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6 5. 세 가지 이야기 =========================
그때 저는 그런대로 잘 지냈던 것 같습니다. 단 하나 불편한 것이 있다면 잘 곳이 없었다는 거였어요. 아까 제가 겉돈다는 얘기를 했었죠? 대개 손님이 오면 마을 회관을 내줍니다만, 저는 그 마을에서 길게 있을 사람이다 보니까 그건 좀 무리였죠. 그렇다고 잘 모르는 저라는 사람을 위해 집을 내 줄 사람도 없고, 어쨌든 나를 받아들인 건 크람 아저씨니까 아저씨가 책임지라는 식이었죠. 결국 저는 대장간 한 쪽 구석에서 지냈습니다. 아저씨의 집은 옆집이었지만, 크람 씨의 방과 시치르 양의 방, 그리고 부엌, 창고 등이 다라서 제가 거기 있을 수는 없었거든요.
그래도 크람 아저씨랑 시치르 양이 말동무가 되어 주니 훨씬 낫더군요. 크람 아저씨도 성격이 좀 거친 데가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썩 친하게 지내기 힘들었거든요. 자연스럽게 아저씨와 저는 술친구가 되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시치르 양까지 셋이서 대장간에 둘러앉아, 시치르 양이 만들어온 안주에 아저씨가 담근 술을 한 잔 하는 것이 그 시절의 낙이었죠.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따라 아저씨가 너무 취했어요. 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날 좀 빠르게, 어, ‘달려버린’ 아저씨는 인사불성이 되어 대장간에 드러누워 버리셨습니다. 그 덕분에 그 날의 술자리는 빠르게 파하고 말았죠. 시치르 양이 말했습니다.
“오빠, 미안해요. 아빠 좀 날라다 줄래요?”
물론 그래야 할 상황이라서 저는 아저씨를 업었습니다. 아저씨의 덩치는 저만했습니다. 다행히 신께서 주신 힘이 있어 그렇게 어렵지 않게 저는 아저씨를 업어다가, 바로 옆 집, 아저씨와 시치르 양이 함께 사는 집으로 날랐습니다.
그 집에 들어오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집은 대단히 적막하고 고즈넉했습니다. 에빌로 양처럼 조용한 사람도, 집에 들어가면 여자의 방이라는 느낌이 나잖아요? 그런 게 별로 없었습니다. 아무리 시골 처녀라 해도 이건 좀 과하게 수수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요. 물론 시치르 양의 방에 들어가 본 적은 없으니 모르지만 말입니다.
아저씨가 쓰는 안방 침대에 아저씨를 눕혔습니다. 남자, 그것도 홀아비가 쓰는 방 답지 않게 좋은 냄새가 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안방 침대도 아내가 살아있을 때부터 쓰던 침대인지 큼지막한 2인용 침대더군요. 제가 아저씨를 눕히고, 시치르 양이 이불을 아저씨에게 덮어주었습니다.
“어머, 땀 좀 봐.”
시치르 양이 그렇게 말하더니, 제 손을 잡고 방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현관에서 이어지는 거실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도 별다른 장식이 없이, 아저씨가 쇠를 주물러 만든 쇠난로 하나와 안락의자 하나, 그리고 서랍장 같은 것만 있었습니다. 얼른 가서 수건을 가져온 시치르 양은 저를 숙이게 하고는 머리와 얼굴의 땀을 닦아주었습니다. 수건에서는 바짝 마른 빨래의 상쾌한 향이 났습니다.
“수고했어요, 오빠. 오빠도 힘이 세네요.”
“뭘, 아저씨가 나보다 힘이 더 센 거 같은데. 아저씨는 그 연세에 정말 대단하셔.”
시치르 양은 오히려 자기가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빠를 자랑스러워하는 딸 답다 싶었습니다.
“그래도 오빠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나 혼자서는 꿈도 못 꿨을 텐데.”
