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5 5. 세 가지 이야기 =========================
“아함...”
뒤에서 하품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에빌로 누나가 작게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잘 잤어요?”
“응...”
“더 안 자요?”
신기해서 물어본 내 질문에 누나는 약간 흘겨보며 말했다.
“아무리 나라도 있다 자려면 이제는 깨야지.”
미안해요, 라고 웃으며 말했다. 누나는 별 개의치 않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경전을 보고 있던 톨라츠 아저씨가 웃으며 말했다.
“기리인 군, 새삼 에아임 씨의 배경이 대단하다 싶었나봐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저씨는 경전을 덮으며 말했다.
“에아임씨가 처음 기리인 군을 만났을 때 가명을 쓴 이유도 그겁니다. 로그푸스라고 자신의 성을 밝히면 사람들이 너무 긴장해서 말이에요. 같이 다니다보면 그런 일이 흔하지요.”
에빌로 누나마저도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자주 그런 일이 있긴 했나보다. 옆 자리의 형을 돌아보자 형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내가 울 아버지한테 태어난 게 잘못이지 뭐. 울 아버지는 울 할아버지한테 태어난 게 잘못이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 형.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가진 게 드로그 금화 한 닢이라면, 그 한 닢을 애지중지하며 마치 사제가 경전 모시듯 하겠지. 하지만 내가 백 닢을 가지고 있으면, 한 닢을 잃어버리면 속이 좀 아프긴 하겠지만 못 찾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 내가 만 닢을 가지고 있으면, 한 닢쯤 떨어트려도 ‘까짓것 적선한 셈 치지 뭐’ 하고 가던 길 갈 수도 있겠지. 그만큼 형의 배경은 대단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남은 거에요?”
“가만있자...”
이런 류에는 언제나 나서서 대답하고 또 정확하게 대답해주는 톨라츠 아저씨가 길가의 지나가는 숫자를 보았다.
“앞으로 한 두 시간 쯤이면 도착하겠네요.”
그러면 두 시간인 거다. 아저씨의 ‘부여된 재능 – 눈썰미’는 이런 예측의 정확도를 매우 높여준다. 저건 사람이 수련이나 재능으로 따라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신께서 내려주시는 거다. 좀 부러울 때도 있다.
“교대할까요? 에아임 씨?”
“그럼 고맙지.”
형은 마부석에서 일어나 톨라츠 아저씨의 큰 덩치가 나올 수 있게 먼저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이어 아저씨가 와서 마부석에 앉았다. 정말 크다는 생각이 드는 아저씨의 덩치는 생각보다 빠르고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저씨가 격투기를 했었으면 엄청났을거 같은데요?”
내가 그렇게 묻자, 톨라츠 아저씨는 허허 웃더니 말했다.
“저한테는 호승심이나 투쟁심이 없어서 어려울 거에요. 누군가를 꼭 이기겠다는 투쟁심이 있어야 힘든 훈련과 고된 생활을 이겨낼 수 있는 거거든요. 저는 신에 대한 믿음 없이는 그런 쪽하고는 인연이 없어서.”
“에이, 왜. 전에 대장장이하고 팔씨름 할 때도 있었다며.”
덜컥. 아마 동작에 소리가 있었으면 아저씨는 그런 소리를 내며 몸을 굳혔을 거다. 아저씨는 에아임 형의 말에 그렇게 잠시 굳어있다가, 약간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때는 저도 아직 어렸으니까요.”
“그랬지, 그 때는... 지금 에빌로 나이였던가?”
“그러면 저도 모르는 이야기겠군요.”
