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103화 (103/309)

00103 막간 #5. 오고 간 편지들 =========================

1.

기리인에게

편지 고마워!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는데, 오늘 자크가 편지 가져다 준 거 보고 나 정말 깜짝 놀랐어. 솔직히 말하면 좀 울었어. 슬퍼서가 아니고 감동해서. 나를 기억해줘서 정말 고마워.

여기는 늘 그렇듯 평온해. 조금씩 얼음이 녹고 따스해지려고 하고는 있지만, 너도 알지? 여기 4월이 어떤지. 아직 으슬으슬해서 돌아다닐 때는 꼭 외투가 필요한 날씨긴 해. 그래도 어디에서든 봄이 오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 사람들의 표정도 많이 펴진 것 같고. 조금만 지나면, 꽃이 피기 시작할 것 같아.

나는 요새 아카데미 때보다 더 힘들게 공부하고 있어. 아빠가 제도에서 에티켓 선생님과 화술 선생님, 교양 선생님을 불러다 주셨거든. 맨날 혼나기 일쑤야. 자세를 바르게 하기, 바른 자세로 차 마시기, 화제를 계속 이어가면서도 나서지 않기, 레이디가 알아야 할 교양 익히기... 세상에 이런 과목들이 존재하긴 하는구나 하고 놀랐어. 많이 힘들었지만, 지금까지는 할만은 해. 꼭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

정 힘들때면 니 생각을 하면서 버텨. 그 날 밤에 네가 얼마나 따뜻했는지.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는지. 그 기억을 떠올리면, 아무리 힘들게 선생님들이 나를 연습시키고 혼내도 나는 버틸 수 있어. 허락없이 니 생각 해서 미안하지만, 어쩌겠어. 니가 여기 없는데. 뭐라고 안 할거지?

여행은 힘들지 않아? 나도 여름이나 가을 쯤에는 제도로 내려가겠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북부를 떠난 적이 없다보니까 여행이라는 게 어떤지 참 궁금해. 혹시 막 지붕도 없는 곳에서 추위에 떨면서 자거나, 밥도 못 먹고 대충 건량 같은 거 씹으면서 다니는 건 아닌가 걱정되기도 하고.

다행히 편지에서 네가 좋은 사람들 만나서 다니고 있다고 해서 좀 안심했어. 네 이야기 보면서 내가 막 설레더라. 새로운 도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건 그런 건가 싶고. 부럽기도 하고.

나도 알아. 나는 내려갈 때도 울 아빠가 수배해 준 분들이랑 내려갈 거고, 가서도 사교계에 데뷔하기 위한 가르침을 계속 받거나 파티, 티타임 같은 모임이나 하게 될 거라는 거.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레이디들은 변하면 안 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니까. 엄마가 살아계실 때 그런 얘기 많이 해 줬었어. 얼마나 지루하고 따분한 곳인지,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서로 얼마나 속을 긁고 견제를 하는지. 오죽하면 엄마가, 제도를 떠나 본 적이 없는 그 엄마가 도저히 못 버티고 아빠를 낚아채서 북쪽으로 올라왔겠어.

그래도 나는 그 세계에 가야 해. 그게 우리 가문을 잇는 길이기도 하고, 북부 영지와 북부군을 위한 길이기도 하니까. 백작가의 일원으로서 그 의무를 피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그래도 너가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게 참 부럽기도 해.

계속 편지 보내줘. 네 말대로 다음 편지는 레카 시의 우편국으로 쾌속으로 보낼게. 다음 편지 보낼 곳을 편지에 적어주면 좋겠어. 내가 못 하는 새로운 경험들을 계속 알려줘. 그래줄거지?

다치지 말고, 건강해야 해.

리미가

2.

기리인에게

깜짝 놀랐어. 어떻게 편지 보낼 생각을 다 했니? 다행히 내가 채집을 감독하러 나가지 않고 실험실에 있을 때 와서 망정이지. 주소는 어떻게 알았니? 안 그래도 우편배달 해 주는 아저씨가 주소를 이렇게 적으면 어떻게 하냐고 뭐라뭐라 하시더라.

나는 잘 지내고 있어. 아버지도 건강하시고. 4월인데 아직도 약간 쌀쌀한 것만 빼면 공기도 물도 맑고 사람들도 잘 대해주고 북부도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북대공 전하나 라루트 님도 친절하게 대해주셨고. 꼬박꼬박 생활비와 연구비도 주고, 먹고 살려고 보통 약 안 만들어도 돼서 오히려 좋아.

