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0 4. 누군가의 즐거움이 누군가에게는 슬픔 =========================
다음 날. 형은 보고서 작성을 대충 끝내었고, 사소한 편집은 아랫사람들에게 시킬 거라고 하며 <미틱 시 상공담당관 살해사건 보고서>와 <북부 대공령 시바낙 재배에 관한 보고서 – 별첨 : 시바낙의 독성 완전정화에 대한 정보>, 그리고 <레카 시 정세보고서> 등 종이 세 뭉치를 꺼내어서는, 자신의 인장을 찍어 봉인한 후, 황도에만 존재하는 쾌속 파발편을 통해 제도 수사기사단으로 먼저 보내었다.
“이렇게 해야, 우리가 가서 일일이 보고하지 않아도 미리 상황을 알고 준비를 할 수 있지. 만약 의문점이 생기면 미리 정리해서 우리가 갔을 때 바로 물어볼 수도 있고 말야.”
“미틱 시에 있을 때는 왜 안 보내셨어요?”
“분실의 우려가 있으니까. 황도의 쾌속 파발편은 황제 폐하 직속 관리가 운영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거의 없어. 뭐... 안 되면, 내가 가서 구두진술하지 뭐.”
형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 너도 짐 정리하러 가야지.”라고 하며 영빈관 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형은 자러 가는게 틀림없었다. 지금도 피곤이 눈 아래 거멓게 묻어있었으니까. 심심치 않게 날밤을 새야 하고, 그러면서도 전투력과 판단력을 유지해야 하는 게 제국 수사기사인 건가. 어우.
아저씨는 오늘도 신전에 다녀오시러 출타중이셨다. 미틱 시에서 있었던 ‘치유의 손’ 사건과 관련해 아저씨도 교단 쪽에 보고할 일이 있는 모양이셨다. 만약 다음에 유사한 단체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 그들을 이단으로 볼 수 있을 것인지 등에 대해 제도 옆의 디트리클 시에 있는 대신전에서 톨라츠 아저씨의 보고를 토대로 한참 치열하게 논쟁할 것이다.
에빌로 누나도 웬일로 잠시 자리를 비웠다. 누나는 몇 가지 마법 물품을 보충하고, 아저씨의 부탁을 받아 시장에서 장을 보고 오기로 했다. “같이 가 드릴까요?” 하고 물었더니, “짐이 많지도 않고, 그리고 배달시킬 거니까 괜찮다”고 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나는 영빈관 앞 정원에 멍하니 앉아 있게 되었다. 짐 정리라고 하지만 사실 별로 할 게 없다. 묵고 있는 곳이 영빈관이다보니 빨래 같은 것을 내가 할 필요가 없었고, 지금도 내어놓은 옷을 시청 소속의 메이드들이 잘 빨래하고 말려서 문 안에 잘 개어놓았다. 영빈관 안이라 도둑들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배에서 비키 씨가 내 방에 들어온 이후 들인 습관대로 문도 잘 잠그고 다녔다. 그래도 혹시나 몰라서 하루에 한 번씩은 활을 살펴보고, 북대공 전하께서 주신 갑옷도 살펴보았다. 10분이면 당장 떠날 채비를 마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아...”
마냥 가만히 있자니 좀이 쑤신다. 에잇. 어차피 형은 자러 들어갔고, 내가 여기 있는다고 별 달라질 게 없으니까 나도 나가봐야겠다. 이런 일 있을 때 읽을 책이나 한두 권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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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실수였다. 아무리 휴대하기 편한 작은 책으로 샀어도 책은 무겁기 짝이 없다. “좋은 책들은 북쪽 서점에 있지만, 여행길에서 읽기 편한 책을 찾는다면 남쪽 서점가가 나을 거에요”라고 조언해 준 메이드의 조언에 따라 나는 남쪽 서점가에 왔다. 이 무거운 걸 들고 영빈관까지 돌아갈 생각을 하니 갑갑해진다. 아저씨는 내가 들고 가기 힘들 거라며 책 세 권을 끈으로 묶어주었다. 그걸 옆구리에 끼고 걷자니 매우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흐흐. 그래도 재미있는 책들을 샀으니 여행길에 지루하지만은 않겠지. <무명의 검사>라는 짧은 제목의 소설 한 권(괜히 제목이 끌려서 샀다)과, <역사 속의 명전투와 명장들의 전략적 선택>이라는, 전략서로 위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무용담을 담은 역사책,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도를 여행하는 자들을 위한 안내서 – 음식점, 관광지, 명산품, 에티켓 등을 위주로>라는 길고 긴 제목의 제도 안내서를 샀다. 마지막 거는 괜히 샀나? 에아임 형한테 물어보면 되는데. 아니야, 형은 출근하니까, 선생님 못 만날 때는 이 책을 이용해야지. 그리고 제도에서 찾아가 볼 사람들도 있고.