에빌로 누나가 약간 자세를 고쳐앉으며 말했다. 아저씨에게 말하라는 무언의 압박. 아저씨는 내가 아저씨를 만난 이래 처음으로 약간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웃더니,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그렇지요, 언젠가는 꼭 그 분에게 가서 묻고 싶군요. 그 때 왜 그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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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처음부터 이렇게 에아임 씨를 따라다닌 것은 아닙니다. 기리인 군은 알려나 모르겠네요. 트리클의 사제가 실제로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마흔다섯부터이고, 그 전까지는 세상에 섞여서 다양한 일을 하게 되죠.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이 사제란 것을, 신에게 치유능력과 재능 한 가지를 받는다는 것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뭐 말인가요? 아, 크주크 씨와 비키 씨를 축복했던 것 말이군요. 신께서도 사람을 살리기 위해 힘을 쓰는 것은 용납하십니다. 다행히 그 때 근처에 있었던 사람들 말고는 제가 사제라는 것을 안 사람은 없고, 그리고 먼 길을 돌아 상처를 안고 합쳐진 두 연인을 축복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실제로 신께서 천칭을 달아보시고 아무런 문제 없다고 판단하셨기에 제가 신의 축복의 힘을 발휘했던 것이었죠.
어쨌든, 사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마친 것이 스물다섯이었습니다. 스물다섯에 사제 학교를 졸업하는 사제가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입니다. 학교와 신전 안에서만 살았던 사제가 세상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래서 저를 지도해 주신 주임사제님께 가서 상의드렸더니, ‘너는 힘이 좋고 눈썰미가 있으니, 대장장이 같은 게 어떠냐’라고 말씀하시며 소개해 주셨습니다.
디트리클 시와 로그푸스 공작령 사이에는, 어디나 그렇듯이 조그마한 마을들이 이곳저곳 퍼져 있습니다.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들이죠. 저도 그런 마을 중 하나에, 견습 대장장이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마을은 다 해서 2~300명 정도 되는 작은 곳이었습니다. 다른 마을에 가려면 걸어서 두 시간은 가야 하는 곳이었죠. 마을에는 이런저런 잡화를 파는 가게, 주점 겸 식당 하나, 자그마한 신전 하나, 옷가게 하나, 마을 회관 겸 촌장님 집으로 쓰는 2층집 하나, 마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곡물 창고 하나가 고작이었습니다. 식료품 같은 것은 돌아다니는 행상인이 3일에 한 번씩 오는 걸 의지하는, 보통의 촌동네였습니다.
심심한 동네일 것 같다고요? 그랬지요.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곳이었으니까요. 강제적으로 목가적인 생활을 하게 되는 곳이었지요. 그때는 저도 갓 사제 학교를 졸업한 젊을 때였고, 지금처럼 신께 의지하고 육체를 단련하고 명상하며 시간을 보내는 버릇을 들이기 전이었습니다.
그런 저를 딱하게 여겨주셨던 게, 저의 사정을 알고 있던 마을의 주임사제님과, 주임사제님 소개로 저를 견습 대장장이로 받아주신 대장장이 아저씨였습니다. 성함이... 어... 네, 크람, 크람 씨였습니다.
에아임 씨는 이런저런 일 많이 겪어 보셨을 테니 아실테고, 에빌로 양은 작은 사회에 대한 경험이 있나요? 기리인 군은? 그렇군요. 농촌이 어떤 곳인지부터 설명하는 게 좋겠네요.
그런 마을은 모든 사람이 서로를 압니다. 아닌 말로 서로의 집에 있는 스푼과 포크, 나이프의 개수까지 모두 안다고 하죠. 모두가 가족처럼 지냅니다. 아이들이 뛰어놀다가 밥을 못 먹으면 어느 집에서든 밥을 주고, 다치거나 해서 농사일을 못하는 사람이 생기면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며 그 집 일음 함께 해 줍니다. 참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멋진 마을이지요.
