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104화 (104/309)

00104 5. 세 가지 이야기 =========================

5. 세 가지 이야기

“으하-암.”

나는 마차 지붕에 앉아서 하품을 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풍경이라도 변화가 있으면 모르겠는데, 가끔씩 길 옆에 숫자가 크게 적힌 바위가 나타나는 것 말고는 계속 같은 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다못해 길이라도 가끔씩 꾸불꾸불하면 모르겠는데, 이건 마차 서너 대가 한 번에 지나갈 만한 널찍한 길이, 잘 포장된 채 직선으로 쭉 뻗어있는 길이 언제까지고 계속 직선으로 이어지니...

나는 오늘 몇 번째인지도 모르게 저 멀리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무 것도 안 보인다. 가끔씩 옆에 나무와 바위, 풀밭 같은 것들이 지나가는 것 말고는 이 근처는 아무 것도 없다. 아주 가끔씩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 사는 마을 같은 것들이 나올 때면 눈물나게 반가울 정도다. 여전히 길 앞쪽으로는 길만 보일 뿐이다.

“기리인, 졸리면 들어와서 자라. 거기서 자면 얼굴 탄다.”

나는 얼굴 때문이 아니라 여기 있으면 봄 햇살 계속 받다가 졸아버릴까봐 내려가기로 했다. 마부석 옆으로 훌쩍 뛰어내리자, 형은 심지어 고삐도 놓은 채 등을 기대고 앞으로 발을 쭉 뻗고 있었다.

“형이 이러는 게 이해되려고 해요.”

형은 피식 웃었다.

“황도, 지겹지?”

“졸려 죽겠네요. 이런 곳이었어요?”

“그럴 수밖에 없어. 이건 원래 군사목적으로 만든 길이거든.”

“네?”

“기리인, 수도는 어디에 있는 게 좋겠니?”

“어...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이라고 말하면 형은 저를 바보로 보겠죠. 가장 이상적으로는 국토의 정중앙에 있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래. 그럼 우리 제국의 제도는 어디에 있지?”

“어... 드래곤 르플레스탁이 있던 푸른 산맥 너머...”

“그래. 이상하지 않아?”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그냥 학교에서 ‘제도는 이티클레 대륙의 서쪽, 푸른 산맥 너머에 있고, 제도를 지키는 것은 북쪽의 로그푸스 변경백과 남쪽의 제국 해군기지이다, 그리고 제도 옆에 부속 도시로 디트리클 시가 있다’고만 배웠지, 이런 걸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더더군다나 마법 아카데미를 다니기 시작하며 일반적인 학문은 잘 배우지 않았으니 더더욱 그런 기회가 없었지.

“이상하네요.”

“기리인. 우리끼리 있으니까 조금 편하게 얘기할게. 나중에 형을 불경죄로 고발하거나 하면 안 된다?”

“그렇게 말하니까 잘 기억해놨다가 나중에 꼭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놈이.”

살짝 내 머리를 장난스레 쥐어박은 형은 말했다.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위엄...이라는 건 사실 뭘까? 군대야. 언제든 까불면 군대를 보내서 박살내버릴 테니까,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거다, 이런 보이지 않는 압박이 있기 때문에, 북대공, 중부 공작, 남부 공작, 그 외 동해안을 면해서 있는 도시의 시장들과 몇몇 공작 산하 후작들이 황제 폐하에게 거스르지 못하는 거지.”

“냉정하지만 현실이네요.”

“그럼 여기서 다시 질문. 북대공 전하가 통솔하는 북부군은 몇 명이지?”

“대략 5만명 정도...”

“그래. 그러면 황제 폐하가 다스리시고, 우리 로그푸스 변경백가에서 관리하는 황제 친위군은 몇 명인 줄 아냐?”

“글쎄요...?”

“황실 기사단이 5천 명, 마법사 포함 부속 인원이 5천 명.”

“네? 그것 밖에 안 돼요?”

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차이가 있지. 북부군은 내가 알기로 5만명이 모두 모여있는 적이 없지? 실제로 마수들 내려오는 걸 막아야 해서 전방 초소나 감시 기지 같은데 꽤 많이 가 있지?”

“네. 기지에 항상 반 정도가 있죠. 교대하니까.”

“그래. 그거다. 북부군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게 아니고,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겼을 경우, 실제로 북대공 전하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2~3만에 지나지 않아. 게다가 그 병력들 중에는 일반 보병이나 궁병들도 많이 들어있지. 하지만, 친위군은 전원 능숙한 승마 실력을 자랑한다. 전원 마나를 검에 실어 베어버릴 수 있는 실력자인 기사들은 물론이고, 궁수대는 가벼운 무장으로 경기병대 역할이 가능할 정도이지. 심지어 마법사들이나 보급, 행정대조차도 기사들에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말을 탄다.”

나는 형의 말을 잠시 생각해 보았다. 으음. 기병이라.

“그럼 황도가 이렇게 넓고 곧은 이유는 기병 전력을 무리없이 푸른 산맥 너머로 보내기 위한 거였군요.”

“그렇지. 이해가 빠르구나.”

“어, 그럼... 니아트 강이 문제 아닌가요...? 예를 들어 융파트로 간다거나, 동해안 쪽을 치기 위해서는 남니아트 강을 건너야 하잖아요. 아무리 니아트 강이 물살이 빠르지 않아도 말이 수영해서 건너기에는 부담되는 거리 아닌가요?”