“어? 기리인!”
누군가 나를 불렀다. 이 도시에서 나를 아는 사람이 누군가, 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세상에.
“수르키...씨?”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나 보고 싶어서 온 건가 혹시?”
여기가... 으윽. 극장 앞이구나. 남쪽에 있는 서점을 가 보라고 해서 그리로 왔더니, 잠시 정신을 놓고 걸었더니 극장 앞 대로를 지나고 있었구나. 수르키 씨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극장 앞에서 마차에서 내린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두죠.”
“흐응. 역시 쉬운 남자는 아닌 모양이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주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수르키 씨를 본 사람들은 자주 보는 광경인 듯 ‘오, 수르키다’ 하고 보는 사람도 있었고,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고개를 돌려버린 사람도 있었다.
“바쁘니?”
“지금은 괜찮아요.”
“차나 한 잔 하고 가.”
괜찮겠지. 여기서 계속 서 있으면 수르키 씨가 곤란하기도 할테고.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극장의 옆쪽으로 돌아가, 배우들이나 극장 관계자들이 출입하는 옆문으로 들어갔다. 잠시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걸어가니, <대기실>이라고 쓰인 문이 있는 방이 나타났다. 그녀가 문을 열고, 마치 신사가 레이디를 안내하듯 짐짓 고개를 숙여보이며 안으로 손을 펴보였다. 나는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대기실은 그렇게 넓지는 않았다. 화장을 할 수 있게끔, 거울과 의자가 있었고, 푹신한 소파와 테이블이 있었다. 방 안에는 수르키 씨의 짐인 것처럼 보이는 옷가지들과 가발들, 화장품들이 널려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았고, 수르키 씨는 고개를 밖으로 내밀고 “여기 차 두 잔!” 하고 외치더니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잘 지냈어?”
“정신없이 지냈어요.”
“흐음? 여행자가 뭐가 바쁜 일이 있다고?”
“아... 크주크 왕중왕 되는 거를 보러 갔었거든요.”
그녀는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만 말해줘도 되겠지.
“수르키 씨는 잘 지냈어요?”
“니 생각 나서 잘 못 지냈다고 하면, 믿을래?”
“아하하, 하면서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으면 될까요?”
“어떻게 한 마디를 지지를 않니.”
그녀는 친밀한 태도로 내 뺨을 꼬집은 후 말했다.
“나도 바빴어. 저번처럼 그런 날이 아니고는 매일 공연이 있으니까. 도시 최고의 여배우다 보니, 내가 나오는 날이랑 안 나오는 날이랑 표 팔리는 게 다르거든.”
“아...”
문이 열리고, 나보다 서너 살은 어릴 것 같은 남자아이 하나가 찻잔 두 개를 날라와 우리 앞에 놓아주고는 공손히 고개를 숙인 후 방을 나섰다.
“언제 떠나?”
수르키 씨가 지나가듯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내일요.”
“그렇구나... 제도로 간다고 했었지?”
“네. 마차를 타고, 황도를 이용할 거래요.”
“황도라... 나도 가 본 적은 없지만 에렌스 말로는 엄청 심심하다던데. 너무 편해서.”
나는 책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그래서 이거 사러 왔었어요. 심심할 때 읽으려고.”
수르키 씨는 책의 제목을 보더니, “이런 거 읽으면 졸리는 거 아냐?” 하고는 별 재미 없다는 얼굴로 책을 돌려주었다. 잠시 대화가 끊겼다. 나는 무슨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지금은 침묵할 때도 아니고, 수르키 씨의 이야기를 끌어낼 때도 아닌 것 같은데. 우리 둘이 김이 올라오는 차를 마시는 소리만 호르륵 하고 방을 울렸다. 얼마나 그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수르키 씨가 찻잔을 달칵, 하고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 뒤로 내 생각 한 적 있어?”
“네.”
“거짓말.”
“정말인데요.”
“빈말이라도 고맙네.”
더 우기면 진짜 빈말이라는 게 들통나니까 여기까지만. 나는 헤헤, 하고 약간은 바보같이 웃어보였다.
“나는 니 생각 몇 번 했는데.”
“네?”