그렇게 생각한 것이 깨어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기리인 군도 집에 손님이 찾아온 적이 있었지요? 손님이 정말 환영받는 사람이라면야 머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그닥 그런 사람이라면... 네, 그 말이 맞습니다. 겉돌게 되지요. 때로는 은근히, 때로는 대놓고. 워낙에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친밀해서 그 관계에 저 자신을 끼워넣는다는 것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어차피 대장간 안에서 크람 아저씨가 시키는 허드렛일을 하며 틈틈이 일을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지요. 약간씩 일에 여유가 생겨서, 트리클의 날에 신전에서 기도회에 참여한 후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기도 하고, 식당에 가서 식사를 사 먹기도 하고, 행상이 파는 물건을 사러 가기도 했었죠. 하지만 곧 포기했습니다. 점점 없는 사람 취급을 하더군요. 대장간에 찾아오시는 분들도 크람 아저씨만 찾거나, 아저씨가 잠시 자리를 비워서 저 밖에 없으면 그냥 고개를 저으며 돌아가곤 했었죠.
그때 저는 사제 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정말 고민이 많았습니다. 제가 사람들을 끄는 힘이 없나, 내가 문제라서 사람들이 나를 피하나... 저를 소개해 주신 마을 신전의 주임사제님에게 가서 상담하기도 하고, 크람 아저씨에게 물어보기도 했어요. 하지만 두 분 다 원래 그런 거니까 신경쓰지 말라고만 하시더군요.
그래서 결국, 마을에 있는 2~300명의 사람 중 제가 말하는 사람은 셋 밖에 없었습니다. 주임 사제님, 크람 아저씨, 그리고 크람 아저씨의 딸, 시치르 양이었어요. 그 때 스물이었던가 스물하나였던가 그랬습니다.
제 힘 얘기를 했었죠? 평생 저랑 힘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분이 크람 아저씨였어요. 정말이냐고요? 그럼요. 대장간에서 나르는 쇠가 얼마나 무거운지 아시잖아요. 그런 걸, 나도 저건 들기 힘들텐데 하는 걸 번쩍번쩍 드는 걸 보면 정말 감탄밖에 안 나오더군요. 아저씨는 망치질과 담금질을 할 때면 웃통을 벗곤 했어요. 약간 살이 오르긴 했지만 터질 것 같은 온 몸의 근육들 위로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며 감탄하기도 했었죠.
시치르 양은 우리를 위해 식사를 날라다주곤 했어요. 저보고도 오빠 오빠 하면서 친근하게 굴었죠. 신에게 몸을 바친 사람으로서 그녀에게 음심을 품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고아원에서 저를 오빠 오빠 하면서 따랐던 동생들이 생각나서 저도 웃어보이며 잘 해주려 많이 노력했지요. 결과적으로 저와 시치르 양은 꽤나 친하게 되었습니다.
크람 씨는 과년한 처자가 그렇게 외간 사내에게 살갑게 구는 것이 달갑지 않으셨던 듯, 그럴 때마다 시치르 양에게 야단을 쳤습니다. 시치르 양은 아버지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리곤 했지요. 하루에도 몇 번씩 투닥거리면서도 두 사람의 사이는 매우 좋아 보였습니다. 시치르 양은 꼬박꼬박 식사를 준비하고 우리의 뒷바라지를 해 주었고, 이러니저러니 하면서도 그녀를 가장 신경쓰는 것은 크람 씨였습니다.
============================ 작품 후기 ============================
말씀드렸듯이 이번 챕터는 기리인을 제외한 세 사람의 회상과, 그에 대한 이야기로 옴니버스 식으로 구성될 겁니다. 최대한 빨리 제도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메인 스토리 진행시켜야죠.
제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가능하다면 연참도 하고 싶지만, 아직 경력과 필력이 일천한 글쟁이는 쉽지가 않군요.
그래도 1일 3편이 가능하도록 더 노력해보겠습니다. 노력이 안되면 노오력이라도...
추천과 코멘트, 선작, 쿠폰 정말 감사드립니다. 숫자가 1 올라갈 때마다 글쟁이는 글 쓰는 피로를 잊습니다.
melontea 님 // ㅎㅎ 언젠가 그런 날이 오겠죠? 기리인도 언제까지 나비 생활(...)을 할 수는 없으니...
천상속 님 // 정주행 정말 감사드립니다. 힘내겠습니다.
Cantata 님(1편) // 과분한 칭찬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더 다듬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