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9 4. 누군가의 즐거움이 누군가에게는 슬픔 =========================
나를 데리고 근처의 노점상으로 간 누나는, 가볍게 집어먹을 수 있는 먹거리들을 몇 종류 샀다. 그러더니, 테이블에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나를 향해 손짓해 불렀다. 나는 누나의 손에서 먹거리들을 받아들고 누나를 따랐다.
누나의 뒤를 따라 한 10여분 걸어 도착한 곳은, 도시를 가로지르는 운하의 한 구석에 마련된 자그마한 공원 같은 곳이었다. 자그마한 공원에는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몇 가지 놀이기구와, 자그마한 관목들과 큰 몇 개의 나무들, 지붕이 있는 정자 정도가 있었다. 누나는 앞장서서 정자 쪽으로 가더니, 정자 뒤쪽으로 돌아갔다. 거기에 보니 좀 더 가까이에서 운하를 볼 수 있게끔, 벤치가 하나 놓여 있었다. 누나는 먹거리 봉투들을 가운데 내려놓게 하고는, 벤치에 앉아 강을 보며 말했다.
“가끔씩 갑갑할 때, 어디 가서 바람쐬고 싶을 때 자주 오는 곳이야. 여기 밑에 의자가 있는줄은 사람들이 잘 모르거든. 조용히, 물 흐르는 거 보다가 보면 마음이 좀 풀리더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는 꽈배기 하나를 손에 든 채, 강물을 바라보았다. 나한테 배고프냐고 물었던 사람이, 전혀 먹을 생각은 하지 않은 채 강물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배가 고프긴 고팠지만,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나는 누나처럼, 뭔가 이름모를 튀김 하나를 든 채, 가만히 누나의 말을 기다렸다.
“너는...”
나는 누나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여서 듣고 있다는 표시를 해보였다. 내가 뭐라고 말하지 않는 편이 누나가 편하게 이야기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때,
‘띠링!’
<고급 언변의 새로운 하부 기능이 발현되었습니다. ‘침묵’이 때로는 웅변보다 더 큰 울림을 주기도 하는 법입니다. 현재 침묵의 스킬 레벨은 Lv. 1이며, 고급 언변 수치 92의 보정을 받습니다.>
깜짝이야. 나는 다행히 아무런 티를 내지 않고 누나를 계속 바라보았다. 누나는 잠시 머뭇대다가, 말을 이었다.
“알고 있었어?”
“우연히 알게 됐어.”
“어떻게...?”
나는 뮤리나 누나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정리해 얘기해 주었다. 배에서 비키 씨를 만났던 이야기, 형이 약 먹던 것을 지나가다 우연히 본 이야기, 형이 티켓을 준 것을 보고 비키 씨가 나에게 찾아왔던 이야기. 설명을 요구했더니 형과 예전에 연인이었고,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에 형의 경기를 보고 싶다고 해서 같이 가기로 했던 이야기. 나중에 형에게 얘기를 들어보니 형도 비키 씨를 한 번은 보고 싶다고 했던 이야기. 약 이야기. 그래서 비키 씨를 데려갔던 이야기. 그 와중에 형이 개입해 공정한 대결을 만들었던 이야기.
“...진짜야? 심판 바뀐게 그, 에아임씨 덕분이라고? 그 분 정체가 뭐야?”
“어디 가서 안 말할거지? 그 분 풀네임은 에아임 로그푸스야. 제국 제2급 수사기사고, 로그푸스 변경백가의 일원이야.”
“세상에... 너 정말 대단한 분들이랑 다니는구나? 그럼 그, 톨라츠라는 덩치 큰 아저씨랑, 에빌로라는 조용하고 늘 졸려보이는 분도...?”
“응, 아저씨랑 누나도 수사기사를 돕는 수행원들이셔.”
“그럼 기리인 너도...?”
“아, 아냐. 나는 그냥 제도까지 가는 사람이었는데, 우연히 같은 일행이 됐어. 그래서 일도 도와주고 하는 거야.”
“그렇구나...”
누나는 긴 얘기를 정리하고 흡수하느라 잠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결국 못참고 손에 들고 있던 튀김을 입에 넣어버렸다. 으윽. 약간 식어서인지 아까 냄새풍길 때보다는 맛은 없다.
“난 전혀 몰랐어...”
“누나가 내려오기 전 일이었지?”
“응...”
누나는 약간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기분인지 모르겠는데 되게 답답해. 새언니...라고 불러야 되나? 1주일 전까지 있는 줄도 몰랐던 사람인데 알고 보니 나보다 오빠랑 더 가까운 사람이고...”
한숨을 푹 내쉬며 누나는 말했다. 내가 아니라, 강 건너편을 보며.
“원래 오빠가 저렇게, 시합 끝나고 드러누우면 내가 곁에서 병수발을 했거든. 그런데 저 사람이 나보다 훨씬 더 정성껏 하는 거야. 한 순간도 오빠 곁을 떠나지를 않고... 처음에는 나가라고 눈치도 줘보고 했는데, 오히려 나한테도 가서 쉬었다 오라고 내보내고, 그러면서 자기는 계속 거기 있는 거야. 오빠 대소변 받아내는 것도 눈 한 번 깜박꺼리지 않고 하고 말야. 아까, 내가 왜 방문 앞에 서 있었는지 물었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누나는 팍 기가 죽은 말투로 말했다.
“이 이틀, 사흘 사이에 완전히 안주인으로 자리잡은 거 같아서, 내가 이방인이 된 거 같아서 그랬어. 손님으로 온 너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얘기하는데... 원래는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인데, 나보다 더 자연스럽게 하니까... 내가 어디 있어야 되나 싶고, 내가 들어가면 안 되는 자리 같고...”