시바낙은 잘 만들어지고 있어. 너가 준 마수의 심장은 정말 완벽한 상태였어. 백곰에서 변태된 마수였던가봐. 아버지와, 마탑에서 나온 마법사님이 음한한 성질의 마나를 줄이는 회로를 마법진에 추가해야겠다고 말하는 걸 들었거든. 어쨌든 결합이 잘 돼서 지금은 시바낙을 열심히 정제하고 있어.

만든 진통제를 가지고 북대공 전하에게 보고드렸더니 너무 좋아하셨어. 일단은 우선적으로 북부군에 보급하고, 지금은 북대공령 상단을 통해 여러 곳에 조금씩 팔아보려고 하고 있나봐. 내가 시바낙을 추출하는 방법도 큰 돈이 안 들고, 네가 마수의 심장을 주고 가서 마력석만 있으면 시바낙의 마약성을 정화하는 것에도 무리가 없어서, 돈 들 일이 없어서 다들 더 좋아하시나봐.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니? 여행은 재미있어? 나 올라올 때, 짐 잔뜩 실은 마차 한 구석에 얻어타고 왔는데, 너무 힘들었어. 엉덩이도 아프고. 아저씨들 사이에서 오려니까 눈치도 많이 보이고. 남자라서 조금 나으려나?

아니, 너는 성격이 좋고 잘 생겼으니까 사람들도 잘 대해주지 않을까? 그 때 봤던 에아임씨나 톨라츠씨, 에빌로씨 모두 좋은 분들이신 거 같더라. 너하고도 친한 것 같고. 그 분들하고 제도로 같이 갈 거지? 그러면 심심하지도 않고, 여행길도 어려운 길이 아니고 괜찮을 것 같네.

자꾸 네가 나를 보고 ‘귀엽다’고 말하면서 부드럽게 입맞춰주던 그 날이 생각나. 가끔씩 막 일하다가도, 멍하니 그 때를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해. 그럴 때면 나 미친 사람처럼 히히힛 하고 웃고 있더라. 어지간히 좋았나봐.

누가 나보고 예쁘다고 해 준 게 처음이었거든. 맨날 약제실 안에 틀어박혀서 연구만 하느라 꾸미지도 못하고 옷도 별로 없고, 여자로서는 전혀 매력이 없는 줄만 알았는데... 그때 내 무리한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나를 따뜻하게 안아준 게 지금 생각해도 너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어.

고마워, 기리인. 네 덕분에 가슴 한 구석이 따뜻해. 오래오래 따뜻할 것 같아.

또 편지 보내줘. 다음에는 <북부 대요새 내성 지하 제2약물연구소>로 보내면 될 것 같아. 네 말대로 이 편지는 레카 시 우체국으로 보낼게.

동봉한 통에는 생산되기 시작한 진통제가 들어 있어. 검지 손톱만한 알약들이야. 한 번에 어른이 하나씩 먹으면 될 거야. 대략 30개 정도 넣었어. 먹을 일이 안 생기기를 바라지만.

몸 상하지 않고 끝까지 잘 여행 마치길 바랄게.

언젠가 꼭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아르토 누나가

3.

리미에게

오늘 우체국에 가 봤더니 편지가 와 있었어. 답장 잘 받았어. 고마워. 모두가 잘 지낸다니 다행이야. 특히 네가 잘 지내고 있다니 좋네.

나는 지금 레카 시에 와 있어. 저번 편지에서 썼었던 대로 좋은 일행을 만나 제도까지 동행하기로 했어. 그래서 마차를 빌려서 내일 모레 마차를 타고 제도로 출발할 예정이야. 여기는 완전한 봄이네. 외투나, 하다못해 조끼를 입지 않고 셔츠랑 바지만 입어도 불편하지 않은 좋은 날씨야. 길거리 꽃집에도 꽃들이 풍성하게 피어 있고.

엄청 많은 경험을 한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막상 따지고 보면 아직 북부 요새를 떠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는 게 참 신기해. 여행이라는 게 이런 건가? 아니면 내가 특별한 걸까. 가끔씩, 아직 중부인데도 따뜻한 봄날씨에 좀 당황스럽기도 해. 이 계절이면 아직 북부에서는 코트가 필요할 때인데... 하는 생각도 들고.