시치르 양이 왼손은 몸에 붙인 채 오른손으로 제 팔을 만지면서 말하더군요. 네, 에아임 씨, 그렇게요. 잡는 게 아니고,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이야 아저씨가 되었지만 그 때는 젊었고, 신께 인생을 바치기로 했지만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지요. 제가 당황하는 걸 보고 시치르 양은 풋 하고 웃더군요.
“고마워요, 오빠. 이제 내일 봐요.”
웃으면서 말했지만, 그건 명백한 축객령이었습니다. 과년한 아가씨 집에 총각이 들어와있으니 불편할 수도 있었겠지요. 저는 별로 기분 나빠하지 않고, 내일 보자고 웃으며 집을 나섰습니다. 문간까지 나와 저를 배웅해 준 시치르 양은 제가 현관을 나서는 걸 보고 문을 닫더군요. 여전히 왼손은 마치 몸을 감싸안듯 몸에 붙인 채로요. 뭔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습니다.
네, 위화감이요. 나중에 그 위화감을 준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지요.
다음 날 만난 시치르 양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 보였습니다. 걸음걸이가 약간 불편해 보였고, 몸을 돌릴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더군요. 얼굴도 약간 부어 있고요. 괜찮냐고 물으니 “괜찮아요.”라고, 왠지 모르게 쌀쌀맞은 태도로 말했지요. 사제 수업을 받느라 여자를 많이 보지 못했지만 여자분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생리 기간이 오고, 그 기간에는 감정이 흐트러지거나 날카로워질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건가, 하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상한 건 시치르 양의 태도만이 아니었습니다. 아저씨의 태도도 그 전날보다는 좀 차가워진 것 같았죠. 정확히 뭐라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짜증을 자주 내거나, 사소한 실수에도 호통을 치거나 하셨죠. 별로 그런 적이 없던 분이었거든요. 온화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과묵한 사람이라 야단도 한두 마디로만 끝나는 사람인데, 그 날에는, 아니, 아닙니다. 그 날을 기점으로 아저씨는 저에게 조금씩 차가워지는 것 같더군요.
술자리도 조금씩 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온갖 잡담을 하며 활발하지는 않아도 그런대로 대화가 있는 술자리였는데, 시치르 양은 안주는 만들어와도 술은 입에 대지 않고, 아저씨는 아저씨대로 기분나쁜 표정으로 술만 마시고. 저는 좌불안석으로 앉아 있고. 그랬지요.
그렇게 한 열흘 정도 지났을 때였습니다. 하루의 일을 마무리하고 정리하고 있는데, 크람 아저씨가 저를 부르더군요.
“톨라츠.”
“네, 아저씨.”
“힘 좀 쓰지?”
“네, 뭐...”
“이리 와봐.”
아저씨는 큼지막한 모루 앞에 서서 저를 불렀습니다. 제가 다가가자, 모루 건너편을 가리키며, 말하더군요.
“팔씨름 한 번 할까.”
“네?”
“너 힘이 좋다고 제멋대로 살면 안 된다는 걸 가르쳐주지. 얼른 덤벼.”
“네에?”
“어서!”
아저씨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일하는 중이고 제가 옆에 있었던 터라 술을 마시지는 않았는데, 왜 저러실까... 했지만 저는 시키는 대로 아저씨의 반대쪽으로 가 오른손을 모루에 올렸습니다. 아저씨의 힘이 저만큼 좋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 때는 저도 젊었으니까요. 호승심이 안 생길 수 없지요.
“단 판이다.”
웃옷을 벗어던지고 역시 팔꿈치를 모루에 올린 아저씨가 제 손을 으스러져라 잡으며 말하더군요.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저씨는 왼손에 조그만 금속 조각을 들고 말했습니다.
“이 조각이 떨어지면 시작하는 거다.”
고개를 끄덕이자, 아저씨는 왼손으로 조각을 위로 던졌습니다. 조각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자 우리 둘은 이를 악물고 힘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아저씨의 힘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아저씨의 손아귀 힘도, 팔 힘도 어마어마했습니다. 이가 으스러져라 꽉 깨물며 힘을 줘 봤지만 같은 힘으로 받아쳐오는 아저씨의 힘에 쉽게 전진하지 못했습니다. 아저씨도 온 몸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힘을 주고 있더군요.