누나는 무릎을 끌어당겨 끌어안고, 턱을 무릎 사이에 묻었다.
모르겠다. 오빠랑 사이 좋은 동생이 새언니를 보고 느끼는 감정 같은 건가. 누나보다 나이 어린 내가 이런 인생이나 인간관계에 대해 조언을 해 줄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웃긴 이야기겠지. 누나도 조언이나 현실적인 해결책을 바라는 것보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못 견딜 상황이었겠지. 타향에 와서 친구도 없고 했는데 마침 내가 옆에 있었고, 나에게 이야기를 끌어내는 스킬이 있었고. 여러 가지가 겹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겠지. 그러니 내가 여기서 어떤 이야기를 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가운데 놓여진 먹거리들을 내 반대쪽으로 옮긴 후, 누나의 곁에 앉았다. 오늘 두 번째네, 같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누나의 어깨 위에 왼팔을 둘렀다. 친밀하게, 다정하게, 하지만 성적인 의미로는 다가가지 않게끔 조심해서. 내 손길에 잠시 흠칫 놀라던 누나는, 내가 손으로 가볍게 다독이자 몸의 긴장을 풀었다. 그러더니, 끌어안고 있던 무릎을 풀고, 나에게 안겨들어왔다. 나는 오른손으로 누나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쓸어주었다.
“...”
나는 누나가 울지 않을까 했는데, 누나는 그저 나를 꼭 마주 안아올 뿐이었다. 크주크 형이, 누구보다 강했던 크주크 형이 지금 저렇게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마음을 의지할 곳이 없었던 건 아닐까. 지금 울지 않는 것만 해도 나는 누나가 정말 강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마치 아기를 돌보듯(해 본 적이 있는 건 아니지만) 누나의 등을 차분하게 다독다독 했고, 나를 꼭 안아오던 누나의 팔에서 살짝 힘이 풀어지며 누나의 호흡이 고르게 바뀌었다.
얼마간 그렇게 있었을까. 누나의 팔이 떨어지려고 해서 나도 얼른 누나에게서 손을 뗐다. 톨라츠 아저씨의 그 충고, ‘마음이 없는 여성에게 오해를 살 행동을 하지 않는 게 좋다’는 말이 생각나서였다. 어디까지나 나는 아는 동생으로, 힘들어하는 누나의 고민을 들어주고, 누나에게 뭐라 좋은 말을 해 주지 못해서 대신 누나를 꼭 안아준 거다. 뭐, 이 정도도 조금 과하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나는, 내가 힘들 때 누가 나를 안아주며 등을 다독이면 좋을 것 같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누나를 안아주었다.
“후우...”
누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올렸다. 눈가가 붉어져 있긴 했지만, 누나의 눈꼬리는 휘어져 있었다. 아까보다는 한결 편해보이는 표정이었다.
“고마워, 기리인.”
“뭘. 아무 것도 안 했는데.”
“그게 고맙다는 거야. 가만히 들어줘서 고마워.”
나는 약간 쑥스러워서 볼을 긁으며 강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으응- 이제 좀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아. 누구 말 할 사람이 없어서 답답했는데,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잔잔히 웃으면서 누나를 바라보았다. 배가 안 고프지는 않았지만, 마음만은 뿌듯했다. 사람들을 돕는 건, 그리고 내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도움에 감사하며 기뻐하는 걸 보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꼭 뭔가 답례를 받지 않아도 말이다.
“아이고- 너무 오래 쉬었다. 가서 비키 씨보고 잠깐 쉬고 오라고 해야지.”
누나는 기지개를 길게 폈다. 누나의 얇은 옷차림 아래로 잘록한 허리의 곡선과 반대로 풍성한 골반 곡선이 드러났다. 어우야. 나는 왠지 잘못하는 거 같아 눈을 돌렸다. 누나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곧 돌아간다고?”
“응, 내일 모레 아침에 출발해.”
“그래... 내일도 올거야?”
“잘 모르겠어. 다른 일행들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아.”
“그래... 어?”
누나가 갑자기 옆쪽을 돌아보며 놀란 소리를 냈다. 나도 그 쪽을 돌아봤다. 어? 아무 것도 없는데? 나는 누나를 다시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 것도 없는... 읍!”
갑자기 시야가 확 들어차며 누나의 얼굴이 다가왔다. 누나의 촉촉한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혀를 섞거나, 입술을 부비거나 하는 키스가 아니라, 잠시 닿았다 떨어지는, 그래, 마치 새들이 부리를 마주치는 그런 키스였다. 그 키스와 함께 나에게 짧게 머물렀다 떨어진 누나의 향은 청량한 느낌이었다.
“이건 내 얘기 들어준 값.”
누나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러더니,
“아- 늦었다! 가자!”
쑥쓰러웠는지 내 말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려, 아까의 정자 옆으로 올라갔다. 나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입술을 매만졌다. 아주 짧게 뮤리나 누나의 입술이 머물렀다 간 내 입술에는 누나의 청량한 향기가 남아있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잠시 슬럼프 + 오후에 손님이 오셔서...
아무리 생각해도 뮤리나와의 씬은 너무 뜬금없는거 같아서 이 정도가 한계인 거 같아요.
취향 타는 글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부탁드립니다. 더 재미있는 글을 쓰겠습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다 봤겠죠? ㅎㅎ;
melontea 님 // 그러게요. 언젠가 기리인이 일 다 마치면 다시 만날수도 있지 않을까요?
eastarea 님 // 죽이기에는 제가 마음이 너무 독하지가 않아서 ㅎㅎ;; 물론 언제가 죽는 캐릭터도 나오긴 하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