이번에 레카 시에서 격투기를 보게 되었어. 대륙 중부를 통합하는 격투기왕이 왕좌 방어전을 아홉 번 연속으로 성공시킨 사람이었는데, 열 번 방어전을 하면 왕중왕이 되어서 은퇴하는 게 관례래. 그런데 마지막 왕중왕은 150년 전에 나왔었다고 하거든. 도시 전체가 완전히 그 사건 때문에 끓어오르더라구. 운 좋게, 미틱 시에서 레카 시로 가는 배에서 그 왕중왕전에 출전하는 격투왕을 만났고, 친해져서, 표를 얻어서 맨 앞자리에서 그 경기를 보았어. 그 경기 전날 있었던 전야제에서 레카 시의 여러 명사들도 만났고.

그런데, 사교계는, 이런 얘기 하면 네가 싫어할지도 모르겠는데, 매우 구역질나는 곳이었어. 쾌락을 위해서는 양심이나 상식 같은 것은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을 공공연히 하고 있고 실제로 실천하기까지 하더라고. (제도에서 일하는 일행에게 제도 사교계도 이러냐고 물어봤더니 그건 아니라고 했어. 만약 제도도 여기 레카 시랑 비슷했다면 너보고 가지 말라고 하려고 했었거든.) 다음날 펼쳐 진 왕중왕전에서도, 선수들이 피가 튀고 뼈가 부러지건 말건 환호하고 야유하며 발을 구르는 사람들을 보니까, 사람들이 원래 그런 건가, 싶기도 했어.

내가 아는 누군가가 ‘사람에 대해서 불신을 가지면 사는 게 힘들다’고 하더라구. 그래서 사람들이 원래 그런 거다, 원래 남의 고통에는 무감각하고 자신의 쾌락만 쫓는 존재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려고. 그냥, 나 혼자만이라도, 내가 즐겁고 기쁜 일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의 슬픔이나 아픔을 모르고 지나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

또 편지 보낼 수 있으면 편지 보낼게. 다음에는 아마 제도의 에아임 로그푸스 씨 댁에서 머물 거 같아.

공부랑 연습 잘 하고, 건강하고, 즐거운 나날 보내기를 기원할게.

기리인이

4.

누나에게

편지 고마워요. 오늘 혹시나 하고 레카 시 우체국에 들렀더니 누나의 편지가 와 있더라구요. 며칠만 늦었어도 편지 못 받을 뻔 했어요. 저 3일 후면 제도로 떠나거든요.

누나가 북부에 잘 정착했다고 하니 정말 기뻐요. 솔직히 말해 그 때 제가 마수의 심장도 내놓고 가운데에서 중재 역할을 맡기는 했지만, 너무 순식간에 짜낸 대책이라 잘 될 수 있을까 걱정 많이 했었거든요. 그런데 누나도, 누나의 아버님도 북부가 마음에 들고, 일도 잘 되고 있다니 제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아요.

저에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나는 정말 예쁘고, 머리도 좋고, 자기 일에 충실한 멋진 사람이에요. 누나가 어깨를 펴고 약간만 옷차림에 신경써도 순식간에 남자들의 눈을 잡아끄는 사람이 될 거에요. 저는 운이 좋게 그걸 좀 일찍 발견한 거구요. 누나를 보고 귀엽다, 예쁘다고 했던 건 그러니까 완전한 진심이었던 거죠.

그러고 보면 저는 참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누나를 우연히 포니만 약재상 안에서 만났던 것도, 우연히 에아임 형이나 톨라츠 아저씨, 에빌로 누나를 만났던 것도 모두 운이었거든요. 그 분들이 하나같이 좋은 분들이었던 것도 그렇구요. 그 덕에 지금까지는 평온하고 재미있는 여행을 하고 있어요. 누나의 기원도 분명 한 몫 했겠죠?

다음 편지는 제도에서 보내게 될 것 같아요. 에아임 형네 집에서 머물기로 했거든요. 그리로 편지 보내주세요. 누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어요.

건강하세요. 연구에 몰두하다가 몸 상하지 말구요.

기리인이

============================ 작품 후기 ============================

쉽게쉽게 쓰여지긴 했는데 양이 만만치 않군요. 다행입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조회수 1, 추천수 1, 코멘트 하나에 저는 기분이 확 좋아지고는 합니다. ㅎㅎ

브륀하르트 님 //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닉은 브륀힐트 + 라인하르트 조합인가요? ^^;

화이트프레페 님 // 그러게요. 약간 어깨 힘 빼고 쓴다는게 너무 양아치처럼 써 버렸네요. 제 불찰인듯 합니다. 아, 그리고, 이번 외전은 화이트프레페 님 말씀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퇴장한 여캐들하고도 계속 연락하는 게 어떤가 하셔서요.

executioner 님(16편) // 위로가 정말 많이 되는 댓글 감사합니다. 힘내서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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