바보같은 내 물음에 수르키 씨는 다시 찻잔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마시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찻잔의 온기를 손으로 느끼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냥... 그 날, 너하고 그렇게 마른 검불 타듯 휘리릭 하고 몸을 섞고 나서... 돌아와서 자려고 누웠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 니가, 이제 막 성인이 된, 스쳐 지나가는 기리인이라는 남자가 내가 원해서 같이 잔 처음 남자라는 생각이.”
점점 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는 계속 찻잔을 내려다보는 자세로 말했다.
“말했지? 너를 보면 옛날의 내가 생각난다고. 지금의 내 모습에 나는 만족해. 예전에는 누리지 못했던 여러 가지를 누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때 너와 그렇게 짧고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고 나니까... 가 보지 못한 길에 대해서 궁금한 마음이 생겼어.”
그녀는 크게 한숨을 쉬고는, 나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네 생각을 계속 하면 내가 흔들려 버릴 것 같아. 나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어. 그게 다른 것 때문에 흔들려버리는 건 싫어.”
이해가 완전히 가지는 않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나를 불러놓고는 자기가 나를 차네,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톨라츠 아저씨의 말을 기억하자. 나는 남은 찻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여기서 인사할게요. 수르키 씨.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요. 가끔 생각할게요.”
나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녀는 약간 착잡한 듯도 하고 화가 난 듯도 한 복잡한 눈길로 내 손을 내려다보다가, 픽 웃으며 손을 마주잡았다.
“그래. 나도 고마워. 내 정신적인 첫 남자 기리인 모스.”
그러더니 그녀는 아직 잡은 채인 내 손을 끌어당겼다. 내가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자 그녀는 왼손으로 내 목을 잡아당기며 입술을 겹쳐왔다. 그녀의 입 안에서 민트 향과, 그날 밤에 났던 봄 꽃의 향수 냄새가 났다. 짧지만 아주 격렬하게 그녀는 혀를 넣어 내 입 안을 휘저었다. 내가 미처 마주 호응하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이 떨어졌다.
“작별 인사. 이제 가. 배웅은 못 해주겠다.”
그녀는 몸을 돌려 뒤로 손을 내저었다. 나는 그녀의 등을 향해 고개를 숙여보인 후, 그녀의 방문을 나서 아까 왔던 길을 되짚어 밖으로 향했다. 격렬한 키스 탓에 아직 얼얼한 입술을 어루만지자, 수르키 씨의 입술연지 색깔이 묻어나왔다. 황급히 로브 자락에 입술을 닦았다.
그 때, 머릿속으로 누군가 웅웅거리는 말투로 말하는 느낌이 났다. 어, 이건... 메시지 스펠이다!
- 기리인. 어디 있니? 나 에빌로야.
에빌로 누나의 목소리다. 누나의 말에는 감정이 전해져오지 않고 있었다. 누나의 마법 경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누나의 다음 말에 나는 깜짝 놀라 뛰기 시작했다.
- 뮤리나가 전갈을 보내왔어. 크주크가 깨어났대.
============================ 작품 후기 ============================
100편이네요.
연참을 하고 싶었습니다만 그건 내일 시도해 보겠습니다.
이 글에 하루에 몇 시간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그 덕에 좋아해주시는 분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루에 적게는 1100에서 많게는 1300 정도의 조회수가 나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한데 아쉬울 때가 있습니다.
저번에 쓰던 <인류 v2.0>처럼 짧게나마 노블 베스트 목록에 오를 걸 기대했는데
그러지 못해서인가, 아쉽고 욕심이 날 때도 있습니다.
지금의 조아라 메인스트림과 거리가 있는 글을 적어서인가... 싶기도 하고요.
늘 이런 생각의 끝은
그래도 이 글을 좋아해주시는 선작해주신 독자분들이 500분 넘게 계시다,
그 분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내가 읽어도 재미있는 글을 쓰자, 라고 돌아갑니다.
좀 더 재미있게 쓰면, 좀 더 많은 분들이 재미있게 읽어주시겠죠... 그렇겠지요?
다음 편을 끝으로 길었던 4챕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황도를 타고 제도로 가는 길은 짧은 옴니버스식의 이야기가 될 예정입니다.
그 전에, 오마케를 짧게 연재하겠습니다. ㅎㅎ
오마케로 원하는 이야기가 있으시면 댓글에 적어주시면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체크필통 님 // 달달하게 헤어지는 걸 개인적으로 선호합니다. 감사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이거시 매력 100의 저주(?)... 감사합니다.
melontea 님 // 정확하게 제 생각이 그거였어요.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 기왕 살렸으니 이야기도 들어보고 떠나게 해야겠네요 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