문을 닫자, 나는 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던 뮤리나 누나를 발견했다.
“누나? 여기서 뭐해?”
“으응... 들어가기 좀 뭐해서.”
누나는 나를 보더니, 말했다.
“기리인, 배 고프지 않니?”
============================ 작품 후기 ============================
다행히 그렇게 많이 늦지는 않았네요. 아슬아슬했습니다.
다시 월요일이네요. 아... 출근하기 싫다...
취향 타는 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분들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부탁드립니다. 하나하나 숫자 올라갈 때마다 글쟁이의 큰 보람이 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비키는... 이제 크주크의 여자이니까요.
eastarea 님 // 사제들이 있으니 죽을 부상 입어도 죽지는 않을듯해요 ㅎㅎ
melontea 님 // 어, 저도 시궁창 엔딩 싫어해요. 걱정마세요 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