아마 지금 같았으면, 적당히 져 주면서 “이야, 대단하시네요” 이렇게 말하며 아저씨의 기를 살려드렸겠지요. 하지만 그때의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기는 건 이기는 거였으니까요. 그때, 아저씨의 팔 힘이 약간 빠지는 걸 느꼈습니다. 그리고 저는 왼손으로 모루를 좀 더 세게 잡으면 조금 더 힘을 줄 수 있겠다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하자, 아저씨의 팔이 조금씩 조금씩 버티지 못하고 기울어지더군요.
“으아아!”
저는 마지막으로 용을 쓰며 이를 악물고 힘을 줬습니다. 아저씨가 결국 버티지 못하더군요. 제가 이긴 거죠. 그나마 마지막 양심과 눈치가 있어 환호하지는 않았지만, 약간은 의기양양했습니다. 아저씨는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더니, 갑자기 쓸쓸해진 목소리로 “내가 늙은 건가...”라고 말하더니,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웃옷을 집어들고는 대장간을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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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저씨는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 뒤로 아저씨는 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일을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 제가 평소처럼 도와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시치르 양도 조금씩 더 저를 차갑게 대하더군요. 아버지와의 팔씨름 결과를 알게 된 것일까요? 아니면 제가 은연중에 크람 아저씨를 무시한다고 느낀 걸까요?”
아저씨의 눈은 앞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시선은 길이 아닌 아저씨의 옛날에 가 있는 것 같았다. 아저씨는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말씀드렸듯이 그 마을에서 저와 이야기하던 사람은 셋 밖에 없었습니다. 그 중 두 사람과 이야기를 못하게 되니 마을에 있기가 너무 힘들더군요. 그래서 마을 신전의 주임사제님께 사정을 말씀드렸고, 혼내실 줄 알았던 주임사제님은 오히려 저를 다독이시면서 소개장을 써주셨죠. 저는 다시 디트리클 시로 가서 공무에 임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이단심문관 교육을 받고 그렇게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금 여기에 와 있네요.”
톨라츠 아저씨는 우리를 보며 빙긋 웃더니 말했다.
“여기서 문제 하나를 내지요.”
“네? 문제요?”
내가 묻자 아저씨는 에아임 형 쪽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에아임 씨가 심심하면 하는 것 있잖습니까. 지금까지 이야기를 듣고, 아저씨는 왜 그랬을까, 시치르 양은 왜 그랬을까, 하고 맞춰보시죠. 저는 마을을 떠나기 직전에 진상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한 얘기로 알 수 있는 거야?”
“정황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뭐... 못 맞추면 어떻습니까. 갈 길은 많이 남았는데요.”
맞는 말이다. 어차피 심심하니까. 아저씨가 빙긋 웃는 가운데, 나와, 에아임 형과, 에빌로 누나는 생각에 잠겼다.
============================ 작품 후기 ============================
약간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이번 에피소드는 아가사 크리스티가 만든 명탐정 '미스 마플'의 대표작, '화요일 클럽'의 진행방식을 차용했습니다. 에아임, 톨라츠, 에빌로가 각각 이야기를 하고, 진상을 추론하는 방식입니다.
여러분의 짐작은 어떠세요? 맞추시는 분이 있으실까요? ;)
홍보아이템 기간이 끝나면 조회수가 줄어드는 느낌이... 음음.
어쨌든 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부탁드립니다. 숫자가 1 올라갈 때마다 저는 너무 큰 보람을 느낍니다.
브륀하르트 님 // 글쎄요? 지금은 일단 기리인은 그런 생각이 없을 겁니다. 에아임이랑 친하다 보면 그럴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수사물 쓰고 싶은 생각은 아직은 없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좁은 사회라는게 그렇지요. 저도 개인적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 심하지는 않았는데도 확실히 쉽지 않다는 느낌이었죠. 리플 감사합니다.
melontea 님 // 그러게요 ㅎㅎ 지치지 않고 열심히 써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