“역시 똘똘하구나.”

형은 내 머리를 막 헤집었다. 아 좀. 내가 머리를 다듬자 형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역대 황제 폐하들께서는 레카 시에서 강을 건너는 다리를 만드려고 많이 시도하셨지. 하지만 그 안건은 제국 추밀원을 구성하는 고위 귀족들이 모두 일치단결하여 반대하고 있다. 심지어 레카 시 마저도 반대를 위해 돈을 마구 풀고 있지.”

“다른 영주님들이야, 자기 목에 칼이 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드실 테고... 레카 시는... 만약 다리가 뚫리면 자신들이 중간에서 취하는 이익이 없어질까봐 그러는 모양이죠?”

“그래, 정확해. 뭐... 암튼, 황도는 그런 길이야. 그러다보니 황도는 제국 내의 어느 길보다 안전하다. 군대가 직접 치안을 관리하거든. 어, 저기.”

마침 저 멀리서 말들 여러 마리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탁 트인 평원 위라 한참 전부터 서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이 나타난 것 때문에 우리 대화는 자연스럽게 멈추었다. 그 사람들은 죽죽죽 다가와서 어느 새 대화가 들릴 거리까지 다가왔다.

다른 말보다 한 뼘은 더 키가 큰, 준수한 전마(戰馬, warhorse)들을 탄 기사들이었다. 브레스트 아머만 입은 기사들 네 명과, 가벼운 경장갑을 걸친 전령 한 명이었다. 형이 “여어.” 하고 손을 들어보이자, 선두에 섰던 기사가 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넷째 도련님 아니십니까!”

그의 뒤에 있던 네 명의 수하들도 에아임 형 쪽을 바라보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새삼 형의 신분이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자각을 하게 되는군.

“속보로. 먼저들 가라. 나는 도련님과 잠시 이야기한 후 따라잡겠다.”

“넷!”

그들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아까보다는 느린 속도로 앞으로 우리를 지나쳐 갔다. 반면 그 남자는 말을 돌려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마차 옆에서 말을 걷게 했다.

“오랜만에 보는군, 나브필. 집사람과 딸들도 건강하고?”

“이를 말씀입니까. 걱정해주신 덕분에 다들 잘 지냅니다. 가셨던 일은 잘 되셨습니까?”

“아, 잘 됐지. 기리인, 인사해라. 황도수비대 대장이시고, 친위대 기사단 소속의 기사이신 나브필 프투 경이시다. 나브필, 이 쪽은 기리인 모스. 이번에 내 일을 아주 많이 도와준 동생이야.”

나브필 경은 ‘동생’이라는 말을 듣더니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반갑습니다. 말 위에 있어서 인사를 간략하게 하는 점을 양해해 주시길.” 하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내가 마주 깊이 고개를 숙이자, 나브필 씨는 잘 자란 콧수염을 만지며 웃으며 말했다.

“에아임 도련님이 동생이라고 부르셨다고요? 이거 큰 사건인데요. 그 정도로 친했던 사람은 지금까지 없지 않았습니까?”

“이 사람이 별 소리를 다 하는군.”

“그야, 제가 어릴 적부터 에아임 도련님 자라는 걸 봐왔기 때문이죠. 저 친구가 어지간히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하하.”

형은 별 말 없이 웃기만 했다. 면전에서 이런 칭찬을 들으니 낯이 매우 부끄럽다.

“나브필, 레카 쪽으로 가나?”

“네. 레카 쪽 초소에서 1주일 정도 있을 예정입니다.”

“그렇군... 그러면 제도로 돌아온 후에나 볼 수 있겠군.”

나브필 경은 다시 수염을 매만지며 – 버릇인가보다 – 웃으며 말했다.

“남자에게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건 사양하고 싶습니다만.”

“나도 수염난 애딸린 유부남은 사양이야. 공무중인데 잡아둬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제가 도련님에게 인사하려고 남은 걸요. 황도니까 안전하겠지만, 여행 살펴가십시오, 도련님.”

“아, 그래. 제도에서 보면 술 한잔 하자고.”

나브필 경은 가슴에 손을 주먹쥐어 올리는 군례(軍禮)를 한 후 말을 돌려 아까 먼저 떠난 일행들을 따라 떠났다. 형은 그가 떠나는 모습을 잠시 보고 있다가, 내 얼굴을 보고는, 말했다.

“왜?”

“아뇨... 왠지 무릎꿇고 그 간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고 말해야 할 분위기라서요.”

형은 나를 멍하니 보다가, 큭큭 하고 웃으며 다시 머리를 헤집었다.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그리고 설령 그러고 싶어도 그러지 마라. 그러다가 소원해지는 건 정말 싫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길은 많이, 너무 많이 남아있었다.

============================ 작품 후기 ============================

5챕터 시작합니다.

5챕터는 옴니버스 식의 이야기가 조합된, 짧은 챕터로 만들려고 노력중입니다.

읽어주시는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신 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숫자가 하나 둘 올라갈 때마다 글쓰는 보람을 느낍니다.

melontea 님 // 하렘은 관리가 생명이라죠... (뭐래니) 코멘 감사합니다!

브륀하르트 님 // 라인하르트에게는 브륀힐트죠. 감사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전형적인 시마과장식 전개...?;;; 어떻게든 미움 안 사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인게죠 ㅎㅎ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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